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324화
세 번째 헬기가 떠났다.
이제 호텔 옥상에 남은 사람은 수혁과 박수진, 그리고 이십대 중반의 프랑스 청년 한 명뿐이었다.
방금 전까지 30명이 넘는 인원이 있다 세 명으로 줄어들어서인지, 옥상은 왠지 휑해 보였다.
‘10분.’
첫 번째 헬기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었다.
주변을 살펴봤다.
“흐음.”
살짝 불안했다.
10분 정도는 여유로워 보였지만, 만약 헬기가 조금이라도 더 늦게 온다면?
계속 안전할 것이란 장담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으로선 늦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없나?’
하지만 그것만 믿고 있기엔 변수가 너무도 많았다.
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모르니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일단 주변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어디 가요?”
수혁이 움직이자 박수진이 곧바로 따라붙었다.
“아, 잠깐 확인할 게 좀 있어서요.”
“저도 같이 가요.”
“괜찮은데…….”
“심심해서 그래요.”
수혁은 어쩔 수 없이 박수진과 함께 옥상 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호텔의 옥상이었는지라, 여느 건물의 밋밋한 것과는 달랐다.
일단 커다란 수영장이 있었고, 음료와 술을 파는 바도 존재했다.
사람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장소와 작은 산책로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예쁘고 좋은 시설이 아무리 많아 봐야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완강기가 있긴 하지만,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고.’
애초에 완강기가 사용 가능했다면, 헬기를 요청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을 타고 탈출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무슨 생각해요?”
왠지 수혁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박수진이 물었다.
하지만 수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땅히 할 만한 대답을 찾지 못한 것이다.
솔직하게 말을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둘러대자니 거짓말에는 그리 소질이 없었다.
그런데 수혁의 침묵이 박수진을 더 불안하게 만든 듯했다.
“혹시 문제가 생긴 건가요?”
“아뇨. 문제라기보단, 그냥 대비하는 겁니다.”
수혁이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말이죠?”
박수진은 눈치가 빨랐다.
수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헬기가 늦지 않게 도착한다면 아무런 문제 없을 겁니다.”
“늦지 않게 도착한다면…….”
수혁의 대답에 박수진이 뺨을 긁적였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어요?”
“20분 정도?”
헬기가 다시 오는 데 10분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 수혁의 말대로 제 시간에만 도착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늦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언제나 생각처럼 흐르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을 대비하는 겁니다. 큰 의미는 없어요.”
수혁은 박수진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안심시켰다.
그리고 박수진은 수혁의 말을 믿었다.
“뭐, 알았어요.”
박수진이 표정을 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방법은 찾았어요?”
장난스럽게 질문에 수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은요.”
옥상에서 두 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탈출할 만한 방법은 없었다.
혼자, 혹은 한 명의 요구조자 정도면 그리 어렵지 않았겠지만, 두 명은 무리였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두 사람을 품에 안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방법이 있긴 했다.
아무리 수혁이라도 그런 짓을 하고 무사할 리는 없었지만, 수혁에게는 ‘각성’ 스킬이 있었다.
‘각성’을 사용한다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저 아래에 수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
수혁이 8층 높이의 옥상에서 두 사람을 안은 채 뛰어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큰일이었다.
짐 머레이뿐만 아니라 모든 인맥을 동원해 부탁해도 저 많은 사람의 입은 막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그 방법은 정말 최후의 최후에나 사용해야 했다.
결국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곳에서 자력으로 탈출할 방법은 없었다.
‘쯧, 한 명만 더 태울 수 있었어도 이런 고민은 안 했을 텐데.’
수혁은 그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그저 헬기가 늦지 않게 돌아오길 바라는 수밖…….
[김수혁.]
무전기가 울렸다.
“말씀하세요.”
수혁은 불안한 예감에 재빨리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문제가 좀 생겼다.]
“젠장.”
왜 이런 느낌은 빗나가질 않는 것일까?
“설마 헬기가 늦는다는 건 아니겠죠?”
[……맞다.]
수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얼마나 늦는데요?”
[5분에서 10분 정도 더 걸릴 것 같다고 하는데, 정확한 시간은 예측할 수가 없어.]
박상태의 말에 의하면, 헬기의 엔진에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아무래도 바스켓에 사람들을 태우고 이동한 것이 엔진에 무리를 준 것 같았다.
[헬기 세 대가 전부 같은 상황이라, 지금 급히 다른 헬기에 바스켓을 장착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것이었다.
“상태 형, 시간 없어요.”
5분에서 10분.
고작 담배 한 대 피울 시간에 불과할 정도로 짧았지만, 여기에선 생명이 오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얼마나 남았냐?]
“아슬아슬해요. 어쩌면 늦을지도 모르고.”
[최대한 애를 써보마. 혹시 모르니 다른 방법도 한 번 찾아보고.]
“그런 거 없어요.”
수혁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곤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뭔가를 찾아내야만 했다.
‘밑에 사람이라도 없으면……. 아!’
고민하던 수혁의 머릿속에 뭔가가 번뜩였다.
“형, 혹시 호텔 아래쪽에 있는 소방관들 철수시킬 수 있어요?”
수혁은 혹시나 하며 물었다.
사람들의 눈이 문제라면, 그것을 치우면 된다.
그렇게 하면 박수진과 다른 한 명의 입만 막으면 될 일이었으니까.
[아마 가능할 것 같다. 여기 구조대장이 네 요청이라면 무조건 수용하라고 명령했으니까. 한 번 알아보마.]
