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322화
박상태는 수혁과 몇 마디를 더 나누고는 무전을 끊은 뒤, 곧장 구조 본부 쪽으로 향했다.
일단 수혁이 말한 것을 시도하기 전에, 다시 한 번 헬기 지원 요청을 해보려는 생각이었다.
현장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구조 본부로 들어가자, 안쪽에서는 열띤 대화가 오가는 중이었다.
아쉽게도 독일어로 진행되고 있었는지라, 박상태는 그것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위기로 보아하니, 뭔가를 두고 다투는 것 같았다.
박상태는 잠시 기다렸다.
사람들이 왜 다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그런데 도무지 대화가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박상태 역시 나름대로 준비할 것이 많았기에, 더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흠흠.”
헛기침을 하며 자신이 용무가 있다는 것을 알렸다.
그럼에도 박상태를 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박상태는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했다.
이번에는 방금 전보다 더 큰 소리였다.
그러자 몇 명이 그를 돌아봤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들 중 한 명이 의아한 눈빛을 하며 박상태에게 다가왔다.
마치 왜 또 왔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박상태는 바로 조금 전까지 이곳에 있다 돌아간 상태였다.
그런데 몇 분 지나지 않아 또다시 무슨 볼일이 있어 보였으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헬기에 대한 얘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만.”
박상태의 입에서 헬기라는 단어가 나오자, 말을 걸었던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또입니까? 방금 전에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말씀드렸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알아봐 달라는 요청을 하고 싶습니다.”
“왜죠?”
“방금 호텔에 들어간 구조대원으로부터, 그 안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무전이 왔습니다.”
남자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분명 아까는 별문제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수혁에게 첫 무전을 듣고 난 뒤, 박상태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호텔에 무단으로 진입한 대원이 한국 구조팀의 대원이라는 것을 알렸다.
그리고 수혁이 모든 요구조자를 안전하게 구조했다는 사실 역시.
‘안전하다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나?’
혹여나 수혁에게 불똥이 튈까 싶어 둘러대기 위해 덧붙였는데, 이제 와 그것이 박상태의 발목을 붙잡았다.
“상황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이런 현장에서는 더욱 그렇고.”
박상태는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했다.
이 안에 있는 인사들이 독일 내에서는 죄다 한 끗발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어차피 박상태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자신의 상관에게도 들이받을 판인데, 생판 관련도 없는 이에게 철판 깔고 우기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설마 부상자가 생겼습니까?”
남자의 말에 본부 안이 조용해졌다.
부상자라는 말에 신경이 쏠린 것이다.
“부, 부상자는 아닙니다만…….”
갑자기 자신에게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자, 박상태가 잠시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럼 뭡니까? 부상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당분간 안전이 보장되어 있는 상황에 대체 왜 그렇게 헬기 지원을 요청하는 겁니까?”
이들이라고 헬기를 보내고 싶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만약 헬기를 보내지 않아 호텔의 요구조자들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들로서도 큰 낭패였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에야 사람들은 희망적인 분위기를 위해 자신들을 추켜세우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이후에는 분명 바뀔 것이다.
제때 구하지 못해 목숨을 잃은 유가족들은 비난을 퍼부을 것이고, 구조 중 발생한 실수와 잘못을 빌미로 소송까지 걸릴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일부러 헬기를 보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박상태가 수혁에게 설명했다시피…….
헬기가 부족했다.
인근에 있는 소방 헬기들은 모조리 끌고 왔고, 외상 센터에서 운용하는 닥터 헬기들까지 운용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반쯤 마비되어 있는 교통이 뚫리지 않는 이상, 당분간은 이런 상황이 지속될 터.
호텔의 요구조자들에겐 미안하지만, 그때까지만 버텨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저분들이 저렇게 언성을 높이고 있는 이유가 뭔 줄 아십니까? 바로 헬기 때문입니다!”
박상태는 모르고 있었지만, 구조 팀장급으로 보이는 이와 말다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소방 항공대의 간부였다.
단 1초도 쉬지 못하고 계속해서 왕복해 요구조자들을 이송하는 바람에, 헬기 조종사들이 힘들어하고 있으니 잠시라도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증 외상자의 병원 이송을 전적으로 헬기에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는지라, 구조대 쪽에선 그것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었고.
“당신이 굳이 이렇게 나서지 않아도 저희는 지금 머리가 터질 지경입니다. 그러니 그만해 주시죠.”
남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더는 박상태의 말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박상태는 그냥 나갈 수 없었다.
헬기 지원은 요원해 보였지만, 그래도 정확한 상황은 전달해 줘야만 했다.
결정을 해도 그다음에 해야 했다.
“호텔에 붕괴 조짐이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했지만,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조금 전까지 말다툼하고 있던 구조 팀장이 박상태에게 물었다.
“호텔에 있는 대원으로부터 직접 들은 보고입니다. 호텔에서 붕괴가 일어날 조짐이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붕괴라니!”
그렇지 않아도 절반이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린 호텔이다.
남은 절반도 무너져 내린단 말인가?
“그 대원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팀장이 물었고, 박상태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한국 구조팀의 모든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김수혁 대원입니다.”
수혁의 이름이 나오자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저 사명감이 투철한 한국 구조팀의 대원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설마 수혁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수혁 씨의 모습이 얼마 전부터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음…….”
