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스큐 시스템-337화 (337/425)

레스큐 시스템 337화

수혁은 호텔 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들을 누렸다.

독일에서 신경을 많이 써준 덕분에 룸 역시 훌륭했다.

예전에 미국으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 짐 머레이가 마련해 준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 호텔에서는 가장 좋은 방을 수혁에게 내준 것이다.

1박에 수백만 원이나 하는 고가의 룸.

당연히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지만, 사실 이건 호텔 측에서도 그리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현재 독일에서 수혁의 위상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상태였다.

특히 퇴원하고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보인 그의 행동을 언론에서 크게 다룬 덕분에 더욱 그랬다.

수혁이 쪼그려 앉아 알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모습.

그 사진 한 장은 독일 사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수혁의 이름을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켜 준 것이다.

그래서 호텔 측에서는 더욱 극진하게 대접했다.

물론 고마움도 있었지만, 이번에 많은 활약을 해준 한국 구조팀이 묵은 호텔이라는 타이틀 하나만으로도 호텔의 이름을 알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수혁은 그야말로 황제처럼 지냈다.

처음에는 조금 꺼리다, 이내 ‘에라, 모르겠다’ 하며 즐길 정도였다.

마치 퍼스트 클래스에 탑승한 VIP 고객처럼 온갖 케어를 받으며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오늘,

“이것도 예상 못 했는데요.”

수혁이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지원 온 구조대가 몇 명인데 이 정도는 예상했어야지.”

눈앞에는 온통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한국과 유럽 연합, 그리고 일본의 구조팀들이 독일에서 마련한 행사를 위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구조대원들의 숫자만 무려 4백 명에 가까웠고, 독일의 인사들을 포함하면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분위기는 그리 밝지 않았다.

예전 독일 대사관에서 치러진 훈장 수여식과 비교해 보면 화려함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런데도 최대한 신경을 써주고 있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한국은 저쪽인가?”

너무도 북적이는 사람들 탓에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박상태가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미 이홍관이 도착해 수혁과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수혁은 곧장 이홍관을 향해 다가갔다.

“아, 수혁 씨! 몸은 좀 어떠세요?”

그간 이홍관은 구조대원들 못지않게 바빴다.

비록 현장에서 구조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 구조팀의 편의를 위해 열심히 움직였던 것이다.

수혁의 병문안을 한 번도 오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수혁이 그런 이홍관을 보며 미소 지었다.

“보시다시피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이홍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여러 가지 경로로 수혁의 상태를 듣긴 했다.

하지만 수혁의 열렬한 팬을 자처하는 이홍관으로선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듣던 대로 괜찮아 보이자,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일단 모두 앉으시죠.”

수혁을 향해 뭔가를 더 말하려던 이홍관은 뒤에서 멀뚱히 서 있는 다른 대원들을 보며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거, 우리도 신경 좀 써줍시다.”

수혁의 뒤에서 박상태가 짓궂게 웃으며 농담을 걸었다.

“죄, 죄송합니다.”

이홍관이 당황하며 말을 더듬자, 대원들이 낄낄- 웃으며 자리로 가서 앉았다.

몇 주라는 시간 동안 함께 지내다 보니, 이홍관이 수혁의 팬이라는 사실을 모두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이홍관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단 오늘 행사는 최대한 짧게 끝낼 예정이라고 합니다.”

상황이 완전히 마무리가 되었더라면, 그리고 피해가 적었더라면.

독일에서는 이번 행사를 더할 나위 없이 크게 개최했을 것이다.

도움을 준 이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독일은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직도 수많은 희생자가 저 아래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행사는 최대한 짧게 끝낼 예정이었다.

그래도 구색은 갖춰, 행사가 끝난 뒤에는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수백 명의 사람이 얼마든지 먹고 마실 수 있는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으니, 그간의 피로를 풀기에는 충분할 터였다.

이홍관을 통해 대략적인 행사의 순서를 들은 수혁과 대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들은 이런 행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수도 없이 많은 전시 행정을 겪어온 덕분이었다.

때문에 일단 행사라는 단어만 들어가면 경기를 일으키는 이들이 많았다.

수혁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만약 율리안이 꼭 참가해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수혁은 건강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을 것이다.

‘뭐, 독일은 좀 다르겠지.’

행사 시간을 고작 20~30분 내외로 잡은 것만 봐도 한국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약 한국이었다면 최소한 한 시간 단위로 스케줄을 잡았을 테니까.

한국 구조팀이 자리를 잡고 앉자, 다른 국가들도 하나씩 자신들의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가장 앞쪽에는 한국 구조팀이 앉았고, 그다음에는 유럽 연합.

가장 뒤를 차지한 것이 일본이었다.

그냥 돌아가라고 해도 꾸역꾸역 남아 결국에는 행사에도 참여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일본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단은 도움을 주러 온 이들이기에, 일단 자리를 마련해 주기는 했지만…….

“꽤나 미운털이 박힌 모양이다.”

수혁의 옆에 있던 박상태가 피식- 하며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죠. 지들이 한 짓이 있는데.”

율리안이 일본팀의 구조대장을 폭행한 사실은 당연하게도 언론에게 흘러들어 갔다.

