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358화
수혁은 본부에 복귀하자마자 자신을 데리러 온 차량을 발견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모시러 왔습니다, 김수혁 씨.”
깔끔한 정장 차림의 기사가 수혁을 맞이했다.
“……좀 씻고 와도 될까요?”
무려 열두 시간이 넘는 구조 작업 끝에 복귀했다.
당연히 꼴이 엉망이었다.
이런 상태로 저런 고급 세단에 올라탄다는 것 자체가 왠지 죄를 짓는 것 같았다.
“물론입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기사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수혁이 본부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출발하나?”
“네. 벌써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슬슬 시간이 되긴 했지.”
“죄송합니다.”
수혁이 전승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사과에 전승철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죄송하지?”
“저 때문에 괜히 쉬지도 못하고…….”
수혁이 지칠 정도의 현장이었다.
당연히 다른 대원들은 수혁보다 몇 배는 더 힘들 것이다.
그런 상황에 수여식에 참석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으니, 지금 속이 말이 아닐 터였다.
괜히 자신 때문에 이 고생을 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너무 미안했다.
“헛소리 그만하고 얼른 씻기나 해라.”
하지만 전승철은 별로 신경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니, 전승철뿐만 아니라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죄송할 것도 많다. 이런 기회가 내 인생에 또 언제 오겠냐?”
강병규는 오히려 조금 신나 보이기까지 했다.
“불이 너 때문에 난 것도 아닌데 뭘 사과를 하고 있어.”
“그래도…….”
“입 닥치고 빨리 가서 씻어라. 밖에서 기다린다.”
수혁이 계속 머뭇거리자 전승철이 수혁을 샤워실로 밀어 넣었다.
얼떨결에 샤워실로 들어온 수혁은 입맛을 다시며 씻기 시작했다.
찝찝했던 땀이 따뜻한 물에 씻겨 내려가자 조금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그 기분을 계속 만끽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별로 없었다.
수혁은 아쉬운 마음으로 대충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사이 다른 대원들은 퇴근 준비를 끝냈다.
“너 먼저 출발해라. 우린 버스 대절해서 간다니 곧 뒤따라 갈 수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수혁은 대원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본부를 나섰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기사는 이 정도쯤이야, 하는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타시죠.”
지나친 친절에 수혁은 부담스러워하며 차에 탑승했다.
‘좋긴 하네.’
수혁의 SUV도 고가의 차량이긴 했지만, 이 세단은 그보다도 한 차원 높았다.
몸을 감싸 안는 것 같은 좌석의 푹신함에 수혁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피곤하긴 했나 보다.’
잠이 솔솔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자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다시 눈을 떴다.
그런데 그 모습을 기사가 본 것 같았다.
“조금 주무셔도 됩니다.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으니까요.”
“아, 괜찮습니다.”
수혁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 나른하긴 해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졸린 것은 아니었으니까.
수혁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깥 구경이라도 하면서 정신을 차리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수혁은 서울로 향했다.
***
“준비는 잘 되어가나?”
“잘 진행되고 있네.”
케인 로저스의 물음에 짐 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것은 없고?”
“지금 당장은.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마무리 때나 잘 도와주면 되네.”
“흐음, 그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대통령께서도 이미 승인해 주셨으니 말일세.”
짐 머레이는 케인 로저스의 대답에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까지 진행이 되었는지 알 수 있겠나?”
“사람은 거의 다 구했네.”
“……벌써?”
“아직 부족하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람들과는 모두 이야기가 끝난 상태야.”
“몇 명이나 되지?”
“수혁의 팀을 포함하면 지금까지 열여섯 명.”
케인 로저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거의 다 구했군.”
계획했던 인원은 총 세 팀으로 총 열여덟 명이었다.
그중 열여섯 명이나 구했다니, 이제 두 명만 남은 셈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부족한 게 많다네.”
아니, 인원을 빼면 준비된 게 거의 없다는 게 더 정확했다.
장비들은 물론이고, 단체 설립에 필요한 재단과 현장 대원을 도와줄 인원들까지.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예산은 충분한가?”
케인 로저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짐 머레이가 픽- 하고 웃었다.
“지금 내게 돈이 부족하진 않느냐고 물은 건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냥 해본 말이네.”
케인 로저스도 진심으로 한 걱정은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할 게 없어서 짐 머레이의 주머니를 걱정하다니.
‘게다가 도움을 주기로 한 이들도 있으니.’
본래 처음 생각은 짐 머레이 혼자 모든 자금을 댈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었다.
자신의 사후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혼자서 모든 짐을 떠안으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소지가 컸다.
그래서 짐 머레이는 다른 지인들도 끌어들였다.
그리 내켜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중에는 흔쾌히 지원을 결정한 이들도 많았다.
그것도 단발성이 아닌 지속적인 지원을 말이다.
‘이 정도면 내가 죽더라도 걱정할 일은 생기지 않겠지.’
자금의 투명성 있는 활용이나 감사를 받아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긴 했지만, 장점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감안할 만 했다.
