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372화
수혁은 술을 준비했다.
그동안 선물로 받은 좋은 술들이 꽤 많았지만, 소주를 마시고 싶어 하는 율리안을 위해 일단은 소주를 가장 먼저 꺼냈다.
‘다른 술이 더 필요할까?’
독일인들이 맥주를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소주는 도수의 고하에 상관없이 사람을 훅- 가게 만드는 마력이 있지 않은가?
‘거기에 맥주까지 섞으면 끝이지.’
술이 아마 술술 넘어가다 몸도 넘어가게 될 것이다.
특히나 술을 섞어 마시는 문화가 없는 유럽인들은 더욱 취할 테고.
“이게 소주예요.”
수혁이 초록색 유리병을 바에 올려놨다.
“흠…….”
율리안이 호기심 서린 눈빛으로 소주병을 관찰했다.
“눈으로 보면 뭘 알겠나? 마셔봐야지.”
이미 몇 번 소주 경험이 있는 짐 머레이가 웃으며 소주병을 깠다.
알싸한 소주 특유의 향이 퍼졌다.
“냄새는 별로군.”
술이라고는 맥주나 위스키 정도밖에 마셔보지 않은 율리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종류의 술과는 너무도 다른 향이 거슬렸던 것이다.
“무슨 약품 냄새 같기도 하네요.”
슈미츠 역시 냄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썼다.
“넌 마셔봤잖아.”
“기, 기억이 잘…….”
한국으로 연수를 왔을 때, 현장 실습을 끝내고 회식 겸 술자리를 같이한 적이 있었다.
삼겹살과 소주.
소방관들의 영원한 동반자인 그것들을 슈미츠는 끝도 없이 뱃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결국 인사불성이 되어, 기억마저 날려 버린 듯했다.
“한번 마셔보세요.”
수혁이 소주잔에 한 잔씩 따라 주었다.
그러곤 최은송이 챙겨준 안주를 펼쳐놓았다.
거창한 것은 아니었고, 간단한 마른안주들이었다.
“짠 하고 한입에 털어 넣으시면 됩니다.”
짠-
네 사람이 소주잔을 부딪치고는 원샷을 했다.
“크으!”
“억!”
율리안과 슈미츠의 입에서 자연스러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수혁과 짐 머레이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하고는 좀 다를 겁니다.”
도수도 도수였지만, 소주만의 그 특이한 맛은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마셔보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대, 대체 이런 걸 왜 마시는 거지?”
율리안이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안주를 집어 입속에 욱여넣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참지 못할 것 같았다.
“마시다 보면 괜찮아질 걸세.”
이미 이 과정을 모두 거친 짐 머레이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짐 머레이는 저 둘보다도 더욱 심한 거부감을 보였었다.
애초에 그가 마시는 술은 전부 쉽게 살 수 없을 정도로 값비싼 것들뿐이었다.
그런 술에 길들여져 있던 사람이 소주를 마시려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하지만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나름 적응을 한 것 같았다.
“자네도 이것들 좀 먹게. 원래 소주는 안주랑 같이 마시는 술이야.”
율리안과 달리 아무것도 먹지 않고 인상만 구기고 있는 슈미츠를 향해 안주를 권했다.
그러자 슈미츠는 냉큼 오징어 버터구이를 한웅큼 집어 씹기 시작했다.
“어? 이건 맛있습니다?”
다행히 안주는 입에 맞는 것 같았다.
“소주만 마시기 힘드시면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
수혁이 이번엔 맥주를 꺼냈다.
그러곤 능숙하게 소맥을 한 잔 말아 율리안에게 건넸다.
술과 술을 섞는 모습에 율리안의 눈이 커졌다.
“지금 뭐하는 거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장면이라도 본 것처럼, 그의 눈에는 불신의 빛이 역력했다.
“속는 셈 치고 한번 마셔보세요.”
수혁이 잔을 건네자, 율리안이 갈등했다.
과연 이 혼종을 입에 가져다대도 되는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수혁이 주는 술을 거절할 수도 없었기에, 눈 딱 감고 한 모금 마셨다.
“음?”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괜찮았다.
“마실 만하죠?”
“……그래.”
이해할 순 없었지만, 소맥은 정말로 좋았다.
그냥 소주만 마실 때보다 백 배는 더.
율리안이 마음에 들어하자, 수혁은 소맥을 몇 잔 더 말아 같이 마시기 시작했다.
한 잔, 두 잔…….
쓸데없는 잡담과 더불어 술은 조금씩 사라졌다.
그러다 문득 슈미츠가 짐 머레이를 향해 물었다.
“집을 준다는 게 정말입니까?”
술을 입에 가져다대던 짐 머레이가 멈칫- 했다.
“그게 그리도 궁금하던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평생을 살아왔던 독일을 떠나 낯선 땅에 정착해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불안할 텐데, 걱정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수혁을 믿고 따른다고는 했지만, 현실적으로 장애물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인 집을 해결해 준다고 하니,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집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고 참은 것이 용할 정도로 말이다.
“아까도 잠깐 말했다시피, 대원들의 복지에는 돈을 아낄 생각이 없네. 집? 물론 지급할 생각이네. 그뿐인가? 자네들의 편의를 위한 모든 것을 제공할 걸세.”
작게는 보험부터, 정기적인 건강 검진, 취미와 자기계발을 위한 자금과 심지어는 차량까지.
짐 머레이가 생각하는 복지에는 한계가 없었다.
그야말로 퍼붓는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누리게 해줄 생각이었다.
그들에게는 그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었으니까.
‘마음 같아선 전 세계 모든 소방관에게 베풀고 싶지만…….’
아쉽게도 짐 머레이가 아무리 부자라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그렇군요.”
