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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큐 시스템-391화 (391/425)

레스큐 시스템 391화

지금까지 구조대가 진입하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화재가 너무 심합니다.”

그건 여기서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조금 떨어져 있는 이곳까지 후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아무래도 불길이 조금 잡힌 뒤에나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럴 시간 없다.”

이만한 열기면 저 안쪽은 그야말로 찜통이나 다름없는 상황일 것이다.

화재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버티고 있을 뿐, 늦는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수혁은 재빨리 스마트폰을 꺼내 FILO와 연락을 시도했다.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팀원 분들은 거의 도착할 때쯤 되었고, 장비들도 지금 가는 중입니다.]

“장비 도착까지는 얼마나?”

[10분, 아니, 5분 이내에 도착합니다.]

“최대한 서둘러 달라고 좀 해주세요.”

다행히 팀원들과 장비는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 FILO에 출동 명령을 내리신 겁니까?”

“그래.”

FILO가 아무리 대한민국 소방청 소속의 기관이 아니라고는 해도, 이런 현장을 못 본 척할 수는 없었다.

알아서 잘들 하고 있다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수혁은 일단 이쪽 구조대장과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기로 했다.

그러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팀원들이랑 장비 도착하면 바로 진입할 준비부터 해.”

“알겠습니다.”

손민준은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상찮아 보이는 현장의 모습에 일단 수혁을 호출하긴 했지만, 일이 조금 커지는 것 같았다.

왠지 잡음이 생길 것만 같은 느낌에 손민준은 안절부절못했다.

수혁도 그것을 느꼈지만, 못 본 척 넘어갔다.

지금은 손민준의 불안을 해소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으니까.

주위를 둘러보며 구조본부가 어디에 있는지 찾은 수혁은, 이내 걸음을 옮겼다.

방화복을 입은 이들이 모여서 뭔가 상의하고 있는 쪽이었다.

화재진압대는 열심히 방수하고 있었으니, 저들은 아마 구조대일 확률이 높았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들에게 다가간 수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러니까 언제쯤 가능… 응?”

심각하게 말을 하던 사람이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혹시 영종 소방서에서 나오셨습니까?”

“운서 119센터입니다만?”

119센터라면 구조대가 맞는 듯했다.

“그런데 이곳에 계시면 안 됩니다. 위험하니까 뒤쪽으로 물러나 주십, 어?”

수혁을 민간인이라고 생각해 경고하던 그가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매우 낯이 익은 얼굴이었던 것이다.

“기, 김수혁?”

“안녕하십니까. FILO의 김수혁입니다.”

수혁은 자신의 유명세에 처음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만약 자신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더라면, 말을 꺼내는데 조금 힘들었을 것이다.

“여기는 어, 어떻게?”

“화재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하게 왔습니다. 구조대가 진입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요.”

이 구조대의 팀장인 듯처럼 보이는 이가 얼굴을 붉혔다.

화재 때문에 구조를 시작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수혁은 신경쓰지 않았다.

진입이 어려울 정도로 화재가 심각하니 저들의 결정은 당연했다.

수혁 역시 이와 같은 경험을 몇 번 해봤고, 저들의 결정이 옳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부끄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지금 FILO 구조 1팀이 이곳으로 오는 중입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가 한 손 거들어도 되겠습니까?”

“그게…….”

관할 구역이라는 것이 있다.

누구라도 자신들의 책임하에 있는 관할 구역에서 제멋대로 활동을 하는 것은 싫어할 것이다.

자신들의 무능함을 알리는 꼴이기 때문이었다.

예전 신일서와 특수 구조대 사이에서도 그로 인한 자잘한 자존심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던가?

심지어 FILO는 국가 기관이 아닌 비영리 기관인 NGO였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팀장의 얼굴에 가득했던 부끄러운 기색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 드러났다.

“지금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말씀하시는 거겠죠?”

“물론입니다.”

지금쯤이면 FILO에서도 센터에 협조공문을 보냈을 것이다.