그 현장을 직접 목도한 기자들의 수만 수십 명이었으니까.

당연히 율리안을 향한 비난조의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독일을 돕기 위해 머나먼 일본에서 온 사람을 폭행했으니, 쉽사리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의외로 그런 기사들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비난의 화살은 율리안에서 일본에게로 옮겨졌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밝혀진 것이었다.

수혁의 조언과 율리안의 지시를 일부러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한 탓에, 한 명의 요구조자가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독일인들은 율리안에게 보여주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분노를 터트렸다.

오죽하면 일본 구조팀들이 이동할 땐, 경호 인원이 함께 이동해야 할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남아 있는 것도 대단하네.”

박상태는 질렸다는 듯 혀를 찼다.

다른 국가의 사람들은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한국인인 자신들은 누구보다 일본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내가 조언했다는 게 싫었던 거겠지.’

수혁은 일본의 생각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일본이 왜 요청하지도 않은 지원을 보냈는지, 그리고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했는지.

지금까지 봐온 일본의 행동들을 생각하면, 예상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저렇게 푸대접을 받는 일본의 모습이 조금 통쾌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씁쓸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소방관이었다.

정치인도, 연예인도, 언론인도 아닌 소방관 말이다.

그런 이들이 요구조자의 생명을 구하는 것보다 다른 일을 우선순위로 두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쓰라렸다.

수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 한숨을 쉬어? 뭔 걱정 있냐?”

수혁의 모습을 본 박상태가 물었다.

하지만 수혁은 씁쓸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박상태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행사가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이홍관의 말대로 행사는 짧게 끝났다.

몇몇 사람이 나와 간단하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그대로 끝나 버린 것이다.

그 흔한 기념사진 한 장 찍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라고 한다면, 연설한 이들 중에는 독일의 부총리가 있었다는 것 정도뿐이었다.

“우리나라도 이런 건 좀 배웠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박상태는 마음에 들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건 수혁도 동의하는 바였다.

“만찬장은 이쪽에 마련되어 있으니,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행사가 끝나자, 수혁과 대원들은 이홍관의 인솔을 따라 이동을 시작했다.

“휘유우!”

건물 외부에 마련되어 있는 만찬장에 도착하자, 누군가 자신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뷔페네.”

“그러게요.”

수혁과 박상태는 허허-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뷔페는 뷔페였지만, 그 규모가 정말로 엄청났다.

수백 명에 달하는 인원들이 먹어야 하니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이렇게 커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컸다.

아니, 거대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음식 구경만 해도 행사 시간보다 더 오래 걸리겠다.”

대체 어떻게 이 많은 음식을 준비한 것인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모두 자유롭게 식사해 주시면 됩니다.”

앞서 행사 중에 연설했던 부총리가 만찬의 시작을 알렸다.

수혁은 일단 박상태와 함께 자리를 잡고는 음식을 가져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뷔페라고 해봐야 고기 뷔페나 결혼식 밖에는 가보지 못했던 박상태가 머리를 긁적였다.

평생 구경도 해보지 못한 음식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니 혼란스러울 만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수혁도 마찬가지.

두 사람이 머쓱하게 서서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 옆으로 다가왔다.

“한국의 소방관들은 대우가 그리 좋지 못하다고 들었는데, 역시 이런 곳은 익숙하지 않으신가 봅니다?”

어색한 영어 발음.

두 사람은 그것을 듣자마자, 말을 건 사람이 일본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박상태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자, 일본 구조팀의 대장인 이와타의 모습이 보였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비꼬려는 게 아니라, 그저 걱정한 것뿐입니다.”

이와타는 수혁과 박상태의 표정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자, 급히 변명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감정은 누가 봐도 조소였다.

그것에 발끈한 박상태가 입을 열려고 하자, 수혁이 팔을 붙잡았다.

이곳에는 보는 눈이 많았다.

각국의 소방관들뿐만 아니라, 독일의 유력 인사들과 기자들까지.

아무리 지금 일본의 이미지가 바닥을 기고 수혁이 영웅 취급을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자리에서 문제를 일으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수혁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표정으로 박상태 대신 이와타의 말을 받았다.

“일본에선 대우가 많이 좋은가 봅니다.”

수혁의 물음에 이와타가 미소를 지었다.

“물론 이 정도로 커다란 규모는 아니지만, 일본은 소방관들을 위해 이런 자리를 자주 마련해 주는 편이긴 합니다.”

우스웠다.

마치 ‘느그 집엔 이런 거 없지?’ 하고 놀리는 동네 꼬마들의 자존심 싸움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애새끼도 아니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지만, 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치하긴 해도 이와타의 말에는 틀린 것이 없었다.

확실히 일본은 한국보다 소방관의 대우가 좋았으니까.

하지만 수혁은 일본이나 이와타가 부러워 나선 것이 아니었다.

“이런 곳을 다닐 시간에 훈련을 조금 더 열심히 했더라면, 지금 같은 취급은 받지 않았을 텐데……. 아쉽군요.”

수혁의 말에 이와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표정만큼이나 딱딱한 음성으로 묻자, 수혁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소방관이라면 요구조자를 어떻게 구할지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하라고. 그 같잖은 자존심 따위 내세우지 말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