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394화
최은송이 출근하자 수혁 혼자 집에 남게 되었다.
하지만 어제와는 달리 무엇을 할지 고민이 되진 않았다.
“조금 더 쉬다 상태 형한테나 다녀와야겠다.”
어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고 난 뒤, 수혁은 머릿속이 조금 비워지는 느낌이었다.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독일에서의 일 이후로 계속해서 쌓여가던 정신적인 피로가 조금 나아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친구들과의 회포도 풀고, 스트레스도 많이 풀었다.
덕분에 수혁은 꽤나 가뿐한 기분이었다.
물론 숙취는 제외하고.
소파에 누워 TV를 켰다.
때마침 TV에서는 어제 발생한 화재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응?”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수혁이나 FILO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없었던 것이다.
그저 운서역 근처에서 커다란 화재가 발생했고, 네 시간 만에 진화가 되었으며, 22명이 구조되었다는 소식이 끝이었다.
‘이거 좀 이상한데?’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섭섭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수혁은 그런 관심이 부담스러웠으니까.
원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단 한 마디의 언급도 없자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일부러 내용에서 뺀 것 같은데.’
수혁은 왠지 이번 일이 오늘 아침 걸려왔다던 소방청의 전화와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것 참.”
수혁이 혀를 찼다.
FILO에서는 박상태가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섰다.
수혁의 이름이 나오지 않은 것은 반길 만한 일이었지만, 박상태의 이야기도 하지 않는 것은 좀 불만스러웠다.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닌가?”
만약 이게 문제가 된다면 FILO에서 알아서 조치를 취할 터.
마음에 들지 않긴 해도 수혁은 딱히 행동에 나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잠시 누워서 TV를 보던 수혁은 몸이 조금 괜찮아지는 것 같자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잠시 후, 수혁은 차에 올라타 박상태가 입원한 병원으로 출발했다.
“오늘이 주말이었나?”
평소보다 길거리에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날짜를 확인하자, 역시나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은송 씨 레스토랑이 주말에 장사가 좀 된다고 했으니까…….”
박상태에게 들렀다가 최은송의 가게로 가서 좀 도와주면 될 것 같았다.
대충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생각해 둔 수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 왔어요.”
1인실에 혼자 누워 TV를 보고 있던 박상태가 반색했다.
하지만 반가웠던 표정은 이내 사라지고, 툴툴거리는 음성이 튀어나왔다.
“뭐 하러 왔냐?”
혼자서 심심했을 텐데, 괜히 미안한 마음에 더 무뚝뚝한 태도를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을 눈치챈 수혁이 피식-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심심해서 왔어요, 심심해서. 집에서 도대체가 할 일이 있어야지.”
괜히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문병 오는 놈이 빈손으로 오는 것 봐라.”
그 덕분인지 박상태는 슬그머니 표정을 풀며 수혁에게 핀잔을 주었다.
“어제 다른 사람들이 사 온 거 아직 남았잖아요. 돈 아깝게 뭘 더 사 와요.”
“인마, 내가 너 병원에 있을 때 사간 음료수만 모아도 이 병실은 꽉 채웠을 거다.”
“다음에 올 땐 사 올게요. 그러면 됐죠?”
수혁이 웃으며 말하자, 박상태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이면 퇴원인데 어느 세월에?”
“어? 퇴원해도 된대요?”
“별문제도 없는데 이 비싼 1인실에 계속 있을 필요가 있냐?”
“어차피 병원비는 행정팀이 다 처리해 주기로 했잖아요.”
“그래도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몸도 괜찮으니까 이제 퇴원해도 돼.”
이 기회에 병원에서 좀 케어를 받았으면 좋겠는데, 박상태는 그게 부담스럽다며 퇴원을 결정해 버렸다.
수혁이 보기에도 딱히 큰 문제는 없어 보였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고.
“어제는 잘 놀았냐?”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서 술이나 퍼부었죠, 뭐.”