일을 쉽게 처리하려면 그에 대한 대답이 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특징을 생각해 보면,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보단 이렇게 직접 설득을 하는 게 훨씬 빠를 수도 있었다.

“음.”

팀장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관할 구역에서 다른 기관이 설치는 꼴을 보는 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애초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지금도 진입할 방법을 찾지 못해 발만 구르며 회의만 이어가지 않았던가?

그런데 수혁이라면?

푸켓, 미국, 독일, 그리고 인도네시아.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저 많은 국가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하며 수많은 요구조자들을 구해낸 수혁이라면?

‘방법이 있지 않을까?’

영웅이라는 별명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수혁의 능력이 진짜라는 건 잘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에 있는 요구조자들을 생각하면, 지금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라는 것쯤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부탁드립니다.”

팀장이 수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자존심?

그게 요구조자들의 목숨을 살려줄 순 없었다.

반대로 수혁은 저 안에 갇혀 있는 요구조자들을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실력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밑에 있는 FILO의 구조팀 역시 마찬가지.

TV로 본 인도네시아의 활약상을 생각해 보면, 구조를 저들에게 맡기는 것이 훨씬 나은 판단이었다.

“감사합니다.”

수혁은 곧바로 몸을 돌렸다.

예의가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것에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혁의 모습이 너무나도 다급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인마! 갑자기 무슨 출동이야!”

손민준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자, 박상태가 소리를 치는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오셨어요?”

“그래, 난데없이 출동하라고 해서 하긴 했는데, 이게 뭔 일이냐고.”

인도네시아에서 돌아온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다.

한 달 만의 휴식에 늘어져라 잠을 자고 있다가 벼락을 맞은 듯한 기분일 것이다.

“그렇게 됐어요.”

수혁이 쓰게 웃으며 화재가 일어난 건물을 가리켰다.

“여기도 구조대 애들 있잖아.”

“불길이 심해서 진입을 못하고 있더라고요.”

수혁의 말에 박상태가 멈칫- 했다.

휴식을 방해한 대가로 조금 더 투덜거리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아, 젠장. 그래서? 요구조자는 몇 명인데?”

“22명이요. 상황이 좋지 않아서 최대한 빨리 들어가야 해요.”

“그게 말처럼 쉽냐? 방화복이라도 하나 있어야 들어가지. 맨 몸으로 갈 수는 없잖…….”

“김 팀장님!”

박상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고 있는데, 때마침 지원팀이 도착했다.

방화복을 비롯한 개인 구조장비를 가득 챙겨온 채로.

“됐죠?”

수혁이 그것들을 가리키자, 박상태는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 가자, 가! 사람들 구하러 가자고.”

박상태가 한숨을 내쉬며 지원팀이 가져온 장비들을 향해 걸어갔다.

“다른 팀원 분들도 이제 곧 도착하실 겁니다. 아, 톰 씨는 빼고요.”

“무슨 일 있답니까?”

“가족들과 여행을 떠나셨다고 하더군요. 지금 출발해도 두 시간 이상은 걸리신다고 해서…….”

“그럼 그냥 여행 즐기시라고 해요. 여기는 저희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알겠습니다.”

지원팀의 말대로 나머지 두 명의 팀원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두 사람은 현장을 발견하고는 별말 없이 곧장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이거 나만 쓰레기 같네.”

두 사람의 모습에 박상태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괜히 혼자 휴식을 방해받았다며 열을 낸 것이다.

“그냥 한 소리인 거 알아요.”

박상태가 정말로 귀찮아서 투덜거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수혁이 본 사람들 중 가장 사명감이 투철한 소방관 중 한 명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순직을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지금까지 투덜거렸던 건 손민준을 위한 것이었다.

조금 긴장을 한 손민준의 분위기를 풀어주려는 의도.

박상태의 생각은 잘 맞아떨어져서, 괜한 짓을 한 게 아닐까? 하고 후회하던 손민준의 얼굴이 조금 풀어져 있었다.

