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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큐 시스템-361화 (361/425)

레스큐 시스템 361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눈앞의 미국 대통령이 수혁을 따로 부르는 것은.

미국에서 한국까지 왔는데, 고작 수여식에서 시민권 하나만 틱- 던져 주고 돌아갈 리가 없었다.

이왕 주는 것, 생색 정도는 제대로 내야 하지 않겠나?

“다시 뵙습니다.”

수혁이 대통령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서 오게.”

대통령이 있는 곳은, 수혁이 머물고 있던 대기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넓었다.

‘경계도 삼엄하고…….’

눈을 돌리는 족족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경호원들이 보였다.

물 샐 틈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하긴, 미국 대통령쯤 되면 위험한 일도 많을 테니까.’

여기가 아무리 안전하기로 유명한 한국이라 하더라도 조심은 해야 했다.

수혁은 대통령의 환대를 받으며 소파 쪽으로 다가갔다.

원래부터 있던 것인지, 아니면 대통령을 위해 새로 가져다 놓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고급스러워 보였다.

“여기 계실 줄은 몰랐네요.”

그리고 그 소파에는 대통령뿐만이 아니라, 짐 머레이와 케인 로저스 역시 자리하고 있었다.

대통령과 독대할 줄 알았던 수혁은 살짝 놀랐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어찌 됐든 저 두 사람 역시 수혁과의 인연이 있는 미국인들이었으니까.

‘게다가 보통 사람들도 아니고.’

한 명은 재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 명은 미국의 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다.

사실 이 자리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수혁이었다.

“앉게.”

수혁이 잠시 생각에 빠져 있자, 대통령이 손을 뻗어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수혁은 자연스럽게 가장 친한 짐 머레이 옆쪽에 앉았다.

그와 눈인사를 잠깐 나눈 수혁이 대통령을 쳐다보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어떤가? 역사상 아홉 번째로 미국의 명예시민이 된 소감은?”

은근히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수혁은 굳이 대통령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입바른 소리를 해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네, 뭐. 나쁘진 않네요. 혜택도 많은 것 같고…….”

‘영광입니다’ 혹은 ‘너무 기쁩니다’ 따위의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던 대통령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허허. 아직 실감을 못 하고 있는 것 같네만, 이건 엄청난 일이라네.”

수혁의 대답에 깜짝 놀란 케인 로저스가 수습을 위해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수혁에게 계속해서 눈짓을 보냈다.

제발 대통령을 자극하지 말아달라는 뜻인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별로 배운 게 없어서 이것의 정확한 가치를 파악하질 못하고 있었습니다.”

수혁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케인 로저스가 저렇게 반응하는 것으로 봐선, 정말로 대통령의 기분을 망쳤다간 그리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할 것만 같았다.

수혁의 사과의 대통령이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그럴 만하지. 시민권 수여식이라는 행사를 한 것도 이번이 첫 번째였으니까.”

수혁을 제외하고 생전에 미국의 명예시민이 된 사람은 단 두 명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그 두 명은 이런 수여식을 통해 받은 것도 아니었다.

나머지 여섯 명은 모두 사후에 받았기에 수여식을 열 의미가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이번 수여식은 여러모로 역사적인 의미가 컸다.

심지어 미국에서 열린 것도 아니고, 미국 대통령이 직접 한국까지 와서 수여한 것이니 더욱 그랬다.

“……그렇습니까?”

수혁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처음 들었다는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 모습에 대통령이 만족한 듯, 크게 웃었다.

“그렇다고 너무 부담스러워하진 말게. 이건 우리가 원해서 한 일이었으니 말이야.”

실제로 수혁이 원하진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얻을 것이 있기 때문에 억지로 진행한 일이었다.

부담스러워하지 말라고?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너무 부담스러워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겉으로 표현할 순 없었다.

지금 눈앞에서 웃고 있는 이 남자는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일개 소방관 한 명이 어쩔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케인 로저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대통령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명예이긴 하지만 미국의 시민이 되었으니, 혹시 미국으로 건너올 생각은 없나?”

있을 리가 있나.

“아직은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가뜩이나 미국의 행동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수혁이었다.

미국 명예시민권 하나 받았다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살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한번 고려해 보는 것도 좋을 걸세. 우리 미국은 꽤나 살기 좋은 곳이니까.”

그러면서 수혁이 미국으로 오면 해줄 수 있는 것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집부터 시작해서 차와 직업까지 마련해 주고, 세금 감면의 혜택까지 해줄 수 있단다.

조건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이 정도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어차피 갈 생각도 없었고, 이제부터 수혁은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만, 지금은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어서…….”

“아, 그 일 말인가?”

수혁이 조심스럽게 거부 의사를 밝히자, 대통령이 짐 머레이를 쳐다봤다.

“나도 익히 보고를 들어 알고 있었다네.”

케인 로저스도 알고 있는 일이었으니, 대통령이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국제 구조 단체라…….”

대통령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짐 머레이를 향해 물었다.

“듣자 하니 우리의 힘이 조금 필요하다고 하던데. 맞나?”