“부탁드려요.”
수혁이 무전을 끊자, 박수진이 가만히 서서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번엔 문제 생긴 거 맞죠?”
“……그러네요.”
수혁이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 어떻게 해요?”
박수진은 앞으로 닥쳐올 미래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한 번의 재난을 겪어봤다.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있으니까.”
수혁으로선 그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그리고 최고의 방법이기도 했다.
자신이 있는 한, 이곳에서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수혁은 그렇게 확신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수혁의 무전기에서 다시 박상태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지금 명령이 전달됐다. 곧 그쪽 대원들 철수 시작할 거야.]
호텔에 붕괴 위험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일단 소방관들을 뒤로 물리기로 했단다.
수혁이 난간 밑을 쳐다보자, 소방관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화재 진압을 위해 움직이는 것과는 달랐다.
분명 철수를 위한 행동이었다.
[장비들도 그 자리에 두고 일단 몸부터 피하라고 했으니, 금방 비워질 거다.]
“고마워요. 형 덕분에 최악의 상황은 안 올 거 같아요.”
[뭘 할 작정이냐?]
박상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뛰어내리려고요.”
[미쳤냐?]
박상태의 음성은 황당함으로 가득차 있었다.
수혁이 부탁할 때부터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정말일 줄이야.
“마지막에 쓸 방법이에요. 그런 일이 안 발생하길 바라야죠.”
뛰어내리는 것은 정말 더는 어쩔 수 없을 때나 할 행동이었다.
헬기로 탈출이 가능하다면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부탁드려요.”
[내가 깽판을 쳐서라도 서둘러 보마. 그러니까 조심해.]
“알겠어요.”
소방관들이 철수를 시작했다.
일단 몸만 빼라는 명령 덕분인지, 펌프차와 장비들은 그대로 두고 썰물처럼 빠지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되겠다.’
두고 간 펌프차 덕분에 시야가 많이 가려졌다.
덕분에 뛰어내려도 사람들 눈에 띌 일은 없을 듯싶었다.
혹여 몇몇 사람들이 본다고 해도, 거리가 멀었으니 잘못 본 것이라 생각할 것이고.
“뛰어내린다고요?”
그때, 옆에서 수혁과 박상태의 대화를 모두 들은 박수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수혁은 속으로 ‘아차’ 했다.
하지만 이내 신색을 되찾았다.
그 상황이 오면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으니까.
“들으셨겠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나 쓸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뛰어내린단 말이잖아요. 여기서요.”
박수진이 보기에 보기엔 그건 그냥 자살행위였다.
“생각해 둔 게 있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수혁은 그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인 그녀는 이해도 못 할 것이고, 받아들이지도 못할 테니까.
“일단 이쪽으로 가죠.”
수혁은 박수진이 계속 물어볼 새라, 그녀를 데리고 프랑스 청년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이거 위험하네.’
처음 약속했던 10분이 지났다.
붉은색은 빠르게 짙어지고 있었다.
이제 정말로 5분 정도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수혁은 박수진과 청년에게 절대 자신의 옆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당부하며, 하늘을 쳐다봤다.
저 멀리서 헬기의 불빛이 보였다.
그것이 소방 헬기인지, 아니면 이곳으로 오는 헬기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수혁은 타들어가는 입술을 핥으며 그것을 주시했다.
‘여기로 오는 거다!’
헬기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아래쪽에 작은 바스켓이 매달려 있었다.
이제 호텔에 남은 사람이 세 명밖에 없었으니, 작은 바스켓을 장착한 것이다.
그것을 본 수혁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이 속도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
정말로 아슬아슬하긴 했다.
헬기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붉은 표시도 계속 짙어졌으니 말이다.
두두두두두-!
헬기가 호텔 상공에 도착했을 땐, 붉은 표시는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짙게 변해 있었다.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수혁은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스켓이 땅에 닿기가 무섭게 그곳으로 향해 달렸다.
그러곤 안에 있는 대원이 차단문을 열자마자, 두 사람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키이이잉-!
청년을 태우고, 뒤이어 박수진을 태우려는 찰나,
굉음이 터져 나왔다.
쿠구구구궁-!
“꺄아악!”
박수진이 바스켓 앞에서 진동을 이겨내지 못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수혁은 이를 악물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런데 호텔이 붕괴되기 시작하자, 헬기가 위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호텔이 무너지며 대기가 불안정해진다면, 헬기에 실속이 일어나며 위험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안 돼!”
수혁이 팔을 뻗었지만, 조금 모자랐다.
고작해야 한 뼘 차이.
그 정도의 차이로 수혁은 바스켓을 붙잡지 못했다.
뒤를 돌아봤다.
갈라지고 떨어져 내리는 건물 사이로, 박수진의 겁먹은 눈동자가 보였다.
으득!
수혁이 이를 악다물었다.
자신은 몰라도, 박수진만큼은 여기에 휩쓸리게 할 수 없었다.
‘각성!’
수혁은 본능적으로 ‘각성’ 스킬을 사용한 뒤, 박수진을 붙잡고 있는 팔에 힘을 줘 휘둘렀다.
그러자 박수진이 바스켓을 향해 정확히 날아갔다.
바스켓 안에 있는 구조대원과 청년이 무사히 그녀를 받아 들었다.
“아, 아저씨!”
안으로 들어간 박수진이 뒤를 돌아보며 수혁을 불렀다.
하지만 수혁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무너지는 호텔 사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