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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큐 시스템-319화 (319/425)

레스큐 시스템 319화

“이, 이게 무슨 일이지?”

박수진은 울려대는 머리를 붙잡으며 눈을 떴다.

“으윽!”

두통에 절로 신음이 흘러 나왔다.

마치 누군가 귀 옆에서 수백 개의 종을 동시에 울려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왜?

분명 자신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들뜬 기분으로 호텔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의 해외여행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남자친구와 같이 왔으면 더 좋았겠지만, 혼자서도 상관없었다.

의사가 되기 위해 머리가 터지도록 공부했던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차라리 혼자서 이렇게 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옷을 다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어.”

돌아다니기 편한 복장으로 방을 빠져나온 박수진은 방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엄청난 굉음을 들었다.

그것도 굉장히 가까운 곳에서 들린 소리였다.

깜짝 놀란 박수진은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있는 커다란 통창을 통해 밖을 확인한 박수진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자신이 향하려고 했던 베를린 중앙역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으니까.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은 거대한 흙먼지와 타오르는 화염, 사람들의 비명소리였다.

본능적으로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침을 삼키며 몸을 돌렸다.

아직 의사가 아닌 의대생에 불과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든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아무런 도움도 될 수가 없었다.

방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폭발음이 터졌다.

세상이 멸망하는 것 같은 충격과 함께 호텔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박수진은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맞아! 폭발!”

박수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현기증이 일어나며 잠시 휘청거렸지만, 금세 균형을 찾은 그녀는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지진인가? 아니면 테러?’

박수진은 자신도 모르게 테러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당연히 가스 폭발이나 다른 사고들을 떠올렸겠지만, 얼마 전까지 수혁의 기사들을 봐왔기 때문에 자연스레 떠오른 것이다.

‘뭐가 어찌 됐든 일단 여길 빠져나가야 해.’

자신이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온몸이 찌뿌둥한 것으로 봐선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닌 듯했다.

‘한 시간? 두 시간?’

어쩌면 그보다 길 수도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박수진은 창문 쪽으로 다가가려다 멈칫했다.

폭발의 충격에 창문이 모조리 깨져 있었다.

6층 객실에 머물고 있었던 박수진은 뻥 뚫린 창가로 다가갈 용기가 선뜻 나질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확인하지 않을 수도 없었기에, 박수진은 심호흡하며 천천히 창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확인할 수 있었다.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검은 연기와 뜨거운 열기를.

‘화재야!’

가스가 폭발했든, 지진이 일어났든, 아니면 정말로 테러가 일어났든!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이 호텔에 불이 났다는 것이었다.

6층에 있는 자신에게까지 후끈한 열기가 느껴질 정도면 절대 작은 불은 아니었다.

“빠져나가야 돼.”

불길이 더 번지기 전에 서둘러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시간이 지체된다면 아래로 향하는 모든 길이 불로 막힐 수도 있었다.

박수진은 재빨리 필요한 것들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는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투숙객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열 명이 조금 넘는 수의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며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박수진은 비상계단 쪽으로 향하다 멈칫- 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몸을 돌려 입을 열었다.

“혹시 영어 가능하신 분 계신가요?”

박수진이 말했지만, 그것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혹시 영어 가능하신 분 계시냐고요!”

다시 한 번 박수진이 크게 소리치자, 몇 명이 돌아봤다.

“조금 할 줄 압니다.”

“미국인이에요.”

그러곤 작게 손을 들며 자신들이 영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럼 통역 좀 부탁드려요. 지금 아래쪽에서 화재가 일어났어요. 그러니 당장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고요.”

박수진의 말에 그것을 알아들은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불이 났단 말입니까? 대체 왜?”

당황하며 박수진에게 물었지만, 그녀라고 해서 이유를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살고 싶으면 지금 당장 아래로 내려가야…….”

박수진이 빠르게 말을 하자, 몇 명이 빠르게 독일어로 이 상황을 설명했다.

다행히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없었기에, 이 층에 있는 투숙객들은 모두 현 상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상황을 알았다고 해서, 모두 같은 뜻을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우린 여기에서 구조대를 기다리고 있겠어요. 괜히 함부로 움직이는 건 좋은 생각 같지 않네요.”

몇 명.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여덟 명의 사람이 박수진과 함께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거부했다.

박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구조대가 올 때까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더 옳은 방법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박수진은 불안했다.

‘보통 폭발이 아니었어.’

단순한 가스 폭발로 6층에 있던 자신이 정신을 잃을 정도의 충격을 받는다?

물론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박수진은 정신을 잃기 전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역이 무너져 내렸지.’

바로 근처에 있는 베를린 중앙역이 폭발과 함께 무너졌다.

그것을 생각해 보면, 이 호텔 역시 안전하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여기도 무너질지 몰라.’

마치 지진이 온 것처럼 온 건물이 흔들리고,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폭음이 들렸다.