다른 사람의 보고라면 이렇게 놀랄 이유가 없었다.
그저 헛소리나 과대망상쯤으로 치부해 버리면 될 일이었으니까.
정 의심스럽다면 직접 조사를 하면 될 일이었고.
그런데 수혁의 말은 무게감이 달랐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이 있는 소방관을 뽑으라면 단연 수혁이 첫 번째였다.
미국의 일까지 꺼낼 필요도 없었다.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테러 현장에서의 수혁만 떠올려도 충분했으니까.
“대장님께 보고드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수혁의 동태에 보고했던 대원이 팀장에게 속삭였다.
그는 자신들의 대장인 마르코가 수혁과 함께 구조 활동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르코는 수혁이 부탁하는 일은 웬만하면 모두 들어주라는 명령도 내렸었다.
그러니 일단은 보고를 올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너는 바로 가서 보고해.”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대원이 곧장 본부를 빠져나가 마르코가 치료받고 있는 곳을 향했다.
“자세한 이야기가 듣고 싶소만?”
팀장이 박상태에게 다가왔다.
소방 항공대의 간부 역시 지금 한 말이 사실이냐는 듯 박상태를 쳐다봤다.
“더는 해드릴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저 역시 그놈에게 들은 건 그게 전부라.”
박상태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의도적으로 당장 무너지진 않을 것이란 수혁의 말은 뺐다.
조금이라도 저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기 위함이었다.
“확실한 보고입니까?”
팀장이 다시 한 번 물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의심이 서려 있었다.
그 역시 수혁이 뛰어난 소방관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인정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혁이 붕괴 위험을 경고했다고 해도, 그것을 곧이곧대로 모두 믿을 순 없는 일이었다.
수혁에게는 탐지를 위한 그 어떤 장비도 없었으니, 오직 육안으로만 보고 판단을 했다는 것인데…….
솔직히 신뢰도가 많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박상태는 팀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했다.
“그놈이 제멋대로 행동하고, 가끔 오늘처럼 사고도 치긴 하지만……. 지금까지 그놈이 허튼말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것은 확신이었다.
“확실하냐고 물으셨습니까? 예, 확실합니다. 수혁이가 붕괴될 것 같다고 보고했으니, 붕괴는 일어날 겁니다. 아니, 분명 일어납니다.”
팀장을 비롯해 구조 본부 안에 있는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박상태의 수혁을 향한 맹목적인 신뢰가 비상식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저런 신뢰를 받고 있는 수혁이라는 존재가 부럽기도 했다.
‘내 대원들도 저런 신뢰는 못 보내겠지.’
하늘 같은 팀장이라고는 하지만, 저 정도로 무한한 믿음을 받는 것은 무리였다.
“……일단 알겠습니다.”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상태가 저렇게 말을 할 정도면 고려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 여겼다.
그때, 마르코에게 보고하러 갔던 대원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대, 대장님이!”
얼마나 빨리 달린 건지, 대원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말했다.
“수, 수혁 씨의 요청, 은 전부 수용 하, 하라고……!”
팀장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조금 쉬도록.”
대원에게 휴식을 명한 팀장이 박상태를 쳐다봤다.
“논의가 조금 필요할 것 같군요.”
* * *
수혁은 요구조자들을 한쪽으로 모아 안심시킨 후, 모두 자리에 앉도록 했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했던 차에 수혁이 먼저 바닥에 주저앉자, 눈치를 보며 하나둘씩 앉기 시작했다.
다리가 편해지자 표정도 차츰 풀렸다.
“힘들어요?”
박수진이 수혁의 옆에 쪼그려 앉으며 물었다.
“그리 힘들진 않습니다.”
수혁이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수혁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마르코와 함께 구조 작업을 펼쳤고, 한국 구조팀이 온 후에는 곧장 호텔로 진입했다.
다른 사람들이었으면 진이 다 빠졌겠지만, 수혁은 아직 체력이 충분했다.
“저는 힘든데…….”
박수진이 자신의 다리를 두드리며 울상을 지었다.
수혁을 만나기 전까지 3층에서 연기 속을 기어 다녔던 게 꽤나 무리가 되었던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될 겁니다. 그날에 비하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수혁이 웃으며 말하자, 박수진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랑 비교가 되나요?”
지금은 빛도 있고,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도 없었다.
조금 배가 고프긴 했지만,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정도도 아니었고.
“그날만 생각하면 뭐든 다 할 수 있겠더라고요. 아무리 힘들어도 그때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요. 덕분에 의대까지 갔잖아요.”
박수진은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의대면 앞으로 어떤 쪽을 전공하고 싶으십니까?”
“글쎄요. 아직 그것까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일단 확실한 건 외과 쪽이에요.”
“외과? 그쪽 일은 힘들다고 들었는데.”
박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힘들겠죠. 그래도 하고 싶은 게 있거든요.”
수혁은 그게 뭐냐는 듯 쳐다봤다.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 한 건데.”
박수진이 조금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국경 없는 의사회요. 거기에 들어가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김수혁.]
박수진이 수줍게 말하고 있는데 무전이 울렸다.
“아, 잠시만.”
수혁은 그녀의 이야기를 나중에 듣기로 하고, 일단 무전기를 들었다.
“네, 형. 어떻게 됐어요?”
수혁이 급히 묻자, 무전기 너머에서 박상태의 밝은 음성이 들려왔다.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