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331화
기나긴 인내 끝에, 결국 수혁은 큰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다.
덕분에 예상치 못한 체력을 낭비하긴 했지만 말이다.
‘이 정도는 괜찮아.’
체력을 조금 쓰는 것이 냄새와 함께 하루 종일 이 공간에 갇혀 있는 것보단 나았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정반대의 행동을 했겠지만, 수혁은 이 상황을 딱히 절망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물이 공급되었고, 갑작스러운 붕괴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도 없었다.
위에서는 수혁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으며, 자신 역시 빠른 속도로 지상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쓸데없는 고민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무튼 화장실 문제를 해결하느라 꽤나 오랜 시간을 썼으니, 조금 쉬기로 했다.
‘볼일 보려고 세 시간이나 움직이다니.’
생각보다 주변이 불안정했기에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혁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표정으로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그사이 변한 게 있으려나?’
몇 시간 전에는 수뇌부로 보이는 이들이 한 곳에 모였다.
아마도 수혁에 대한 회의를 한 것 같았는데, 지금은 끝났는지 모두 흩어져 있었다.
‘음…….’
수혁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구조대원들을 지켜보다 눈을 감았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만약 반대의 상황이라면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지 고민해 보았다.
‘요구조자가 생존해 있고, 이동이 가능한 상황이야. 이런 조건이라면…….’
당연하게도 요구조자의 이동 방향을 생각해 구조 경로를 확보해야만 했다.
그리고 분명 위에서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럼 지금 이대로 계속 움직이면 되려나?’
처음 수혁을 발견했을 당시와 오늘의 위치를 가늠해 본다면,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충분히 파악하고도 남았다.
그 정도면 최대한 빨리 조우할 수 있는 경로를 탐색할 수 있을 테고.
‘미니 맵’을 통해 살펴보던 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대로만 가면 돼.’
현 상황에서 수혁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지금까지처럼 일직선으로 파고 올라가는 것밖에 없었다.
만약 위쪽에서 제대로 공조만 해준다면…….
‘내일 오후쯤엔 만날 수 있겠어.’
수혁 역시 재난 대응팀과 탐지반의 계산과 동일한 결과를 도출해 냈다.
아니, 수혁이 훨씬 더 정확할 것이다.
수혁은 저들이 볼 수 없는 것들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었으니까.
‘하루만 더 참으면 된다, 하루만.’
수혁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별다른 위험이 없다고, 금세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
그렇다고 해서 이 공간에 갇혀 있는 것이 즐거울 리는 없었다.
최대한 멘탈을 보호하기 위해 오만가지 생각과 쓸데없는 고민들도 하고 있었지만, 그것에도 한계는 있었다.
오직 혼자, 이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제아무리 수혁이라 할지라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교도소의 독방?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고독이 수혁을 압박해 왔다.
수혁도 빛이 보고 싶었고, 사람들의 목소리도 듣고 싶었다.
당장 이 빌어먹을 곳에서 빠져나가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었으며, 텅텅 비어버린 배를 음식들로 채우고 싶었다.
‘하루만 더…….’
칠흑과도 같은 어둠 속에서, 수혁은 홀로 웅크리고 누운 채 인내했다.
* * *
“다시 소리가 들립니다!”
자정이 지나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아래쪽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지상으로 올라와 있던 율리안은, 외침이 들리자마자 바로 탐지반을 향해 달려갔다.
“위치는?”
“예상했던 대로입니다. 일직선으로 지상을 향해 올라오고 있습니다.”
“모니터에 표시해.”
율리안의 명령에 경로가 표시됐다.
“음.”
율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팀장 급 인원들과 함께 회의를 하면서도 불안했던 점이 없진 않았다.
만약 수혁이 더는 이동하지 않는다면?
만약 갑작스럽게 이동 경로가 바뀐다면?
그렇게 되면 다시 계산을 하고 회의를 거쳐야만 했다.
그런데 다행히 수혁은 지금까지와 동일하게 움직였다.
15분가량 끊임없이 들려오던 소음이 조금 변했다.
“이건 뭐지?”
어제도 이랬던 것 같았다.
소리의 종류도 달라지고, 위치 변화도 멈추었다.
“이것만 듣고서는 저희도 알 수 없습니다.”
율리안이 물었지만, 대원은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저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이 정도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이동하는 것이며, 왜 이 정도 시간밖에 행동하지 않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것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율리안이 어제 말했던 것처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예상 지점에 도착한 건가?”
지금 중요한 것은, 과연 수혁이 어제 결정한 랑데부 지점까지 도착했는가였다.
“그렇습니다. 마치 알고 있다는 것처럼, 정확히 그 지점에서 움직임을 멈추었습니다.”
“……다행이군.”
율리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혁이 예상 밖의 행동을 하지 않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거기까지 파고들어 가는 것만 남았다.
‘지금 시간이…….’
오전 1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다.
수혁이 있는 위치에 도달하는 예상 시간이 오후 7시쯤이었으니, 18시간 정도 남았다.
