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382화
“미쳤네.”
박상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FILO에 소속된 서포터 직원들의 준비성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철저했기 때문이었다.
“미리 출국 수속은 저희가 끝내두었습니다. 저 통로를 이용해 비행기로 이동해서 탑승하시면 됩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심사도 하지 않고 수속을 마친단 말인가?
물론 통로 입구에 대면 절차가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도 상식 밖의 상황이었다.
“짐이 맺은 협약 중 하나라네요.”
수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통로를 향해 걸어갔다.
“협약?”
“비상 지원을 위한 출동 시에는 절차를 최소화하고 최대한 빠르게 출발 가능하도록 했답니다.”
“……그게 가능해?”
“지금 보니까 가능한 것 같지 않아요?”
수혁도 짐 머레이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아, 물론 개인적으로 출국할 때에는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야 하니까, 그땐 실수하지 마시고요.”
“그런 실수를 하겠냐?”
수혁과 팀원은 직원이 안내해 준 통로를 통해 램프에 도착했다.
“허…….”
조용히 정신을 가다듬고 있던 톰이 비행기를 보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저거 설마 전용기야?”
여객기를 타고 이동하진 않을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수송해야 할 장비들의 수와 크기를 생각해 보면 절대 일반 여객기에는 탑승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전세기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무려 전용기다.
커다란 점보 비행기의 동체에는 붉은색의 FILO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앞으로 저희가 사용할 전용기입니다.”
수혁이 팀원에게 소개했다.
짐 머레이가 팀을 위해 중고 비행기를 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수혁은 심장이 떨려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장과 부기장이 나와 수혁과 팀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이들 역시 FILO 소속 서포터 직원이었다.
박상태는 황당하다 못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실없이 웃었다.
“대체 돈이 얼마나 많은 건지…….”
상상도 하기가 힘들었다.
“장비와 필요한 짐들은 모두 선적을 끝냈습니다. 이제 여러분만 탑승을 끝내면 곧장 출발할 수 있습니다.”
수혁과 팀원들은 아무것도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은 서포터 직원들이 해결해 두었고, 비행기에 몸만 실어 현장으로 가면 된다.
그야말로 인명 구조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시스템이었다.
수혁은 비행기에 올라타 안을 살폈다.
별다른 개조는 되어 있지 않았다.
일반 여객기와 다른 점이라고는 퍼스트 클래스와 비즈니스를 제외한 이코노미 좌석은 철거되어 있다는 것뿐.
그 자리를 온갖 장비와 짐들이 차지했다.
“뭐, 어차피 이걸 이용할 사람이라고 해봐야 우리밖에 없으니까. 괜히 좌석이 많을 필요는 없지.”
팀원과 서포터 직원들이 앉을 자리 몇 개만 있으면 충분했다.
“본래는 술라웨시 섬에 있는 마카사르 공항으로 가려고 했습니다만, 현지 공항 사정이 여의치 않아 자카르타의 수카르노하타 국제 공항으로 경로를 바꿨습니다. 소요 시간은 약 일곱 시간 정도이고, 이후 그곳에서 차량을 타고 이동하시게 될 겁니다.”
지진이 발생한 술라웨시 섬은 현재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공항은 물론이고, 사회 시스템 전체가 마비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금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럼 도착할 때까지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기장과 부기장이 콕핏으로 향했다.
“……퍼스트 클래스네.”
“전용기니까요.”
박상태가 좌석에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조용한 기내에는 무거운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웬만한 건 앞쪽에 다 구비되어 있다고 합니다. 간단한 음식이나 음료수 같은 것들이요.”
술을 제외하면, 기내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륙하면 한번 찾아봐야겠네.”
잠시의 소란이 지나간 후, 비행기가 이륙했다.
‘대단하네.’
짐 머레이의 능력은 익히 알고 있었고, 전용기에 대한 이야기도 미리 들은 상태였다.
그때도 놀라긴 했지만, 실제로 경험해 보니 그 놀라움은 몇 배나 컸다.
하지만 수혁이 정말로 감탄한 것은 단순히 전용기처럼 돈이 들어간 부분이 아니었다.
그것들보다는 이렇게 쉽게 빠르게 현장으로 출동할 수 있는 시스템.
이것을 위해 짐 머레이가 그동안 해왔을 고생과 노력이 놀라웠다.
‘대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한 걸까?’
FILO에 대해선 수혁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
수혁이 아는 것이라고 해봐야, 그저 무슨 장비가 있으며, 어떤 대원들이 있고, 어떤 식으로 운용되는지에 대한 간략한 정보뿐이다.
그것 외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짐 머레이와 FILO의 직원들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면,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그거에 보답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응? 뭐라고 했냐?”
비행기 구경을 대충 끝낸 박상태가 좀 쉬려는지 좌석에 앉다, 수혁의 중얼거림을 듣고는 물었다.
“사람들 구하자고요.”
수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수카르노하타 국제 공항.
인도네시아의 수도인 자카르타 인근에 있는 공항이다.
평소에도 수많은 관광객이 붐비는 곳이긴 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넘어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공항에 도착한 FILO 1팀은 눈앞의 광경에 입을 다물었다.
“이쪽입니다.”
그들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서포터 직원이 다가와 팀원들을 안내했다.
“……많이 심각합니까?”
출발하기 전에 대략적인 브리핑을 듣기는 했다.
하지만 자카르타와 술라웨시 섬의 거리는 꽤 멀었다.
비행기로도 두 시간 30분을 더 가야 하는 거리였으니까.