“그래, 이젠 그렇게 좀 살아라. 맨날 일만 하지 말고. 그러다 나처럼 쓰러진다.”
수혁의 체력에 과로 따위로 쓰러질 일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박상태는 그래도 걱정을 했다.
“안 그래도 이제는 좀 쉬엄쉬엄하려고요. 출동 나가면 그때나 빡세게 하면 되지.”
“이제야 정신 좀 차렸네.”
수혁이 신입이었을 때부터 했던 걱정이었다.
요구조자만 보면 앞뒤 생각하지 않고 눈이 돌아가는 것이나, 삶의 초점이 대부분 구조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것.
구조 실력이나 성과야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지만, 덕분에 여유가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된 것 같아 박상태는 안심했다.
“그런데 오늘 TV 봤냐?”
박상태가 TV를 가리키며 물었다.
“어떤 거요?”
수혁은 내심 예상이 됐지만, 모르는 척 물었다.
“어제 화재현장에 대한 뉴스가 나왔는데, FILO에 대한 얘기가 없더라.”
“아, 그거요? 아까 얼핏 보긴 했어요.”
수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박상태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 건 문제가 좀 있는 거 아니냐?”
박상태 역시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섭섭해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을 하는 것 같았다.
“행정팀이나 지원팀에서 알아서 하지 않겠어요?”
홍보나 영업을 담당하는 팀은 없었지만, 이런 일은 행정 쪽에서 맡아주곤 있었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면, 그쪽에서 알아보고 조치를 취하고 연락을 줄 것이다.
“괜히 느낌이 안 좋은데…….”
박상태의 모습에 수혁은 속으로 웃었다.
‘이 형도 은근히 촉이 좋단 말이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단순히 자신들의 이야기가 보도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를 냈을 것이다.
그 개고생을 해놓고도 단 한 마디도 언급이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박상태는 그런 것보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먼저 받은 것이다.
“그런 건 다른 사람들한테 맡기라니까요. 괜히 신경쓰다 또 몸만 안 좋아지겠네.”
수혁이 박상태에게서 리모컨을 빼앗아 TV를 껐다.
“하여간 잔소리는. 네가 많이 크긴 했나 보다.”
박상태가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게요?”
“나가자. 산책 좀 하게. 계속 누워만 있었더니 좀이 쑤셔서 죽겠다.”
“그래도 돼요?”
내일 퇴원을 할 정도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혹시 몰라 물어봤다.
“의사 선생님도 가벼운 산책 정도는 하라고 하더라.”
그렇다면 오히려 수혁이 권해야 할 일이었다.
박상태를 부축한 수혁은 함께 병실 밖으로 나왔다.
병원 복도를 천천히 걷던 박상태가 문득- 물었다.
“FILO에 온 건 후회 안 하냐?”
수혁은 계속 소방관을 해도 충분히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전 세계의 관심도 받고 있었고, 인성에도 문제가 없는 데다, 구조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니까.
뭐, 정치질에는 젬병이긴 했지만, 국민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으니 언젠간 평범한 공무원 이상의 자리도 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수혁은 그런 것을 모두 포기한 채 FILO를 선택했다.
“형은 후회돼요?”
“내가 미쳤냐? 이렇게 복지가 좋은데 왜 후회를 해.”
집이나 다른 복지는 둘째치고, 이번에 겪은 의료 지원만 해도 그렇다.
박상태가 그냥 신일서에 남아 있었다면 이런 지원은 꿈도 꾸기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공상이 인정되면 지원이 이뤄지겠지만, 과로는 그것을 입증하기도 힘들었다.
인정되기까지의 시간도 오래 걸리고.
그런데 FILO에서는 병원비 전액 지불은 물론, 그 외의 추가 검진비도 지원을 해주었다.
그런 복지를 해주는 곳에 온 걸 후회하냐고?
그 반대였다.
수혁이 자신에게 이 자리를 권해준 게 너무도 고마웠다.
