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321화
수혁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호텔 건물 전체가 붉게 물드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붕괴.
가뜩이나 절반에 달하는 면적이 무너져 내린 상태다.
무너지지 않은 쪽의 구조물도 충격을 받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폭발 지점과 거리가 있어 다행히 곧바로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
‘괜찮다. 아직 시간은 있어.’
색은 옅었다.
아직 붕괴가 되기까지 시간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수혁은 표정을 풀며 최대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이곳에서 유일한 구조대원인 자신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면, 요구조자들 역시 불안해질 테니까.
“무슨 일 있어요?”
그때, 옆에서 박수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요, 별일 없습니다.”
수혁은 일단 발뺌했다.
하지만 박수진은 수혁에게서 뭔가를 느낀 모양이었다.
“별일 아닌 게 아닌 모양인데요?”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이었던 신일역 붕괴사고.
박수진은 그곳에서 수혁과 몇 날 며칠을 함께 싸운 경험이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그때의 경험은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박수진은 수혁에게서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수혁이 몇 번이고 보여주었던 모습이었다.
수혁은 마치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기 전부터 이런 분위기를 풍기곤 했다.
너무 오랜만 인지라 긴가민가했지만, 수혁이 고개를 젓는 모습을 보자 확신할 수 있었다.
‘뭔가 잘못됐구나!’
애써 담담하게 말하려는 수혁의 모습.
그것을 본 박수진은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레 수혁을 데리고 한쪽으로 이동했다.
“무슨 일인데요?”
“으음.”
수혁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아니라고 부정해 봐야, 박수진은 그 말을 믿을 것 같지 않았다.
그만큼 확신에 찬 눈동자로 수혁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눈치챈 건지…….’
그러고 보니 박수진은 예전에도 꽤나 눈치 빠르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민감했던 것 같았다.
수혁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방법을 생각하느니,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면 조금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수혁이 본 박수진은 경거망동할 사람이 아니었고, 의대에 들어갈 정도면 머리도 상당히 좋았다.
분명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호텔 건물이 조금 불안정합니다.”
수혁이 발을 들어 옥상 바닥을 툭- 치며 말했다.
“얼마나요?”
박수진은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하긴, 그런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는데 건물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도 이상했다.
“어쩌면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이번엔 표정의 변화가 생겼다.
붕괴, 매몰.
박수진은 이런 단어에 민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트라우마를 갖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까.
그 어둡고 숨조차 쉬기 어려운 곳에서 먹을 것도 없이 고작 물 몇 모금으로 며칠을 버텼다.
그러다 굶어 죽기 직전, 간신히 구조가 되었고.
아무리 잊으려고 애써 노력해 봐도 그날의 공포는 머릿속에 박혀 절대 잊히지 않았다.
박수진의 몸이 살짝 떨려왔다.
자신도 모르게 긴장과 두려움이 몰려왔던 것이다.
수혁은 그것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이 괜히 말을 꺼낸 게 아닌지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박수진은 심호흡을 몇 번 하곤, 평온한 신색을 되찾았다.
“시간은 얼마나 남은 것 같아요?”
놀라웠다.
트라우마는 결코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뉴욕의 구조대장인 톰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강인하고 경험이 많은 톰도, 911테러의 트라우마를 10년 동안 극복하지 못했다.
한국과는 달리 복지가 잘된 미국의 제도 덕분에 10년간 정기적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아왔음에도 말이다.
그런데 박수진은 특유의 긍정적인 성격 덕분인지, 그것을 이겨내고 있었다.
몸을 떠는 것으로 봐선 아직 완벽하진 않았지만,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나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
수혁은 왠지 박수진이 대견했다.
박수진을 향해 살짝 미소를 지은 수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발견했을 때보단 붉은 표시가 조금 짙어져 있었다.
하지만 변하는 속도는 느렸다.
“지금 당장 무너질 것 같지는 않군요.”
정확한 시간까지는 아직 예상할 수가 없었다.
‘한 시간? 두 시간?’
내심 그렇게 짐작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굳이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줘서 불안감을 주고 싶진 않았기에 돌려 말했다.
“음…….”
박수진은 수혁의 말에 잠시 생각에 빠졌다.
수혁 역시 방법을 찾기 위해 옥상 주변을 살펴봤다.
‘근접한 건물은 없고.’
예전에 한국에서 있었던 빌라 화재 현장을 떠올렸던 수혁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처럼 가까운 곳에 건물이 있었다면 건너가는 방법도 고려해 볼 만했을 텐데.’
일단 그 방법은 사용할 수 없었으니 머릿속에서 지웠다.
‘로프는?’
챙겨온 것이 있긴 했다.
간당간당하긴 하지만, 이 정도라면 2층 높이까진 닿을 수 있을 길이였다.
만약 아래쪽의 대원들과 공조할 수 있다면, 충분히 구조가 가능하겠지만…….
‘이 방법도 안 되겠군.’
아래쪽을 내려다본 수혁이 혀를 찼다.
1층과 2층은 그야말로 불바다였다.
이제는 3층까지 불이 옮겨붙고 있었다.
구조대원들이 진입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화재였으니, 만약 로프를 타고 내려간다면 그대로 바싹 구워질 게 뻔했다.
‘사다리차도 안 되고.’
방법이 없었다.
결국에는 소방 헬기가 답이었다.
‘문제는 헬기 지원이 가능하냐는 건데…….’
32명이나 되는 요구조자가 있으니, 요청하면 어떻게든 지원이 나올 것이다.
아니, 박상태에게 이야기를 해둔 상태였으니, 이미 논의 중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박상태에게 연락이 오지 않고 있었다.
