레스큐 시스템 424화
탈출로가 막힌 것을 확인한 박상태는, 일단 요구조자들의 상태를 살폈다.
여기저기 긁힌 곳이 있긴 했지만, 다행히 모두 무사했다.
상처들도 크게 신경쓸 정도는 아니었다.
약간의 출혈 정도는 붕대를 묶는 정도로 충분히 지혈이 가능했으니까.
“너는 어때?”
손민준에게 물었다.
선두에 서서 폭발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으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 저도 괜찮습니다.”
불길에 한 번 뒤덮이긴 했다.
하지만 방화복 덕분인지, 손민준은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았다.
물론 폭발의 충격까지는 막을 수 없었기에 온몸에 타박상을 입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손민준의 튼튼한 육체는 그것마저도 버텨냈다.
“조금 어지럽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 같고요.”
“좋아.”
전원 움직일 수 있는 상태다.
그렇다면 일단은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좋았다.
“다시 돌아간다.”
폭발에 붕괴가 일어났으니, 이 근처의 구조물들은 꽤 약화되어 있을 터.
조금이라도 멀어져야만 했다.
“이쪽으로.”
손민준은 갑작스러운 폭발에 혼이 빠져나간 듯한 요구조자들을 챙겨 박상태의 뒤를 따랐다.
폭발 때문일까?
불길은 조금 전보다 더 커진 상태였다.
‘여기선 오래 못 버티겠는데.’
박상태가 주위를 확인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방화복을 입은 자신들과 달리, 요구조자들은 열기에 그대로 노출되고 있었다.
불이 직접 닿을 정도의 거리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뜨겁다면 화상을 입을 확률도 높았다.
‘그 후에는 탈진으로 쓰러질 테고.’
영 좋지 못한 상황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안 좋은 건, 건물의 상태가 불안하다는 것이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금이 가 있었다.
작은 실금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고, 군데군데 커다란 균열도 보였다.
“민준아, 무전기는?”
“먹통입니다.”
손민준이 무전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곤 물었지만, 들려온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야단났군.’
박상태는 자신의 무전기를 슬쩍 쳐다봤다.
폭발을 피해 몸을 날리다 어딘가에 부딪힌 것인지, 전원이 꺼져 있는 상태였다.
‘작동해야 할 텐데.’
박상태가 조심스럽게 전원 스위치를 돌렸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초록색 불이 들어왔다.
박상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박상태입니다.”
무전기를 입에 가져다 댄 박상태는, 곧장 율리안을 향해 무전을 쳤다.
[무사하셨군요.]
율리안의 답신이 곧장 돌아왔다.
무전기의 상태가 정상은 아닌지 잡음이 많이 들리긴 했지만, 의사소통을 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요구조자들도 모두 무사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좀 있습니다.”
박상태는 현재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돌입해 위로 올라가는 중이니까 조금만 더 버티세요.]
“건물 상태가 좋지 않은데, 괜찮겠습니까?”
박상태는 요구조자들이 듣지 못하게 작은 음성으로 물었다.
이번엔 바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조금 더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여기도 상황이 그리 좋진 않습니다.]
한발, 한발 떼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붕괴 위험도 문제였지만, 폭발 탓에 무너져 내린 곳이 너무 많아 이동 자체가 크게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계단의 일부가 무너졌다든지, 천장이 내려앉아 길이 막혔다든지.
[그래서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박상태는 무전을 끊었다.
율리안이 저렇게 이야기할 정도면 상황이 정말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자신들은 위험해질 확률이 점점 더 높아진다.
하지만 뾰족한 방도가 없었으니,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놈이 있었으면…….’
박상태의 머릿속에 한 남자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 * *
“후우.”
무전을 끊은 율리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지 않군.”
무전을 들은 톰의 표정이 어두웠다.
“얼른 올라가야겠습니다. 요구조자들이 오래 버티지 못할 듯하니.”
박상태와 손민준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건물이 붕괴해 그 밑에 깔리지 않는 한, 그들이 위험할 일은 별로 없었으니까.
