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349화
부천서는 생각보다 작았다.
수혁이 이전에 근무했던 신일서와 비교해 봐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긴. 부천은 의외로 좁으니까.’
수혁이 있는 도시는 신일서와 비슷한 규모의 소방서가 세 개나 더 있다.
그뿐인가?
전담 특수 구조대도 있었다.
그만큼 땅덩어리가 넓고 인구수도 엄청나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부천은 그리 넓은 편이 아니었다.
크기에 비해 인구수는 좀 많긴 했지만…….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수혁은 서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며 손민준이 나오길 기다렸다.
방금 복귀했으니, 막내인 그는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장구류 정리부터 기본적인 정비까지.
1, 2분 내에 짧게 끝날 정도의 일은 아니었지만, 수혁은 기다리기로 했다.
“김수혁 씨?”
수혁이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박상태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남자가 웃으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반가워요.”
그는 수혁에게 정말로 반갑다는 듯 악수를 청했다.
수혁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육각수 한 개의 계급장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소방장?’
연배뿐만이 아니라 계급 역시도 박상태와 동일했다.
“김수혁입니다.”
수혁이 정중하게 손을 맞잡으며 자신의 소개를 했다.
“아,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그는 깜빡했다는 듯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부천서 구조 2팀을 맡고 있는 정성호라고 해요.”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나 구조팀장이었다.
“오늘 막내 녀석을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좀 하려고.”
막내라면 손민준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수혁은 손을 내저었다.
결과적으로는 손민준과 요구조자를 구한 셈이 되었지만, 사실 도움이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조금 위험해 보이긴 했어도, 손민준이라면 충분히 빠져나오고도 남았을 것이다.
‘위기감지Ⅲ’가 발동하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정성호는 수혁이 겸손을 떨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더욱 짙은 미소를 띠었다.
“혹시 시간 되면 같이 커피나 한잔할까요?”
정성호의 제안에 수혁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손민준이 볼일을 끝마칠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것보단, 어디 앉아서 커피라도 마시며 기다리는 게 나을 것이다.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수혁은 정성호를 따라 휴게실로 향했다.
‘여기도 똑같네.’
소방서는 어디나 비슷비슷한 건지, 휴게실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밀크?”
“아, 전 블랙으로 주십쇼.”
“오……. 어른 입맛.”
정성호가 낄낄- 대며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수혁에게 건네주었다.
“잘 마시겠습니다.”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며 한 모금 마시자, 정성호가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김수혁 씨는 지금 꽤 바쁜 걸로 알고 있는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찾아오셨을까?”
정성호가 진심으로 궁금한 듯 묻자, 수혁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밝히기엔 조금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직 확정된 일도 아니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손민준 씨와 할 이야기가 좀 있어서요.”
이 정도밖에는 설명해 줄 수가 없었다.
“흠, 막내와 할 이야기라…….”
수혁이 대답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정성호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나쁜 일은 아닙니다.”
수혁의 말은 진심이었다.
만약 짐 머레이의 계획대로 진행이 되고, 손민준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좋으면 좋았지, 해가 되진 않았다.
물론 정성호의 입장에서는 반대일 수도 있었다.
일 잘하고 있던 막내를 갑자기 빼내 가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수혁은 저들 역시 손민준이 결정하면 응원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체력 테스트 때 그리도 열심히 응원해 줬지.’
수혁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손민준을 응원하던 부천서의 대원들을 말이다.
막내인 손민준이 잘되길 바라지 않았다면, 그런 식으로 열심히 응원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황금 같은 비번에 시간을 내면서까지 말이다.
정성호는 커피를 마시며 한참 동안이나 수혁의 표정을 관찰했다.
그러곤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을 하실 분은 아닌 것 같고.”
소방관들 사이에서 수혁의 평판은 하늘을 찌른다.
수혁 덕분에 소방관의 위상이 올라갔고, 관심 역시 집중되며 많은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뿐인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미국에서 어마어마한 물량의 장비가 한국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지금 쓰고 있는 보급품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장비들이 말이다.
그것들로 장비만 교체되어도, 소방관들의 안전과 요구조자들의 구조율이 오른다.
그러니 수혁을 싫어하려야 싫어할 수가 없었다.
뭐, 심성이 꼬인 이들이 아예 없진 않았지만…….
“궁금하긴 한데, 굳이 묻진 않을게요.”
정성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상대가 꺼리는 것을 파고들 정도로 예의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수혁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꼬치꼬치 캐물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는데, 한발 물러서 주었다.
“아무튼 오늘 이렇게 유명한 분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어느새 커피를 다 마신 정성호가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말했다.
“막내는 지금 바로 보낼 테니,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으세요.”
그러고는 수혁의 대답도 듣지 않고 쌩하니 휴게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내가 김수혁이랑 단둘이 커피를 마시는 날이 다 오네. 이거 자랑해야겠다.”