‘지원이 오긴 할 거야.’
그런데 언제 올지는 알 수 없었다.
이미 요구조자들을 모두 발견해 옥상으로 데리고 올라왔다는 보고가 들어간 상태였다.
그렇다면 구조 본부에서는 조금 더 시간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요구조자들의 안전이 어느 정도 확보되었으니,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겠다는 생각을 할 터였다.
겉으로는 호텔의 남은 곳은 문제가 없어 보였으니까.
호텔이 붕괴될 것이란 사실을 아는 것은 오직 수혁과 박수진뿐이었다.
‘역시 헬기가 필요해.’
박상태에게 말을 해볼까 하다 관두었다.
분명 박상태는 수혁의 말을 믿어줄 것이다.
하지만 결정을 하는 구조본부의 사람들은 아니었다.
차라리 율리안이라도 있었다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았겠지만…….
‘지금은 없지.’
수혁은 율리안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태였기에,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다.
수혁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는지 떠올리려 애를 썼다.
“헬기는 어때요?”
그때 박수진이 언제 다가왔는지, 수혁의 옆에 서며 조용히 말했다.
“헬기?”
“네, 헬기요. 영화나 드라마 보면 헬기로 옥상에 있는 사람들 구조하고 그러던데. 그렇게 하면 되지 않아요?”
수혁이 살짝 웃었다.
박수진에게 뭔가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 역시 결국엔 헬기밖에는 떠올리지 못했다.
“그게 좋겠군요.”
수혁은 박수진이 의기소침해하지 않도록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박수진의 얼굴이 밝아졌다.
자신이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에 기쁜 것이다.
그 모습을 잠깐 쳐다보고 있던 수혁이 무전기를 들었다.
일단 어떤 상황인지 정확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상태 형,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요?”
수혁이 무전을 보내자, 잠시 후 박상태의 음성이 들려왔다.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다.]
박상태의 음성은 무거웠다.
이어지는 박상태의 설명을 들은 수혁 역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는 역시네.’
지금 구조 본부의 생각은 수혁이 예상했던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았다.
호텔에 있는 요구조자들이 당분간 안전할 것이란 판단을 했기에, 헬기를 보내는 시간을 조금 늦춘 것이었다.
예상한 일이긴 했지만, 수혁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만약 이곳이 정말로 안전하다면, 수혁 역시 그런 판단을 했을 것이다.
지금 역 쪽에는 1분 1초가 아까운 심각한 요구조자들이 즐비했으니까.
수혁은 잠시 고민하다 무전기에 대고 입을 열었다.
“상태 형, 여기 상황이 그리 좋진 않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요구조자들은 모두 발견했다며?]
“이 호텔, 붕괴 가능성이 있어요.”
너무 놀란 탓일까?
무전기 너머에서는 한참 동안이나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 당장 위험한 건 아니에요. 그런데 붕괴는 확실히 일어날 거예요. 그전에 여기서 빠져나가야 돼요.”
[……언제쯤 무너질 것 같으냐?]
박상태는 역시 수혁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수혁이 붕괴한다면, 정말로 붕괴한다.
그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박상태였다.
“정확하진 않지만, 빠르면 한 시간. 늦어도 두 시간 내에는 붕괴가 시작될 것 같은데…….”
애매한 시간이다.
[잠깐 기다려. 지금 내가 다시 본부로 가서 당장 헬기 띄우라고 말할 테니까.]
박상태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아무리 부상자들의 이송이 급하다고는 하지만, 호텔에는 수혁까지 포함해 총 33명의 사람이 있었다.
호텔이 무너지면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
“잠깐만요. 일단 흥분은 좀 가라앉혀요, 형.”
수혁은 그런 박상태를 말렸다.
“지금 가서 그렇게 얘기해 봐야 믿어줄 사람 아무도 없어요.”
이곳은 한국이 아니었다.
만약 한국이었다면, 박상태가 어떻게든 윽박을 질러서라도 헬기를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여기는 독일이다.
합당한 이유와 그 증거를 대지 못한다면,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럼 보고만 있으라고?]
“그런 말은 아니고요. 여기도 급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부상자들을 포기할 수도 없잖아요.”
헬기가 한 번 이곳으로 오면, 그 대가로 부상자 한 명의 목숨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32명이 죽는 것보다 한 명이 희생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말은, 수혁에겐 통하지 않았다.
수혁은 32명과 한 명, 둘 중 어느 쪽에도 더 무게를 두지 않고 똑같이 구하고 싶었으니까.
수혁은 말을 하며 고개를 위로 들었다.
어두워진 밤하늘에는 조명을 밝게 비추고 있는 헬기들이 여러 대 떠 있었다.
바로 구조 현장을 촬영하고 있는 방송국 헬기들이었다.
그중에는 수혁이 있는 옥상 위를 맴도는 헬기도 있었다.
“상태 형, 소방 헬기 말고, 일반 헬기에도 바스켓 착용이 가능하던가요?”
일반 헬기와 소방 헬기는 근본적인 구조는 같아도, 차별점이 있었다.
블레이드의 형태와 출력도 달랐기에, 안정성 면에선 소방 헬기가 훨씬 뛰어났다.
그런데 일반 헬기에 구조용 바스켓을 장착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가능은 할 거다. 하지만…….]
소방 헬기에 장착하는 것만큼 커다란 것은 불가능했다.
무게도 무게였지만, 그것을 매달고는 안전하게 운행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큰 게 필요한 것도 아니에요. 10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그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박상태의 긍정적인 대답에 수혁이 입을 열었다.
“그럼 방법이 좀 있을 수도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