“그런데 저는 왜 후회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나랑 너랑 같냐?”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긴 했지만, 수혁은 자신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를 건 또 뭐가 있어요.”
수혁의 반문에 박상태는 입을 다물었다.
‘이 새끼는 욕심이 없나?’
출세라던가, 권력욕 같은 것에는 관심조차 없는 눈빛이었다.
그저 사람을 구하는 것.
오직 그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됐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후회 안 하면 그걸로 좋은 거고.”
박상태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짐한테 연락해서 월급이나 올려달라고 해.”
“지금도 많은데 뭘 더 올려달라고 해요. 강도도 아니고.”
“넌 더 받아도 돼, 이 새끼야.”
박상태는 툴툴거리며 걸음을 빨리했다.
수혁과 더 대화하다간 화병이 날 것 같았다.
‘멍청한 건지, 둔한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수혁이 좋은 놈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나 퇴원하면 팀원들 모아서 회식이나 하자.”
“그거 좋죠. 가족들까지 다 불러서 우리 집에서 먹으면 되겠네요.”
“제수씨 힘들어, 인마.”
“미안하면 빨리 와서 좀 도와주시던가요.”
둘은 일상의 대화로 돌아가 시답잖은 대화를 이어갔다.
“신일서 선배들도 한번 봐요. 우리야 이제 시간이 좀 남으니까.”
“그래야지. 안 그래도 애들이 너 보고 싶다고 난리더라.”
그러고 보니 못 본 지 오래됐다.
“이사도 한 김에 집들이겸 해서 부르면 되겠네요.”
“그래라.”
박상태는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보다 휴식 기간 동안 할 일이 많았다.
지금까진 그저 수혁이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에 불과했다.
‘시간 내서 특구에도 한번 들러야겠네.’
수혁이 나간 뒤 꽤나 바쁠 것이다.
먹을 거라도 좀 챙겨 가서 인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수혁은 박상태와 함께 산책을 이어갔다.
* * *
“잘 처리했겠지?”
“조금 힘들긴 했는데, 그럭저럭 입을 막기는 했습니다.”
“잘했다.”
강현성은 비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터넷 뉴스를 확인했다.
“……여기에는 그놈들 이름이 나와 있는데?”
그러다 무엇을 발견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비서를 노려봤다.
“그게, 저희 입김이 통하지 않는 곳도 있는지라.”
비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
강현성이 그에게 내린 명령은, 어제 있었던 화재현장에 대한 뉴스에서 수혁과 FILO의 흔적을 지우라는 것이었다.
보통 소방 관련 취재를 나오는 기자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인연도 깊었기에 기사를 막는 것 자체가 그리 힘들진 않았지만, 모든 언론사에게 먹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완벽하진 않았다.
“쯧.”
강현성이 혀를 찼다.
“나가봐.”
비서가 고개를 숙인 채 사무실 밖으로 나가자, 강현성은 다시 기사들을 확인했다.
‘다행히 몇 곳 되지는 않는군.’
언론사들의 이름을 보니, 소방 쪽과는 별 인연이 없는 곳들이었다.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을 보고는 기사를 쓴 것 같았다.
그리 큰 언론사가 아니었기에 기사의 노출이 적은 게 다행이긴 했지만, 이대로 있다간 언제 퍼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수혁은 언론에서 좋아하는 소재였으니 말이다.
‘이놈들은 따로 입을 막아야겠군.’
강현성은 수혁의 영향력이 더 커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수혁이 소속되어 있는 FILO 역시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강현성은 잠시 생각을 하다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강현성입니다.”
통화하는 강현성의 음성은 정중하기 짝이 없었다.
“예, 예.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십니까? 제가 좋은 곳으로 좀 모시고 싶은데……. 물론입니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짧은 통화를 마친 강현성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떠올라 있었다.
“이분의 도움이라면 그놈 하나 매장시키는 건 일도 아니겠지.”
강현성의 입술이 비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