하지만 요구조자들은 다르다.
마스크를 빼면 별다른 보호 장비도 없었으니, 화재현장에서 긴 시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다 예상외의 상황에 두려움도 커졌을 테니, 최대한 빨리 구조를 해야만 했다.
“그러려면 여기를 뚫어야 하네.”
톰이 앞을 가리켰다.
그들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위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붕괴된 건물의 잔해들이 여기에 쌓여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길은 없습니까?”
율리안이 혹시나 하며 물었지만, 톰은 고개를 저었다.
“확인해 봤네만, 여기를 지난 후에야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시가 급한데 계속 발목이 잡히고 있었다.
“쉽지 않겠군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이 잔해들에 충격을 주지 않고 치워내는 것밖에 없었다.
헬기라도 동원을 할 수 있었다면 위에서 레펠을 타고 진입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것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현재 헬기들은 산불 진압과 구조자들 후송에 모두 사용되고 있었다.
FILO 소유의 헬기도 마찬가지.
결국은 자신들이 직접 길을 만드는 방법 외에는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일단 움직이죠.”
율리안이 말하자, 슈미츠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곡괭이나 도끼를 사용하는 건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오직 손으로.
“큰길은 필요 없다. 사람 한 명 지나갈 정도면 돼.”
그렇게 세 사람은 방화복과 장비들을 착용한 채 길을 뚫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기에 속도는 너무도 더뎠다.
방화복 안은 땀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고, 덕분에 점점 갈증이 몰려왔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팀장님. 이곳을 파면 될 것 같습니다.”
그때, 슈미츠가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꽤나 커다란 잔해가 놓여 있었다.
세 사람이 들기에는 조금 무거워 보였지만, 슈미츠의 말대로 저것만 파낸다면 일이 더 빨라질 것 같았다.
“좋아. 그럼 그것부터 치워야…….”
“그건 안 건드리는 게 좋을 겁니다.”
율리안의 뒤쪽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오며, 그의 말을 끊었다.
깜짝 놀란 세 사람이 뒤를 쳐다봤다.
그리고…….
믿지 못할 것을 본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 * *
“선배님.”
손민준이 박상태를 향해 다가오며 조심스럽게 불렀다.
“무슨 일이야?”
대답하는 박상태의 음성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요구조자들의 상태가…….”
박상태가 슬쩍 눈을 돌려 요구조자들을 살폈다.
그들은 박상태보다도 훨씬 지쳐 보였다.
애초에 소방관들에 비해 체력이 훨씬 약한 일반인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 뜨거운 열기 속에서 몇 시간이나 있었으니, 지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물은?”
“없습니다.”
그래도 주변에 탕비실 같은 것이 하나 있어 약간의 물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이 났고, 이제는 물 한 모금 마실 수도 없는 상황이 왔다.
“율리안이 도착하려면 최소한 한 시간 이상은 더 걸릴 텐데…….”
과연 요구조자들이 버틸 수 있을까?
자신들도 힘겨운 상황인데…….
최악의 상황이 오기 전에 다른 방법을 강구해 봐야 할지도 모른다.
“구조 본부에 연락해 봐.”
“뭐라고 할까요?”
“……매트라도 까는 수밖에.”
“진심이십니까?”
화재현장에서 설치되는 에어매트는 구조용이 아니다.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뛰어내리는 요구조자들이 있었기에,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장비였다.
그런데 박상태의 말은, 그곳으로 요구조자들을 던지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어떻게 하냐. 여기 있다간 그냥 그냥 죽을 판인데. 그렇게라도 해야지.”
“나중에 분명 말이 나올 겁니다.”
그리스 소방당국은 물론, FILO 내부에서도 징계가 내려질 수도 있다.
그만큼 위험한 행동이었으니까.
하지만 박상태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하고 죽는 것보단 낫겠지.”
말을 하면서도 박상태는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었다.
‘내가 언제부터 이랬지?’
예전이었다면 일말의 고려조차 하지 않을 방법이었다.
