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346화
“……진급을 명합니다.”
대통령 표창장과 함께 1계급 특진의 포상이 주어졌다.
행사라면 일단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수혁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분이 좋았다.
표창은 둘째치고, 자신의 진급이니 안 좋을 리가 없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표창장과 계급장을 수여한 사람은 당연히 대통령이 아니었다.
아마도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수여하고 싶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다음 주면 미국 대통령이 오니까.’
그걸 준비하는 것만 해도 지금은 정신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대통령을 대신해 수여자가 된 사람은 바로 경기도지사였다.
그는 시민들을 위해 애써준 수혁에게 축하를 건넸다.
정중하게 그 말을 받아 인사를 한 후 단상에서 내려왔다.
짧은 진급식이 끝나자 사람들이 수혁에게로 다가왔다.
“벌써 소방장을 다는 게 말이 되냐?”
“이젠 저보다 상급자예요.”
가장 먼저 온 것은 바로 신일서 식구들이었다.
마침 비번이었기에 같이 참석한 것이었다.
김강식의 말에 박정우가 울상을 짓자, 수혁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한 번 선배는 영원한 선배잖아요.”
“그, 그렇지?”
박정우가 헤- 하고 웃었다.
수혁이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설마 상급자가 됐다고 막대하면 어떡하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한 것이었다.
“하여간 겁만 많아가지고.”
박상태는 그런 박정우를 보며 혀를 찼다.
“어, 그런데 재한 선배랑 효상 선배는요?”
두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수혁의 물음에 박상태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어제 현장에서 좀 사고가 있어서.”
박상태 대신 대답한 것은 박정우였다.
언제나 그렇듯, 소문 확산의 주범답게 박정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쏟아냈다.
“어제저녁에 화재 현장 출동이 있었거든. 요구조자 수색을 하다가 인화 물질이 폭발하는 바람에 부상을 입었어.”
“……심각해요?”
“아니아니, 심각한 건 아니고.”
박정우가 손을 내저었다.
다행히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다.
불길이 덮치긴 했지만, 방화복을 입고 있던 탓에 화상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
그저 폭발의 충격에 날아가며 몸 이곳저곳에 타박상을 좀 입은 모양이었다.
“조심 좀 하시지…….”
“그게 네가 할 말이냐?”
수혁이 걱정을 하자, 박상태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 중에서 그 누구보다 조심성을 길러야 할 사람은 바로 수혁이었다.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지.
박상태는 수혁을 보며 혀를 찼다.
“수혁 씨.”
그때 뒤쪽에서 최은송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왔어요?”
“죄송해요. 최대한 빨리 오려고 했는데 길이 막혀서.”
남편의 진급식에 늦었다는 죄책감에 최은송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에이, 그럴 수도 있죠. 괜찮아요. 별거 없었어요.”
물론 수혁은 그런 일로 전혀 섭섭해하지 않았다.
이런 행사는 어떻게 해도 지루하게 마련이었는지라, 오히려 끝나고 도착한 게 더 나은 것일지도 몰랐다.
“오랜만이에요, 제수씨.”
“아!”
박상태가 인사를 하자, 최은송은 그제야 신일서 대원들을 발견하고는 환한 표정을 지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었기에, 서로 반가움이 가득한 인사를 나누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나야 뭐, 이 녀석이랑 독일에 갔다가 개고생만 했죠.”
박상태는 일단 수혁을 씹었고, 김강식과 박정우는 그냥 평범하게 지냈다고 대답했다.
“어쨌든 축하해요, 제수씨.”
최은송에게도 축하 인사를 한 그들은 이제 슬슬 돌아갈 준비를 했다.
수혁에게 축하하는 것도 좋지만, 오랜만의 비번엔 가족과 함께 지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같이 식사라도 하면 좋을 텐데.”
최은송이 아쉬운 듯 붙잡아봤지만, 박상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간 마누라한테 죽어요.”
생각만 해도 무섭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떤 박상태는 김강식과 박정우를 데리고 수혁에게 인사를 건넸다.
“우린 먼저 가보마. 너도 오늘은 제수씨랑 단둘이 좋은 시간 보내.”
“오늘 와주셔서 감사해요.”
“감사는 무슨. 그럼 우린 간다.”
“아, 형. 잠깐만요.”
박상태가 떠나려고 하자, 수혁이 붙잡았다.
“응? 왜? 할 말 있냐?”
“네. 조용히 할 말이 있으니까 밖에서 조금만 기다려 줘요.”
“중요한 거야?”
“……어쩌면요.”
수혁의 대답에 박상태가 고개를 갸웃했다.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짐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얘들은 그냥 보내고?”
“선배들은 들어가서 쉬셔야죠.”
“나는? 이 새끼야.”
“형도 좀 늦게 들어가는 게 좋잖아요.”
수혁이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하자, 박상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았다. 인사 끝나면 나와라.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할게요.”
신일서 식구들이 떠나자 기회를 엿보고 있던 사람들이 다가와 축하 인사를 해주었다.
솔직히 수혁은 그들 대부분이 누군지도 몰랐지만, 그렇다고 인사를 무시할 순 없었기에 일일이 모두 받아주었다.
“아이고, 힘들다.”
인사만 하는데도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진급식보다 훨씬 긴 시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끝나자마자 잽싸게 도망갈 것을 잘못했다며 후회했다.
“수고했어요.”
인사하는 수혁의 옆에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던 최은송이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아주었다.
수혁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당연히 힘이 들어서 땀이 난 것은 아니었다.
