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366화
‘율리안이?’
수혁의 눈이 커졌다.
율리안이 한국에 들어왔다는 것도 놀라운데, 이미 수원에 도착했다니?
그것도 자신을 돕기 위해서 말이다.
수혁은 곧장 짐 머레이의 위치를 묻고는 전화를 끊었다.
“잠깐 어디 좀 다녀오겠습니다.”
팀장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니, 갑자기 어딜?”
지금 이 상황에 수혁이 빠진다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쪽팔린 일이긴 했지만, 수혁이 없다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작업 속도는 몇 배나 느려질 것이고, 체력은 더욱 빨리 소모될 것이다.
“잠깐 쉬고 계세요. 금방 돌아올 겁니다.”
수혁은 괜히 저들이 무리하다 사고라도 터질까 두려워, 잠시 쉬는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팀장은 고개를 저었다.
“구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쉽니까.”
수혁 없이 도저히 어떻게 뚫고 들어갈지 엄두가 나지 않았을 뿐, 구조 작업을 멈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구조대원이었다.
수혁에 비해 실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 사명감 역시 부족하진 않았다.
“음…….”
수혁은 잠시 팀장을 쳐다보다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갑작스러운 수혁의 사과에 팀장이 깜짝 놀랐다.
대체 왜 사과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니, 왜…….”
팀장이 쭈뼛거리자, 수혁이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사과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렸다.
“금방 다녀올 겁니다. 그때까지만 이곳을 맡아주십쇼.”
“아, 알겠습니다.”
팀장이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뭔지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수혁이 저렇게 다급해 보이니 보내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수혁이 팀의 지휘를 맡고 있었기에 막을 명분도 없었지만 말이다.
수혁은 팀장을 뒤로하고 빠르게 달렸다.
짐 머레이에게 들은 위치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달린다면 5분 이내에 도착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
물론 수혁은 그보다 훨씬 빠르게 도착할 수가 있었다.
“짐!”
저 멀리 고급스럽게 보이는 세단을 발견한 수혁이 그곳을 향해 손을 들며 소리쳤다.
주변에 그보다 좋아 보이는 차가 없었으니, 당연히 저게 짐 머레이의 차일 것이라 짐작한 것이다.
그리고 수혁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수혁이 다가가자, 차의 문이 열리고 낯익은 얼굴이 나타난 것이다.
“수혁!”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짐 머레이였다.
바로 얼마 전에 봐놓고도 반가운 기색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상황이 상황이었는지라 대놓고 미소를 짓고 있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차에서 내린 것은 수혁도 생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외국인이 내리기에 당연히 율리안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슈미츠?’
놀랍게도 슈미츠였다.
슈미츠는 수혁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그사이 그들의 근처에 도착한 수혁이 속도를 줄이며, 이게 어떻게 된 거냐는 듯 짐 머레이를 쳐다봤다.
“율리안이 왔다고 들었는데요?”
“나도 왔다.”
율리안이 아닌 슈미츠가 보이자 잠깐 혼란해하던 수혁의 귀에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율리안.”
마지막으로 차에서 내린 사람은 바로 율리안이었다.
“오랜만이군.”
율리안은 수혁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입니다.”
수혁은 반가운 눈으로 율리안과 슈미츠를 바라봤다.
“어떻게 된 겁니까?”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뉴스를 봤다. 꽤나 심각한 사고가 터졌다고.”
그것을 본 율리안은 당연히 수혁도 그곳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정식 출동이 아니었는지라 뉴스에는 수혁의 이름이 단 한 글자도 나오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예상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그래서 도우러 온 거지.”
“……피곤하실 텐데요?”
아무리 체력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장거리 비행은 피곤한 일이었다.
지금 율리안과 슈미츠의 눈만 봐도 피곤이 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수혁을 돕기 위해 현장으로 직접 찾아왔다.
“네가 독일에서 해준 일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독일에서 수혁이 구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독일은 수혁에게 너무도 커다란 은혜를 입었다.
그리고 율리안은 그것을 그냥 고맙다는 말로만 때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수혁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한 사람의 손이라도 더 필요했다.
그 손이 율리안과 슈미츠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더는 낭비할 시간도 없었으니, 수혁은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따라오세요.”
짐 머레이에겐 일단 사태가 수습된 이후에 보자고 말한 뒤, 율리안과 슈미츠를 데리고 구조 본부로 향했다.
“이 두 사람의 장비도 좀 챙겨주실 수 있겠습니까?”
수혁의 요청에 구조대장 김민철은 저들이 누구냐는 눈빛을 보냈다.
“독일에서 지원 온 구조대원들입니다.”
“도, 독일?”
갑자기 여기서 독일이 왜 나와?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궁금한 것이 많겠지만,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일단 장비들부터 빌리겠습니다.”
수혁의 말에 김민철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예가 있었던가?’
공식적으로 지원 온 이들도 아니고, 그야말로 지나가다 현장을 보고 도와주러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수혁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수혁은 신원이 확실하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독일인?
‘이건 다른 문제야.’
한국인도 아니고, 신원확인이 불가능한 독일 소방관들에게 장비를 내어줄 순 없었다.
“안…….”
“부탁드립니다.”
김민철이 거부를 하려고 했지만, 수혁이 먼저 선수를 쳤다.
“뭐?”
“신원은 제가 확실히 보증합니다.”
