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420화
수혁은 최은송을 통해 지난 시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두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신일서에서?’
수혁의 눈이 부릅떠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름들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유럽과 미국의 지원은 어쩌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짐 머레이가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신일서라니?
여기서 그 사람들 이름이 왜 나온단 말인가?
“사표까지 썼었다고 하더라고요.”
수혁의 놀란 표정을 본 최은송이 풋- 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서장님이 사표를 반려하고 휴가를 주는 식으로 보내줬대요.”
수혁의 눈이 살짝 젖어들었다.
신일서 대원들은 수혁에게 있어서도 깊은 인연이었다.
이전 생에서도 평생을 같이 일해온 동료였고, 이번 생에서도 수혁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 준 선배들이다.
그런 이들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사표까지 던지고 중국으로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본 게 선배들이었구나.’
마지막으로 ‘생명감지Ⅲ’를 썼을 때.
수혁이 본 네 명의 사람이 신일서 대원들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FILO에서 지원을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당장에라도 그들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가족을 제외한 면회는 힘들다고 하니, 조금 더 기다려야만 했다.
최은송은 그 후로 유럽과 미국의 2백 명이 넘는 지원 인력이 도착했고, 수혁을 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러다 여진이 발생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는 것도.
수혁이 눈을 감았다.
‘내 책임이다.’
여진은 수혁이 일으킨 게 아니다.
하지만 그를 구하기 위해 구조 작업을 하다 죽었으니,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수혁의 표정을 본 최은송이 고개를 저었다.
“수혁 씨 탓이 아니에요.”
그녀는 표정만 봐도 수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알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부정했다.
“그냥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최은송의 표정에 단호해졌다.
“수혁 씨는 제임스를 원망해요? 저 밑에 있을 때, 단 한 번이라도 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 있어요?”
맹세하건대, 결단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순간 제임스는 요구조자였고, 자신이 그를 구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
“마찬가지예요.”
최은송의 말에 수혁이 생각을 멈추었다.
“그분들에게 있어 수혁 씨는 한 명의 요구조자였어요.”
이전 생에서 죽음을 경험했을 때도.
수혁은 요구조자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것은 수혁뿐만이 아니라, 모든 소방관이 그럴 것이다.
원망할 대상을 찾고 싶다 해도, 그건 요구조자가 아닌 차라리 하늘을 욕한다.
그게 소방관들이었다.
수혁은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물론 죄책감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어쨌거나 자신들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일말의 책임감을 느낄지언정, 묵직하게 가슴을 짓누르던 짐이 조금은 옅어졌다.
‘고마워요.’
수혁은 최은송을 향해 눈을 한 번 끔뻑였다.
그것을 본 최은송의 얼굴에 그제야 미소가 지어졌다.
평생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더 많은 사람을 구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최은송은 자신의 남편이, 생명의 무게를 등에 짊어지고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퇴원하면 같이 그분들을 뵈러 가요. 여기에 합동 분향소가 있거든요.”
수혁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 멈칫- 했다.
‘여기에 분향소가 있다고?’
수혁은 이곳을 한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간호사도 한국인, 의사도 한국인.
거기에 최은송과 최문식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중국에서 순직한 소방관들의 분향소를 한국에 만들었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수혁의 기색을 눈치챘을까?
최은송이 웃으며 대답을 해주었다.
“여긴 아직 중국이에요.”
* * *
“무사히 깨어난 걸 보니 다행이군요.”
수혁의 병실에서 나온 최문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병실에서는 애써 담담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그 역시 걱정을 하긴 마찬가지였다.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어찌 됐든 사랑하는 딸의 남편이었으니까.
“말이라도 한마디 하지 그랬나?”
짐 머레이가 피식- 하며 핀잔을 주었다.
“그렇게까진…….”
괜히 머쓱해진 최문식이 딴청을 피웠다.
“그나저나 대단하군요.”
최문식은 대화 주제를 바꾸려는 듯, 복도를 둘러보았다.
“설마 병원을 통째로 사버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이 병원은 지진이 일어난 현장 근처에서 가장 시설이 좋은 곳이었다.
그리고 짐 머레이는 그 병원을 그냥 매수해 버렸다.
그러고는 한국과 미국, 유럽의 의사와 의료진을 초빙했다.
짐 머레이가 아는 한,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이들을 말이다.
수혁의 치료에 모든 힘을 쏟겠다는 뜻이었다.
물론 수혁 한 명만 치료하는 건 아니었다.
구조된 사람들과 부상을 입은 소방관들 역시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세계 최고의 의료진들을 초빙한 덕분에, 그들은 세계 최고의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중국 측에서도 처음에는 마음에 안 들어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이 정도는 해줘야지.”
수혁이 죄책감을 느끼듯, 짐 머레이 역시 자신의 책임을 통감했다.
아니, 오히려 수혁보다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일의 발단이 된 것이 바로 구조 2팀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뽑은 이들.