그러면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 참.”
수혁이 머리를 긁적였다.
전에도 느낀 것이었지만, 부천서 사람들은 꽤나 유쾌해 보였다.
분위기라면 신일서도 만만찮게 좋았지만, 부천서는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딱히 뭐라고 설명할 방법은 없었지만…….
‘무슨 진짜 형제 사이인 것 같네.’
이런 분위기가 유지되는 것에는 팀장인 정성호의 역할이 큰 것 같았다.
“괜찮은 사람이야.”
수혁은 정성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커피를 다 마신 수혁이 종이컵을 버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손민준의 모습이 보였다.
“여깁니다.”
수혁이 손을 들어 손민준을 불렀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손민준이 죄송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제 잘못이죠.”
수혁은 손민준이 마음에 들었다.
독일에서 계속 자신의 심기를 건드렸던 백진호와 비슷한 나이였지만, 성격은 정반대였다.
누가 봐도 호감이 느껴질 정도로 성격도 좋고, 예의도 바르다.
“커피 드시겠습니까?”
수혁이 묻자 손민준은 손을 내저었다.
“커피 마시면 밤에 잠을 못 자서. 괜찮습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괜히 귀여워 보였다.
“흠흠.”
살아온 세월은 수혁이 훨씬 더 많았지만, 나이를 생각해 보면 손민준이 한두 살 정도 더 많았다.
수혁은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를 보는 듯한 표정을 재빨리 지우고는, 의자에 앉았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요?”
뒷정리하는 내내 그것이 궁금해 참기가 힘들었다.
수혁은 손민준에게 있어 커다란 벽과 마찬가지였다.
마주친 건 단 한 번밖에 없었지만, 그날의 임팩트가 너무도 강했다.
압도적.
그 누구보다 피지컬에 자신이 있었던 손민준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차이로 수혁에게 밀렸다.
도저히 따라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이전에도 수혁이란 소방관에게 관심은 있었지만, 그 후로는 라이벌 의식을 불태웠다.
사실 라이벌보단 롤 모델에 가깝긴 했지만, 다시 만나면 절대 지지 않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더 열심히 운동했고, 더 열심히 훈련했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날이 올 줄은 몰랐다.
덕분에 손민준은 당황하면서도 수혁이 대체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 손민준의 마음을 눈치챈 것일까?
수혁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제안할 것이 있다고 했죠?”
손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넓은 곳에서,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손민준 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받아들일 의향이 있으신가요?”
손민준은 멍하니 수혁을 쳐다봤다.
잠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더 넓은 곳? 더 많은 사람? 혹시 특수 구조대를 말하는 건가?’
손민준은 특수 구조대를 들어가기 위해 체력 테스트까지 치렀던 사람이다.
비록 수혁에게 밀려 떨어지긴 했지만, 그것을 포기하진 않았다.
그런 와중에 수혁에게 이런 말을 들었으니, 당연히 특수 구조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손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소방관이 된 이유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그런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죠.”
대답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손민준은 정말로 뛰어난 사명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수혁이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저런 생각을 지니고 있다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확률이 높았다.
“지금 진행 중인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손민준이 묻자, 수혁은 미리 준비해 왔던 것들을 꺼내 들었다.
바로 박상태에게 보여주었던 그 문서였다.
“이걸 한번 봐보세요.”
손민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특수 구조대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던 것이다.
의아한 마음으로 문서를 받아 든 손민준이 가장 앞면에 적혀 있는 것을 보고는 얼굴을 굳혔다.
“……이건?”
‘더 넓은 곳에서, 더 많은 사람을.’
손민준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생각을 훨씬 넘어서는 스케일이라는 것만 빼면 말이다.
“국제 구조 단체라니!”
소방관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본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에 그친다.
그런 조직을 운영하려면 엄청난 예산과 인재들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NGO나 국경 없는 의사회와는 조금 다르다.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정적인 활동을 하는 그들과 달리, 구조대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세계를 돌아다녀야 할 테니까.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물론입니다.”
수혁은 짐 머레이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재산을 지닌 사업가.
이런 조직 하나쯤은 충분히 운영하고도 남는다는 이야기에, 손민준의 표정이 묘해졌다.
초안에 불과했기에, 아직 세세한 조건이나 활동계획 같은 것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손민준은 생각에 잠겼다.
1분, 2분, 그리고 10분.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
수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민에 빠진 손민준을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거의 30분이란 시간이 흘렀을 때.
손민준이 생각을 끝냈다.
“지금 바로 결정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으니, 충분히 숙고하고…….”
“하죠.”
“네?”
“하겠습니다. 아니, 저도 하게 해주십쇼.”
고민을 끝낸 손민준의 눈은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