‘고작 18시간.’
그러면 수혁을 구할 수 있었다.
율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간 너무도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동료 구조대원들에게도 그랬고, 가끔 언론에서도 율리안의 결정에 엄청난 비판을 해왔다.
과연 수혁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이 많은 인력과 장비를 쏟아붓는 것이 옳은 일인가?
지금도 베를린 중앙역에는 수많은 매몰자가 있었다.
생사도 확인할 수 없는…….
그들의 가족들이 기도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밤새 들려올 정도였다.
만약 수혁의 구조를 포기하고, 모든 인력을 역 쪽에 배치를 했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수의 요구조자를 구조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율리안은 수혁의 구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 모든 것을 감내한 결과물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다행이야.’
율리안은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지금까지 율리안이 수혁을 구하기 위해 했던 행동들은 단순히 수혁이라는 친한 소방관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물론 그 이유도 전혀 없다고 할 순 없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율리안은 수혁을 구조하는 것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 확신하고 있었기 떄문이다.
현재, 하루 평균 구조되는 요구조자의 수는 다섯 명 내외.
수혁이 있을 때는 그 몇 배에 육박했다.
심지어 수혁이 호텔로 돌아가기 전, 한국 구조팀에게 건네주었던 지도를 통해, 수십 명의 요구조자를 구조하기도 했다.
그러니 율리안의 입장에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수혁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사람들이 믿어줄 리가 없었으니, 그저 비판을 감수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몇 시간 후면 그것도 끝이 난다.
수혁이 현장에 복귀만 할 수 있다면, 수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다.
만약 수혁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자신이 그의 팔과 다리가 되어줄 수 있었다.
수혁은 눈이 되어주면 된다.
“지금부터 요구조자를 발견할 때까지, 단 1초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교대조도 지금부터 투입해.”
“지, 지금부터 말입니까?”
아직 교대 시간이 되려면 몇 시간이 남아 있었다.
“조금이라도 단축시켜야 할 것 아닌가?”
이런 결정을 내린 율리안에게 욕을 퍼부을 것이다.
구조대원들도 사람이다.
특히 수혁을 구조하기 위한 작업은 엄청나게 고되었기에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다.
그것을 줄이고 투입하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당연히 욕부터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율리안은 강행했다.
차라리 지금 고생을 조금 더 해서 수혁을 1초라도 빨리 구조해야만 했다.
대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명령하달 후 자신의 대장에게 쏟아질 욕설에 벌써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왜 자신의 대장이 비난과 욕설을 견뎌내면서까지 저렇게 무리하는지 말이다.
하지만 그는 율리안을 믿었다.
독일의 영웅.
그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란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대원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특이사항 발생하면 다시 보고하도록.”
율리안은 고맙다는 듯, 대원의 어깨를 몇 번 두들겨 주고는 다시 현장으로 향했다.
* * *
“젠장, 힘들어 죽겠네.”
대원 중 한 명이 흐르는 땀을 신경질적으로 닦아내며 투덜거렸다.
“조금만 더 참아. 거의 다 왔잖아.”
“우리가 몇 미터를 파내려왔는데. 슬슬 도착해야지, 안 그래?”
백 명에 가까운 구조대원들이 오직 한 명을 구조하기 위해 이곳에서 땅을 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구조를 기다리는 요구조자가 한 명밖에 없다면 모를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율리안이 독일에서는 전설적이고 존경받는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이번 명령은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갑자기 이렇게 불러내는 게 어디 있어? 안 그래도 체력이 바닥나서 힘들어 죽겠구만.”
“그만큼 구조를 빨리 할 수 있잖아. 이런 현장에선 1초라도 더 빨리 움직여야 요구조자의 생존 확률이 높아진다는 건 너도 알잖아.”
“나는 살아 있다는 것부터가 믿을 수가 없어.”
그는 호텔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직접 눈으로 목도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재난이었다.
그 안에서 사람이 살아 있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심지어 수혁은 옥상에 있었다고 하지 않은가?
절대로 살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기적이 일어나서 살아 있다 쳐. 그런데 혼자서 자력으로 탈출하고 있다고? 개소리지.”
수십 명의 사람이 밤낮없이 온갖 장비를 사용해 길을 뚫는데도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고 있었다.
그런데 혼자서, 살아 있다 쳐도 심각한 부상을 입을 것이 뻔한 사람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고 있다?
영화에서도 그런 장면은 쓰지 않을 것이다.
‘개연성이 없어도 너무 없으니까.’
대원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하지만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만약 율리안의 말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요구조자의 위치는 이제 코앞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정말로 요구조자가 이 앞에 있다면 구조해야만 했다.
아무리 기분이 더럽고, 지쳐 있는 상태라고는 해도, 그 역시 소방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투덜거리던 대원을 비롯해 몇 명의 대원들이 서로 휴식과 작업을 반복하며 계속 길을 뚫었다.
그러다…….
“어?”
대원 중 한 명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야?”
“여, 여기…….”
그가 손을 뻗어 앞을 가리켰다.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