“그렇습니다.”

짐 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돈과 인력, 장비들은 충분했다.

문제는 단체 설립을 위한 여러 승인이었다.

짐 머레이 혼자서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일이긴 했지만, 그렇게 하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만약 미국이 도와준다면 그 시간을 훨씬 단축할 수도 있었기에, 짐 머레이는 케인 로저스에게 부탁한 상황이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

미국의 입장에서 그깟 허가 몇 개를 내주고, 절차들을 간소화해 주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미국이 먼저 앞장서면, 그것을 따르는 국가들도 나올 테고.

그렇게 되면 짐 머레이의 생각대로 시간이 훨씬 단축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뜸을 들였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말을 하면서도, 선뜻 나서질 않고 있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주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대통령은 대가를 바랐다.

“이미 미국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약속드렸습니다만……?”

짐 머레이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처음 이 제안을 했을 때, 짐 머레이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투자를 약속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얼마 후면 있을 대선에서도 절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정치 자금을 기부하기로 했다.

투자와 정치 자금.

이 정도면 재선에서도 크게 유리한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

오히려 단체 설립에 들어가는 예산보다도 많은 금액이었으니, 짐 머레이가 얼마나 신경쓴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건 당연히 받아야 하는 거고.”

대통령은 뻔뻔한 태도로 픽- 하고 웃었다.

대중 앞에 나설 때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철저하게 이익만 좇는 장사꾼이다.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것 같아도,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미국과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이었다.

짐 머레이가 급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뜯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뜯어내고 싶을 것이다.

“원하시는 게 뭔지 궁금하군요.”

짐 머레이는 이제 완전히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원하는 것이라…….”

대통령은 짐 머레이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다.

“자네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군.”

대통령의 시선이 수혁을 향했다.

분위기가 좋지 않게 흘러가자 덩달아 심각해져 있던 수혁은, 갑자기 화살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미간을 찌푸렸다.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냥 소방관일 뿐입니다.”

“아니지. 자네는 그냥 소방관이 아니야.”

대통령은 수혁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국의 영웅.”

일개 소방관이 아닌, 미국의 명예시민이자 슈퍼히어로.

인기로만 따지자면, 현 대통령보다도 높았다.

만약 수혁이 소방관이 아닌 정치인이었고, 순수 백인에 미국 태생이었다면?

‘대선에서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겠지.’

미국 내에서 수혁의 인기는 그 정도로 드높았다.

대통령은 그런 수혁을 이용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고.

“단 한 번이면 되네.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한 번만 도와주게. 그러면 부탁을 처리해 주지.”

무슨 부탁일지 상상도 되질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자신의 재선을 위한 것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수혁은 결정해야만 했다.

이딴 일에 놀아나고 싶진 않았다.

정치고, 선거고, 나발이고.

수혁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사람을 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일에는 끼고 싶지도 않았으며,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하지만…….

수혁이 짐 머레이를 쳐다보았다.

‘내가 거절하면 짐이 힘들어지겠지.’

수혁도 알고 있었다.

짐 머레이가 왜 이런 단체를 설립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것은 바로 수혁 때문이었다.

짐 머레이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수혁에게 뭔가 해주고 싶었다.

단순히 돈과 같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진정으로 수혁을 위한 것을 말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구조 단체 설립이었다.

수혁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단체.

한국에서 특수 구조대를 설립한 것은 이번 일의 연습이나 다름없었다.

수혁은 짐 머레이 혼자 고생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대통령님, 이런 식으로 나오신다면 약속드렸던 것들을 취소할 수…….”

“알겠습니다.”

짐 머레이는 고개를 저으며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다.

대통령의 말은 수혁에게도 부담이었고, 자신도 절대 원하지 않는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조금 더 시간이 걸리고 발품을 팔아야 한다 해도, 거절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혁은 그런 짐 머레이의 입을 막았다.

“자네!”

짐 머레이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수혁은 이미 결정한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도움이 필요할 때, 단 한 번.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단, 선거 유세나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일은 거절하겠습니다.”

수혁은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자 대통령이 미소 지었다.

“물론이네. 나도 자네를 그딴 조잡한 일에 써먹을 생각 따윈 없으니 안심해도 좋아.”

대통령은 안심하라는 듯 말했지만, 오히려 그게 더 불안했다.

“수혁, 이건 나와 상의를 좀…….”

짐 머레이는 수혁의 생각을 돌리기 위해 속삭였다.

하지만 수혁은 고개를 저었다.

이 단체는 짐 머레이 혼자서 만드는 것이 아니었으니, 수혁에게도 함께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괜찮습니다.”

수혁이 더는 말을 하지 말라는 듯 쳐다보자, 짐 머레이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좋군, 좋아. 하하하, 한국까지 온 보람이 있어.”

오직 대통령만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잔을 들었다.

“축하하는 의미로 샴페인 한잔하지. 여러모로 축하할 일이 많은 것 같으니.”

수혁 역시 샴페인이 담긴 잔을 들었다.

그런 수혁의 눈은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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