슈미츠가 말을 더듬었다.
독일 소방관의 복지 역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하지만 짐 머레이가 제시한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세상 어떤 기업을 가도 이 정도로 지원을 해주는 곳은 없을 것이다.
정말로 짐 머레이가 말한 것들이 전부 실현될지는 모르겠지만, 10분의 1만 적용되어도 지금보다는 삶의 질이 훨씬 높아질 것 같았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같이하기로 이미 결정했습니다.”
혹여라도 짐 머레이가 나중에 딴말을 할까 두려웠던 슈미츠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뜻을 밝혔다.
“자네의 이름은 진즉 올려둔 상태니 걱정하지 말게.”
짐 머레이가 웃으며 잔을 들었다.
그러면서 율리안을 흘깃- 쳐다보았다.
수혁이 구상한 팀원 중 남은 한 사람은 바로 율리안이었다.
다른 팀은 모두 구성을 끝낸 상태였고, 이제 그만 결정하면 인선은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 자리에서 바로 결정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율리안에게는 가족이 있었으니까.
이만한 일을 혼자 결정할 순 없을 터.
수혁과 짐 머레이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좋은 조건을 듣고서도 거절한다면, 더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 얘기는 다음에 하죠. 3일 만에 갖는 휴식인데, 이제 다른 얘기들 좀 하고 싶네요.”
수혁이 끼어들며 분위기를 바꿨다.
이미 율리안과 슈미츠를 한국으로 부른 목적은 달성했다.
거기다 조금 전 추가적인 메리트를 보여주었으니, 이젠 율리안의 결정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때까진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았고, 재촉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부턴 그저 그간의 노고를 풀며 즐기는 자리로 족하다.
네 사람은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그동안 쌓여 있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다음 날 숙취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른 채로…….
***
연이어 터진 커다란 이슈는 한국은 한동안 술렁였다.
미국 대통령의 방한.
수혁의 미국 명예시민증 수여식.
수원역 붕괴.
일주일이라는 시간 안에 연달아 터진 대형 사건들이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이슈에는 공통적인 한 사람의 이름이 따라붙었다.
바로 김수혁.
그 덕분일까?
김수혁이라는 이름은 지금까지도 실시간 검색어에 계속해서 오르내리는 중이었다.
“이게 아직도 떠 있네.”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스마트폰을 쳐다보던 수혁이 헛웃음을 지었다.
수원역 붕괴 사고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고, 율리안과 슈미츠가 숙취로 인해 깨질 듯한 머리를 붙잡고 경주를 다녀온 뒤 귀국할 때까지.
수혁은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 속에 있었다.
예전처럼 기자들이 계속 따라붙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들어오는 온갖 인터뷰 제안과 섭외 요청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만약 신일서에 있었다면 서장의 권유로 한두 개는 출연을 결정했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신일서가 아닌 특수 구조대였다.
그리고 구조대장인 진태수는 그런 것들을 혐오하는 편에 속했다.
‘나한텐 다행이지.’
수혁이 구조에만 전념할 수 있게 모든 요청은 진태수 선에서 다 잘려 나갔다.
칼같이 잘라내는 진태수의 태도에 수혁은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율리안이 독일로 돌아간 지 나흘이 지났다.
일생일대의 결정이라고는 하지만, 그날 수혁의 집에서 본 율리안의 표정은 금방 결정을 내릴 것 같았다.
물론 가족이라는 변수가 있긴 했지만, 이만한 조건과 복지를 받을 수 있는데 거절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을 것이라 내다봤는데…….
오히려 이미 결정한 슈미츠에게만 연락이 오고, 율리안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수혁은 괜히 똥줄이 타기 시작했다.
이번 수원역 붕괴 현장에서 새삼 율리안이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훌륭한 인재이긴 했지만, 율리안은 그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톰의 경험, 손민준의 피지컬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괴물이었으니까.
‘손민준과 슈미츠에게 경험이 쌓인다면 언젠간 율리안을 넘어서겠지만…….’
현재로선 가장 뛰어난 대원이었다.
물론 수혁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런 만큼 반드시 영입하고 싶었는데, 계속 연락이 오질 않으니 괜히 안달이 났다.
“웬일로 여기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네?”
수혁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강병규가 휴게실에 들어왔다.
“농땡이라뇨. 전 할 거 다 하고 잠깐 쉬고 있는 것뿐이에요.”
수혁은 이미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내둔 상태였다.
장비 점검부터 서류 작업까지.
출동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오늘 수혁이 할 일은 이제 없었다.
“하여간 빨라요.”
자신은 아직 할 일이 산더미인데, 벌써 끝냈다니.
수혁은 현장에서뿐만이 아니라 사무실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자랑했다.
“그래서. 왜 여기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어?”
강병규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으며 묻자, 수혁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봤다.
“너 지금 똥 마려운 강아지 같다.”
초조해 보인다는 뜻이었다.
“아, 누구 연락을 좀 기다리고 있었어요.”
“제수씨?”
“아뇨.”
“바람피우지 마라.”
“바람은 무슨, 저 그런 놈 아닙니다.”
수혁이 픽- 웃었다.
율리안의 연락을 기다리는 자신의 모습이, 강병규에게도 꽤나 애타게 보였나 보다.
“하긴, 그렇게 예쁜 제수씨를 두고 바람을 피우면 병…….”
“잠시만요.”
수혁이 강병규의 입을 막았다.
조용하던 스마트폰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평범한 번호가 아니었다.
‘국제 전화다.’
생소한 형식이었지만, 짐 머레이나 슈미츠의 연락을 받아봤기에 수혁은 전화를 건 사람이 해외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발신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흠흠.”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은 수혁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러자 수혁의 예상대로, 율리안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다. 지금 통화 가능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