그래서 이쪽은 그리 혼란스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사람들은 마치 이곳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것은 그만큼 현장의 상황이 좋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좋지 않습니다. 지진 이후 섬을 덮친 쓰나미 때문에 아직 제대로 된 구조 활동도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최초 지진이 발생하고 여덟 시간이 넘게 흘렀다.
지금쯤이면 구조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현장에 구조대가 급파해 사람들을 구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아직 진입도 못 하고 있단다.
“왜 그렇습니까?”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저 인력과 장비가 부족해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특유의 느린 사회 시스템도 한몫하고 있고요. 덕분에 민간인들이 자체적인 구조대를 결성해 사람들을 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옵니다.”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다.
‘하긴. 그러니 우리가 출동한 거지.’
인도네시아에서는 FILO에 지원 요청을 하지 않았다.
반대로 FILO가 인도네시아 측에 제안했다.
우리가 가서 돕게 해달라고 말이다.
도저히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인도네시아 정부는 FILO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현장까진 얼마나 걸립니까?”
“최소한 여덟 시간 이상은 잡아야 할 겁니다.”
“예?”
수혁을 비롯한 팀원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한국에서 인도네시아까지 오는 데 일곱 시간이 걸렸는데, 여기서 현장까지 가는 게 그보다 더 오래 걸린단 말인가?
“비행기는 불가능해서 차량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미리 장비들을 실어나를 차량을 준비해 두긴 했지만, 현재 교통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안 그래도 차량으로 이동하기엔 먼 거리다.
그런 상황에 조금이라도 빨리 이 나라를 떠나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교통은 거의 마비 상태였다.
사회 인프라 자체가 그리 뛰어난 나라가 아니었기에, 사회적 혼란이 더욱 가중된 탓이었다.
“그럼 그 이상 걸릴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최소한 여덟 시간.
많으면 열 시간에서 열두 시간도 걸릴 수 있단다.
터무니없이 긴 시간이었다.
“헬기는? FILO에 헬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쉽게도 인도네시아에는 헬기가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짐 머레이가 구조용 헬기를 구매하긴 했지만, 전 세계 모든 국가에 배치할 정도는 아니었다.
현재는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몇 군데에만 배치가 된 상태.
차차 늘려나가겠다고는 하지만, 아직 인도네시아까지 헬기가 들어올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인도네시아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이가 없으면 잇몸이다.
인도네시아에 FILO의 헬기가 없다면, 현지에 있는 것을 사용하면 될 터.
하지만 이번에도 서포터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저희도 요청해 보았습니다만, 거절당했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을 돕기 위해 온 사람들에게 그 정도의 지원도 해주지 못한단 말인가?
“자신들이 사용할 계획인 것 같습니다.”
아직 구조대도 보내지 못했으면서 무슨!
수혁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현장으로 출발하시죠.”
아무래도 지금 상황에선 차량이 가장 최선의 선택인 것 같았다.
“다들 들으셨죠?”
수혁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팀원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퍼스트 클래스 좌석에서 편하게 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일곱 시간에 걸친 여정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긴 시간을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는 소리에 벌써부터 지치는 것 같았다.
“가자. 힘들다고 죽치고 있을 순 없으니까.”
박상태가 애써 분위기를 전환하며 차에 올라탔다.
“그동안 편히 쉬었으니까, 이 정도 고생은 해줘야죠.”
슈미츠와 손민준 역시 젊은 피를 과시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탑승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솔직히 다른 사람들보단 톰이 가장 걱정이었다.
물론 아직 현장에 나갈 정도로 창창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 중에서는 가장 연장자였으니까.
“이 몸이 그냥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
톰은 피식- 웃으며 율리안과 함께 탔다.
“장비들은요?”
수혁이 직원에게 물었다.
“준비한 차량에 옮겨 싣는 중입니다. 양이 양이다 보니,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럼 저희 먼저 출발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일단은 여러분과 개인 장비는 먼저 보내고, 부피가 큰 것들은 준비가 되는 대로 바로 저와 함께 뒤따라 출발할 생각입니다.”
수혁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자꾸만 변수가 생기는데도, FILO의 서포터 직원들은 최적의 방법을 찾아내고 있었다.
우왕좌왕하지도 않았고, 당황하며 버벅이지도 않았다.
그만큼 수많은 상황에 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수혁은 그런 대처들이 마음에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 먼저 출발하죠.”
“술라웨시 섬에서 뵙겠습니다.”
수혁이 마지막으로 차에 탑승했다.
준비된 차량은 버스였다.
한국에서 탄 것처럼 고급 리무진 버스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신경쓴 덕분인지 꽤나 쾌적했다.
“조금 힘들 겁니다.”
버스가 출발하자, 수혁은 팀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교통 상황에 따라 열 시간이 넘게 걸릴 수도 있다는군요.”
이미 직원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던 팀원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수혁을 쳐다봤다.
“그래도 이번이 저희의 첫 출동이니만큼, 조금 불편하고 힘들어도 참아주셨으면 합니다.”
앞으로는 더 나아질 것이다.
이런 변수가 생긴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에 대한 대처방법을 만들어둘 테니까.
이번 한 번만 견디면 된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앉아서 쉬어라, 인마. 괜히 체력 낭비하지 말고.”
박상태가 그런 수혁에게 핀잔을 주었다.
자신들은 괜찮다는 뜻을 돌려서 내비친 것이다.
수혁이 웃으며 팀원들을 바라봤다.
“아쉽게도 가장 먼저 들어가진 못했지만, 가장 나중에 나옵시다.”
First In, Last Out.
단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수혁은 최대한 노력하리라 결심했다.
언제나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