수혁은 김민철을 향해 정중하게 부탁했다.
“사람들은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원이 속속 도착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인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김민철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구조대장이었으니까.
“정말 소방관들인가?”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소방관들입니다.”
수혁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김민철은 잠시 고민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무에게나 장비를 내주고 구조 작업에 참여시킬 순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데다, 수혁이 이렇게까지 부탁하니 그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래. 사람들부터 살리고 봐야지.’
결국 김민철은 율리안과 슈미츠에게 장비를 내어주기로 결정했다.
“감사합니다.”
수혁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는 둘을 데리고 예비 장비가 비치된 곳으로 향했다.
“괜히 우리 때문에 귀찮게 되었군.”
“죄송합니다.”
두 사람이 수혁에게 사과했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을 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더 지체되고 있었다.
때문에 수혁에게 미안할 수밖에.
“대신 열심히 해주세요.”
수혁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다.”
굳이 이런 일이 아니었어도, 율리안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구조에 열과 성을 다했을 것이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여기 이것들 챙기시고…….”
수혁은 두 사람에게 장비를 건넸다.
그러면서 살짝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독일의 것과 비교하자면 한참이나 노후 되어 있는 것들밖에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예비로 빼놓은 것이겠지만.’
한국 소방관들의 보급 장비란 원래 이렇다.
물론 수혁이 있는 특수 구조대나 몇몇 곳에는 그나마 나은 것들이 보급되긴 했지만,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조만간 미국에서 장비 지원이 시작된다면 크게 나아질 것이란 희망을 갖는 수밖에 없었다.
“장비들이…….”
율리안이 말끝을 흐렸다.
왠지 실례를 범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조금 낡았습니다.”
수혁의 말에 율리안이 허허- 웃었다.
반면 슈미츠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예의를 갖추기 위함이 아니었다.
슈미츠는 이미 경험을 해봤기 때문이었다.
‘연수 때에 비하면 훨씬 낫네.’
소방 학교에서 썼던 장비들에 비하자면 이것도 감지덕지였다.
그때의 장비들은 정말 사용이 가능한지 의심이 될 정도로 노후화되어 있었으니까.
어쨌든 두 사람은 빠르게 장비를 착용했다.
이들은 워낙 뛰어난 실력자들이라 장비 착용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쪽으로.”
수혁은 곧장 그들을 데리고 현장으로 직행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됐어.’
실제로 흐른 시간은 고작 10분 남짓이었지만, 수혁은 그마저도 아쉬웠다.
“이곳에서부터 뚫고 들어가는 중이었습니다.”
선로에 도착한 수혁이 말했다.
“흐음.”
절대 쉬워 보이진 않았다.
아니, 율리안은 자신이라면 이쪽을 택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만큼 작업 난이도가 높았다.
하지만 수혁이라면?
독일에서 수혁이 보여줬던 능력이라면, 여기만큼 제격인 곳도 없었다.
‘혼자 그 땅속을 수십 미터나 이동했지.’
아무런 장비도 없이, 맨손으로 말이다.
그것을 생각해 보면 사실 여기서 길을 뚫는 것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도 않았다.
‘문제는 시간이지.’
저 안에 요구조자가 몇 명이나 갇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좋진 않을 것이다.
호흡할 수 있는 공기의 문제도 있었고, 부상과 출혈, 그리고 압박도 심할 것이다.
1분 1초가 요구조자들의 생사를 결정지을 수가 있었다.
“서둘러야겠군.”
율리안은 수혁의 시간을 빼앗은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며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 어?”
“당신들 뭡니까?”
안에서 쉬지 않고 작업을 이어가던 대원들이 율리안과 슈미츠를 보고는 어리둥절해했다.
장비를 입은 사람들이 다가오기에 지원인가 싶었는데, 외국인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희를 도우러 온 사람들입니다.”
수혁이 나서서 대충 설명했다.
자세하게 설명할 시간도 아까웠다.
그저 지원이라는 것만 알면 되었고, 지금은 소요된 시간만큼 빠르게 움직일 때였다.
“지원이라니……?”
그것도 외국인 지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팀장은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수혁이 데리고 온 데다, 착용한 장비들을 보아하니 정식으로 승인이 난 사항 같았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작업을 개시하자, 수혁이 율리안을 불렀다.
그러곤 손가락으로 몇 군데를 가리켰다.
“여기와 여기. 그리고 여기.”
긴말은 하지 않았지만, 율리안은 수혁의 뜻을 이해했다.
“알았다. 슈미츠!”
고개를 끄덕인 율리안이 슈미츠를 부르더니, 곡괭이를 들고는 수혁이 가리킨 지점을 파기 시작했다.
‘역시.’
율리안이 보여주는 움직임은 평범하지 않았다.
이 정도 속도라면 지체된 시간을 보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잠시 율리안과 슈미츠를 지켜본 수혁은 심호흡하며 다시 자신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쾅- 콰앙- 쾅-!
곡괭이가 휘둘러질 때마다, 잔해들이 마치 폭탄에 맞은 것처럼 깨지며 조각났다.
지금까지 다른 대원들이 하던 작업 속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수혁만이 아니었다.
율리안과 슈미츠 역시 엄청난 속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팀장이 마른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괴물이 더 늘었네.”
그와 대원들의 눈에는 수혁이나 외국인들이나, 똑같은 괴물처럼 보였다.
물론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필요한 괴물들이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