‘말 내용만 보면 더 압박하는 것 같은데, 신기하단 말이야.’

박상태 특유의 무뚝뚝함과 익살이 어우러진 덕분인 것 같았다.

‘뭐, 그런 이유야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돌입 준비를 해야 했다.

“상황은?”

어느새 방화복을 모두 착용한 율리안이 물었다.

“3층에서 시작된 화재가 5층까지 번진 상태입니다. 요구조자는 22명. 전원 꼭대기 층인 8층에 모여 있고, 불길이 심해 구조대가 진입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하네요.”

“음…….”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다행히 스프링클러 덕분에 연기가 침범하지는 못하고 있는 듯했지만, 그것도 천년만년 이어질 순 없었다.

언젠간 물이 떨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끝이었다.

연기와 열기.

끔찍한 이 두 가지가 요구조자들을 덮칠 것이다.

“서둘러야겠군.”

그사이 수혁을 비롯한 팀원들이 전부 준비를 끝마쳤다.

“제가 길 뚫겠습니다.”

불길이 아무리 심하다 하지만, 방화복을 입은 수혁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못한다.

평범한 소방관이라면 접근하기도 힘들었겠지만, 수혁은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갑시다.”

FILO 구조 1팀이 건물 진입을 시작했다.

많은 사람의 시선이 그들의 등에 집중됐다.

소방관들은 물론이고, 구경하는 사람들과 취재를 나온 기자들까지.

수백 명의 눈동자가 하나의 생각을 품은 채 그들의 신형을 따라 이동했다.

‘제발 사람들을 무사히 구조하길.

* * *

“이건 문제가 될 겁니다.”

강현성의 음성은 딱딱했다.

“문제가 될 일이 있습니까?”

“아니, 당연한 것 아닙니까? FILO인지 FILA인지 하는 단체는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소속되어 있는 기관이 아닙니다!”

행안부 장관의 안일한 태도에 화가 난 강현성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흠…….”

“이건 명백히 월권이고, 저들은 규정과 절차를 어겼습니다. 그냥 넘어가선 절대 안 되는 일이란 말입니다.”

강현성은 작정한 듯, 행안부 장관에게 자신의 뜻을 밀어붙였다.

“그들에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겁니까?”

행안부 장관의 말에 강현성이 흠칫- 했다.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었다.

“억하심정은 무슨, 흠흠.”

그동안 강현성은 수혁을 이용해 먹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해두었다.

소방청의 홍보모델로 내세운 것은 그것의 시작이었다.

수혁이 미국 명예시민이 된 이후엔, 정말이지 1년 내내 굴려 먹을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 계획이 모두 헛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것만으로도 괘씸한데, 지금까지 수혁이 그에게 했던 언행들을 생각해 보면 절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해를 끼치거나 권력으로 찍어 누르는 방법은 꿈도 꾸지 못했다.

이제 수혁은 그가 건들기엔 너무도 커 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방법도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처럼 FILO에 압박을 가해 행동을 방해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행안부 장관은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사람을 못 구한 것도 아니고. 요구조자도 모두 구조했다면서요?”

“결과가 좋다고 해서 과정이 모두 옳은 건 아니죠.”

“구조에 들어가기 전에 센터에 협조공문도 발송했고. 절차상으로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만?”

‘제길.’

센터 측에서 공문을 받고, 협조에 응하기 전에 구조에 들어간 것을 문제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행안부 장관은 FILO와 척을 지고 싶은 생각 따윈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짐 머레이와 안면이 있다고 하더니.’

장관이 저렇게 나오면 한 발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괜히 더 밀어붙였다간 자신이 역으로 당할 수도 있었으니까.

“이 문제는 그냥 넘어가죠.”

행안부 장관의 마지막 말에, 강현성은 속으로 열불을 삼키며 뒤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가만있을 생각 따위는 없었다.

‘두고 보자, 김수혁.’

자신에게 대든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줄 생각이었다.

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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