수혁에게 경쟁심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보고를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의 결과가 이런 식으로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덕분에 짐 머레이는 수혁과 희생된 소방관들에게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는 중이었고.
엄청난 돈이 쓰이긴 했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깟 돈이 아무리 중요하다고는 해도, 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하지는 않았으니까.
짐 머레이의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최문식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로를 해주진 않았다.
자신이 말을 한다고 해서 마음이 가벼워질 것도 아니었고,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니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는군요.”
지진이 일어난 지 30일 정도 흘렀다.
많은 부분이 안정되긴 했지만, 구조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물론 이제 살아 있는 요구조자를 찾는 일은 초반보다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생존자가 발견되고 있어 구조를 끝낼 수가 없었다.
“그렇군. 시간이 너무 빨라.”
짐 머레이는 그동안 너무도 바쁘게 지냈다.
수혁도 수혁이었지만, 제임스를 제외하고 전원 사망한 구조 2팀과 그로 인해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긴 했지만, 앞으로도 할 일은 산처럼 쌓여 있었다.
“현장에서 대원들이 아쉬워하더군요. 이제 그 밥을 먹지 못한다고.”
최은송의 요리는 현장 대원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직접 해주는 따끈따끈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큰 호의로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최은송이 수혁의 옆에 붙어 있으니,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게. 내 따로 준비를 해두었으니.”
최은송의 행동을 보고, 짐 머레이는 소방관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셰프들을 고용했다.
아직 요리를 할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지 않아 개시하진 못했지만, 이제 곧 시행될 터.
지금보다 많은 소방관이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최문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짐 머레이는 현장 대원들을 위해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단순히 돈만 내고 생색 내는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이유 중에는 자신의 사위인 수혁이 있다는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아, 그리고 수혁의 면회도 슬슬 허락해 주어야겠어.”
수혁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기에 면회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의식도 돌아왔으니 슬슬 면회를 시작해도 될 것 같았다.
의사의 허락이 먼저 있어야겠지만, 크게 반대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려면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부터 전해줘야겠죠.”
“시간 끌 것 없이 지금 말해주러 가면 되겠군.”
짐 머레이는 오랜만의 좋은 소식을 알리기 위해 최문식과 함께 병원 밖으로 향했다.
* * *
[중국에서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바로 얼마 전, 전국민의 관심을 받았던 김수혁 구조대원에 대한 소식입니다.]
[그러고 보니 구조가 되었다는 소식도 저희가 전해 드렸죠?]
[당시에는 의식도 없고, 상태가 심각했었는데요. 지금까지 총 네 차례의 수술을 끝내고, 오늘 아침 의식이 돌아왔다는 소식입니다.]
[아, 정말 다행이네요.]
[큰 고비는 모두 넘겼고, 이제는 회복에 집중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국민 여러분이 많은 걱정과 응원을 보냈는데, 앞으로 한숨 돌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국 지진에 관한 소식은 한 달이나 지났기에 조금 식은 상황이었다.
가끔 한 번씩 뉴스에 등장하는 정도.
그런데 수혁이 깨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한 번 관심이 폭발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혁의 회복을 기원하고, 정신을 차린 것을 축하했다.
심지어 수혁을 응원하기 위해 직접 중국으로 오는 사람도 나올 정도였다.
“여기 맞지?”
“맞다니까. 내가 몇 번이나 확인해 봤어.”
커다란 트럭과 함께 병원 앞에 도착한 여자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일단 가져온 건 한쪽에 두고, 오빠부터 만나러 가야겠어.”
“지금 면회가 될까? 아직 그 정도로 좋아진 건 아니라던데.”
“여기까지 와서 얼굴도 못 보고 돌아갈 순 없잖아. 오빠가 한번 알아봐 줘요.”
“……그래.”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중국으로 가야겠다며 들들 볶는 바람에 오긴 했지만, 과연 이래도 되나 싶었다.
수혁 측과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방문을 한 것이었으니, 문전박대를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남자는 여자와 함께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환자와 가족들, 거기에 의료진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이곳에서 도무지 수혁의 면회가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여자의 말대로 그냥 돌아갈 수도 없는 일.
남자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간호사 한 명을 간신히 붙잡았다.
“안녕하세요.”
남자가 중국어로 인사를 하자, 간호사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저 중국어 잘 모르는데.”
“어, 한국분이세요?”
설마 중국 병원에 있는 간호사가 한국인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기에 깜짝 놀랐다.
“네, 한국 사람이에요. 혹시 김수혁 환자분 만나러 오셨나요?”
그런 사람이 꽤 있었나 보다.
곧바로 목적을 알아차린 것을 보면.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한국에서 막 도착했습니다. 수혁 씨 면회를 하고 싶은데 그게 가능한지…….”
남자가 쭈뼛거리며 묻자, 간호사가 웃으며 그의 뒤쪽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떴다.
“어? 설마 버블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