“그나저나 수혁이 걱정이군.”
“그게 무슨 말인가?”
생각에 잠겨 있던 짐 머레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전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수혁이 밤새 현장에 나가 있었다는데.”
그냥 밤새도 피곤할 텐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불길 안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녔으니 얼마나 힘이 들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짐 머레이는 별로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가 평소에 수혁을 얼마나 아끼는지 생각해 보면 이상할 정도로 담담했다.
“걱정 안 되나?”
“수혁에게 그 정도는 별것 아니네.”
짐 머레이는 수혁이 고작 하룻밤 일을 한 것 가지고 힘들어할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케인 로저스 역시 수혁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짐 머레이만큼은 아니었다.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여전히 수여식이 잘 진행될지 걱정되긴 했지만, 짐 머레이가 저렇게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괜찮을 것 같았다.
“수여식이 끝나면 대통령과 독대 시간이 있을 걸세.”
“그러겠지.”
무려 미국에서 여기까지 직접 왔다.
달랑 명예시민증만 건네주고 돌아갈 리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 수혁에게 몇 가지 제안할 것 같더군.”
짐 머레이가 살짝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미국 대통령이 시민증을 핑계로 수혁에게 족쇄를 채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설마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겠지?”
짐 머레이의 의심에 케인 로저스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확신이 없었다.
실제로 대통령이 무슨 제안을 할지는 그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제안인지 알 수 있겠나?”
“나도 잘 모르네. 다만 예상을 해보자면…….”
잠시 고민을 하던 케인 로저스가 입을 열었다.
“아마도 미국과의 협력 관계를 제안할 것 같네.”
짐 머레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
“도착했습니다.”
차가 멈추자 수혁이 눈을 떴다.
그렇게 버텨보려고 했는데, 어느새 잠이 든 것 같았다.
‘10분쯤 잔 건가?’
서울에 들어설 때까지도 깨어 있었으니, 실제로 잠든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수혁이 민망한 표정으로 기사를 향해 인사를 했다.
기사는 눈웃음을 지으며 수혁을 데리고 한쪽으로 이동했다.
“대기실입니다. 이곳에서 잠깐 쉬고 계시면 사람이 와서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해 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기사는 끝까지 정중한 태도로 수혁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사라졌다.
“거참, 적응 안 되네.”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 불편함이 느껴졌다.
“내가 서민은 서민인가 보구나.”
누군가에겐 일상인 대접이, 이토록 부담스러운 걸 보니.
수혁은 피식- 하고는 소파에 앉았다.
세종문화회관.
언젠간 최은송과 함께 공연이나 전시회를 보러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곳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오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관객이 아닌 무려 주인공으로 말이다.
‘내가 여기서 이런 대기실을 쓸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수혁은 황당함에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뭐, 기분은 좋네.’
귀찮긴 했다.
부담스럽기도 했고.
하지만 괜히 가슴이 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수혁도 사람이었으니까.
자신이 그동안 해온 일에 대한 인정을 받는 것이 싫을 리가 없었다.
그 스케일이 너무 커서 문제이긴 했지만…….
똑똑-
수혁이 대기실 안을 둘러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수혁이 말하자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어, 톰?”
“오랜만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등장했다.
당연히 기사가 말했던 것처럼 일정을 이야기해 줄 공무원일 줄 알았는데, 톰일 줄이야.
“아니, 여긴 어떻게?”
그러고 보니 짐 머레이가 말했었다.
톰도 이번에 한국으로 들어온다고 말이다.
“인사 좀 하려고 들렀습니다.”
수혁은 톰과 악수를 하고는 웃었다.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요.”
“본래는 내일이나 모레쯤 찾아가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계시다고 해서…….”
오늘은 수여식 하나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테니, 괜히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오히려 고맙네요. 안 그래도 혼자 있는 게 심심했거든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을 했다.
톰은 앞으로 수혁과 같이 일을 할 사람이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친분을 다질 기회였다.
물론 톰이 수혁의 제안을 받아들여야겠지만 말이다.
둘은 서로 그간의 안부를 나누고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톰에게 할 제안이 하나 있었습니다.”
“제안 말입니까?”
톰 역시 진지하게 수혁의 말을 경청했다.
“짐과 제가 계획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수혁은 천천히 구조단체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짐 머레이가 만들어준 계획서가 있다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은 없었으니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으음.”
한참 이어진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던 톰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습니까, 저희와 함께하는 건?”
수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톰은 쉽게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고려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수혁은 재촉하지 않고 톰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톰이 입을 열었다.
“저는 많이 늙었습니다.”
확실히 다른 사람들에 비해 톰은 나이가 많았다.
지금도 현장에서 한발 물러나 지휘에 집중하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수혁은 개의치 않았다.
굳이 몸을 쓰지 않아도, 톰은 분명히 팀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다.
“현장에서 뛰는 것도 쉽지가 않죠.”
수혁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톰을 쳐다만 봤다.
그 모습에 톰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이런 저라도 괜찮다면, 함께하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