매뉴얼에 반하는 구조방법이었으니까.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런 과격한 방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선택했다.
“그놈하고 일을 한 다음부터인가?”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고 보면 수혁이 처음 신일서에 배치를 받은 이후로, 너무도 많은 일이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구조 방법을 쓰기도 했고, 상식적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일도 벌어졌었다.
그때마다 박상태는 심장이 떨어져 내리는 듯한 충격을 받긴 했지만, 어느샌가 그것에 익숙해진 듯했다.
“내가 책임질 테니까 설치나 하라고 해.”
박상태의 말에 손민준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손민준이 부서진 자신의 무전기 대신 박상태의 무전기를 들었다.
그러고는 구조 본부에 에어매트 설치를 요청했다.
당연히 커다란 반발이 있었다.
지원팀에서는 절대 불가를 외쳤지만, 결국에는 손민준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다 죽는다는데,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잠시 후, 창문을 내려다보니 에어매트가 설치되는 모습이 보였다.
“설치가 끝나면 율리안에게 상황 물어보고 결정하자.”
혹시 아는가?
율리안이 신박한 방법을 찾아내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길을 뚫었을지.
‘가능성은 없겠지만.’
안 그래도 조금 전부터 천장에서 돌 부스러기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붕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더 늦기 전에 율리안 쪽도 철수시키고 여기서 빠져나가야만 했다.
박상태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에어매트의 설치가 끝났다.
고작해야 7층 높이.
까마득한 높이도 아니었건만, 에어매트는 한없이 작게 보였다.
만약 실수라도 한다면?
구조자들이 에어매트가 아닌 바깥쪽으로 떨어진다면…….
자신이 죽는 것은 상관없었다.
물론 그러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요구조자들이 죽는 것보단 나았다.
어쨌든 구조를 하다 목숨을 잃으면 순직이라는 명함과 함께 명예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요구조자들은 아니다.
반드시 살려야만 했다.
절대 쉽지 않은 방법이었기에 박상태는 부담감이 몰려왔다.
“……율리안에게 연락해.”
이제 결정할 때다.
아직도 율리안이 길을 뚫지 못했다면, 이 방법을 사용해야만 했다.
그때였다.
“우리 상태 형, 담이 꽤 많이 커졌네요.”
박상태의 고개가 홱- 하는 소리와 함께 돌아갔다.
“너, 너!”
너무도 익숙한 음성.
그리고 눈에 들어온 얼굴.
“야, 이 새끼야!”
바로 수혁이 그곳에 서 있었다.
“저 따라 하시려고요?”
수혁이 빙긋- 웃는 모습이 마스크 안으로 보였다.
“그런 위험한 방법 말고, 그냥 저 따라와요. 길 뚫어놨으니까. 아, 인사는 나중에 하고.”
수혁이 돌아왔다.
무려 반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말이다.
수혁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박상태와 손민준, 그리고 요구조자들을 데리고 앞장서 걸어갔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박상태는 귀신이라도 본 표정으로 물었다.
“뭘 어떻게 돼요. 그냥 다 나아서 복귀한 거지.”
“너 분명 얼마 전까지…….”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때는 안 움직였는데, 이제는 움직이네요.”
며칠 전부터 신경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것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재활조차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빠른 회복 속도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곧장 복귀를 선택했다.
의사들은 말렸지만, 그리스에서 큰일이 벌어졌는데 쉬고만 있을 순 없다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박상태와 손민준을 구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율리안 쪽은 다들 내려보냈어요. 아무래도 건물 상태가 심상찮아서.”
그렇게 말을 하는 수혁의 앞에는 커다란 길이 뚫려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꽉 막혀 있던 곳이…….
그 모습을 본 박상태가 헛웃음을 지었다.
역시 이놈은 괴물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이놈밖에 없었다.
박상태는 그제야 수혁이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하며 입을 열었다.
“돌아온 걸 환영한다, 이 괴물 새끼야.”
그날 이후.
그리스에서는 더 이상의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