여러 사람을 마주하다 보니, 괜한 긴장과 압박 때문에 진땀이 난 것이었다.
“사람들도 참. 적당히 하면 안 되나?”
최은송이 작게 투덜거렸다.
“그러게 말이에요.”
수혁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행사보다 인사가 길었던 진급식이 마침내 끝이 나고, 수혁은 최은송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싸늘한 공기가 잔뜩 달아올랐던 열기를 식혀주었다.
“뭔놈의 인사를 한 시간씩이나 하냐?”
밖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던 박상태가 뚱한 표정으로 수혁을 노려봤다.
설마하니 한 시간이나 걸릴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덕분에 자판기 커피만 벌써 세 잔째였다.
“아, 죄송해요. 저도 이럴 줄은 몰랐어요.”
수혁이 사과하자 박상태는 코웃음을 쳤다.
“됐고. 할 얘기가 뭔지 그거부터나 듣자.”
“추우니까 일단 카페로 가요. 커피 괜찮죠?”
최은송에게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수혁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궁금했다.
“나 벌써 세 잔이나 마셨는데……?”
“그럼 주스 마시던가요.”
“이놈 많이 컸네. 인마, 여기가 아직도 독일인 줄 아냐?”
“에이. 왜 또 그래요. 이제 계급도 비슷한 사이끼리.”
“뭐? 야! 소방위랑 소방장은 하늘과 땅 차이야. 감히 어디…….”
“추우니까 빨리 가요.”
박상태가 쏘아붙였지만, 수혁은 최은송의 팔을 얼른 붙잡고는 자리를 이동했다.
“내 말 안 들려 인마! 나 깡패 되는 꼴 보고 싶냐?”
뒤에서 박상태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수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 * *
“준비는 잘되어가나요?”
대통령이 피곤한 얼굴로 최문식에게 물었다.
“시간이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어떻게든 진행 중입니다.”
최문식은 입에 발린 보고 따위는 하지 않았다.
모든 게 잘 준비되고 있다는 말 대신, 실제로 어떤 상황인지 보고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사안들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최문식은 대통령과 일대일 대면보고를 하면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최문식은 재경부 장관이었다.
이번 미국 대통령의 방한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런 일은 외교부에서 맡아야 할 일 아닌가?
그런데도 대통령은 이번 일의 책임자로 최문식을 세웠다.
그 이유는 수혁과 최문식의 관계 때문이었다.
미국 대통령의 주된 방한 목적이 수혁에게 있었으니, 그의 장인인 최문식이 준비하는 게 조금 더 낫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물론 대통령이 최문식을 그만큼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하지만 최문식은 이 상황이 그리 마음에 들진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할 일이 산더미인데, 갑자기 일을 떠맡는 바람에 집에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명예시민증 수여는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여기에 보시면 계획 초안이…….”
최문식은 지난 며칠 동안 밤을 새워가며 만든 기획서를 건네주었다.
“음.”
대통령은 그것을 찬찬히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군요.”
“아직 세세한 부분까지는 완성시키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보완 중이니 수시로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대통령은 마음에 든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기획서 안의 내용은 조금 과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물론 예산은 미국 측에서 전부 부담하기로 했으니 상관없긴 했지만, 그 규모가 너무 컸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반려하지 않았다.
이것을 기회 삼아 미국과 조금 더 긴밀한 사이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신경쓴 티가 나면 날수록.
미국에게 생색낼 수 있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이런 것 하나하나가 정치에서는 빚이 된다.
“그러고 보니 오늘 장관님 사위가 진급하는 날이었던가요?”
대통령이 문득 물었다.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조금 전 딸아이에게 연락이 왔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듣자 하니 이전에도 한 번 특진한 적이 있다던데. 이거 미래에 사위가 소방청장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대통령은 말을 하며 허허- 웃었다.
최문식 역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수혁의 승진 속도는 말도 되지 않게 빨랐다.
소방청장이라는 자리가 대통령 임명으로 앉는 자리라 하지만, 이 정도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낸다면 마냥 꿈도 아닐 듯했다.
“과찬이십니다.”
“아니요. 빈말이 아니에요.”
최문식이 겸양을 떨자, 대통령은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지금 당장 소방청장을 투표로 뽑자고 한다면 누가 되겠는가?
대통령은 수혁이 압도적인 성적으로 당선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
그만큼 수혁의 화제성과 영웅적인 행적은 타의 추종을 거부했다.
지금 당장에야 어렵겠지만, 앞으로 시간이 흐른다면…….
‘소방청장 자리는 앉고도 남겠지.’
정치 쪽으로 나온다면 정말로 큰 자리 하나는 차지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때까지 명성을 유지한다는 조건이 붙긴 하겠지만 말이다.
“장관이 옆에서 잘 좀 지도해 주세요. 앞으로도 큰일을 할 사람이니.”
대통령이 건넨 단순한 격려 안에는, 꽤나 무거운 뜻이 담겨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것을 알아들은 최문식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부담스러워졌다.
자신이 수혁의 장인이긴 하지만, 그의 삶에 관여할 자격은 없었다.
지금껏 수혁의 직업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주제에,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간섭한단 말인가?
하지만 대통령 앞에서 그럴 순 없다고 대답할 순 없었다.
“좋아요.”
대통령은 최문식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웃으며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이 바빠 식사도 못 하신 것 같은데, 같이 늦은 점심이라도 할까요?”
대통령이 웃으며 최문식에게 점심을 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