박수진은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와 같은 경험은 다신 하고 싶지 않아!’

신일역 붕괴사고.

그때는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음에도, 박수진과 몇몇 사람들은 생존했다.

그것은 오롯이 수혁이라는 존재 덕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혁도 없다.

수혁도 독일에 있다는 것은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그곳은 베를린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한창 구조에 열중하고 있었으니,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지금 수혁을 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수혁을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위험하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었다.

박수진은 다시 한 번 사람들을 설득해 보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움직이는 것을 거부했다.

더는 설득할 말도, 자신도 없었기에 박수진은 그들을 두고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소방관인 것도 아니니까.’

결국 박수진을 따르기로 한 사람은 세 명이 전부였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세 사람은 모두 혼자서 여행 온 배낭여행객들인 것 같았다.

박수진은 그들을 데리고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층, 한층 내려가던 박수진은 무너진 계단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하죠?”

사람들이 박수진에게 물었다.

고작 스물두 살.

저들은 최소한 이십대 중반에서 후반이었음에도, 가장 어린 박수진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내가 데리고 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박수진은 잠시 고민하다 굳게 닫혀 있는 문을 쳐다봤다.

“다른 쪽에도 계단이 있겠죠?”

이 호텔의 규모는 상당하다.

비상계단이 이곳 하나만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3층 정도면 로비에 있던 중앙 계단과도 연결이 되어 있었다.

“그곳으로 가죠.”

이 계단으로 갈 수 없다면, 다른 계단으로 가면 된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자, 박수진은 문을 열었다.

그러자 검은 연기가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박수진은 급히 문을 닫았다.

불길은 보이지 않았지만, 저 연기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이 되었다.

“4층으로 가요.”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냥 내려갈 순 없었기에, 박수진은 일단 한층 위로 올라갔다.

4층 역시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것이 보였다.

박수진은 그들을 진정시키는 대신, 열려 있는 객실을 찾아 그곳으로 들어갔다.

“수건에 물을 충분히 적셔요.”

이거라면 연기에 어느 정도 대응을 할 수 있었다.

혹시 몰라 냉장고를 뒤져 생수통을 몇 개 챙겨 들었다.

그러곤 밖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6층에서와 같이 소리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 한 명도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 아래쪽은 지금 연기로 가득해요! 그런 곳을 어떻게 뚫고 내려간단 말이에요?”

“수건에 물을 적셔서 코와 입을 막으면 가능해요!”

박수진이 손에 들려 있는 수건을 보여주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결국 박수진은 자신과 함께 내려온 세 명만 데리고 아래로 내려갔다.

“자세를 낮추고 천천히 이동해야 해요. 제 뒤를 따라오세요.”

수건으로 호흡기를 가린 뒤, 박수진이 앞장을 섰다.

‘그때의 경험이 도움이 될 줄이야.’

박수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상황이 급박하고 위험하긴 했지만, 솔직히 그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빛 한 점 없는 곳에서, 몇 날 며칠을 물 몇 모금으로 버텼다.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도 없어 직접 손으로 길을 팠으며, 몇 번이나 쏟아지는 잔해들에 깔려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그리고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이젠 죽음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구조되었다.

그야말로 극한의 상황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이건 애들 장난이야.’

박수진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앞으로 기었다.

물에 젖은 수건으로 인해 호흡이 원활하지가 않았다.

숨이 턱까지 타오르고 무릎과 팔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박수진은 그때를 떠올리며 꿋꿋하게 앞으로 향했다.

‘한 층만 더 내려가면 돼. 한 층만.’

2층 정도라면 창문에서 뛰어내려도 상관없는 높이였다.

화재가 심하다고는 하지만 밖에는 소방관들이 있었으니, 뛰어내리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해줄 것이다.

박수진은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박수진의 뒤를 따라온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이렇게 힘들게 고생할 바에는 그냥 남아 있을걸.’

후회라는 감정이 들기 시작하자, 당장에라도 몸을 돌려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 마음은 빠르게 체력을 갉아먹기 시작했고, 이내 불만으로 터져 나왔다.

“돌아갑시다.”

“뭐라고요?”

뒤에서 들려온 말에 박수진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냥 돌아가자고 말했습니다. 이건 미친 짓이에요.”

사람들은 이미 돌아가겠다는 마음을 굳힌 듯했다.

박수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3층 가득 연기가 들어찼다.

그 연기는 이내 위쪽으로 향할 것이다.

3층을 넘어 4층, 5층, 그리고 6층까지.

그때가 되면 늦는다.

아직까지 구조대가 투입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봐선 무슨 문제가 있는 게 확실했다.

가만히 앉아서 오지 않는 구조대를 기다리고 있다간, 정말로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박수진이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정지! 멈추세요!”

“엄마야!”

갑자기 들려온 외침에 박수진이 화들짝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한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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