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316화
키잉-!
수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귀를 찢는 듯한 이명과 함께, 방금 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광고판과 그 아래쪽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 것이다.
‘광고판이 부서진다.’
육안으로 볼 땐 아직까진 문제가 없었지만, ‘위기감지Ⅲ’가 발동한 이상 곧 이상이 생길 게 확실했다.
수혁은 생각할 것도 없이 팔에 힘을 주었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광고판의 철골이 우그러들었다.
동시에 수혁이 팔을 위로 들어올렸다.
‘젠장, 늦었나?’
수혁이 속으로 혀를 찼다.
광고판은 수혁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공중에 뜨기 시작했지만, 약해진 중간 부분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아래쪽에 있던 마르코가 그것을 발견하곤 눈을 부릅뜨는 것이 보였다.
갈라진 광고판 사이로, 잔해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그것들이 쏟아진다고 해도 조금 아프고 말 정도의 양에 불과했다.
기껏해야 찰과상이나 입을까?
하지만 지금 이 아래에 있는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폭발에 휩쓸린 데다, 무너지는 건물 아래 깔려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부상이 그리 심하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지금껏 수혁이 구조한 이들에 비해 양호하다뿐이지, 결코 안심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만약 그들에게 잔해들이 쏟아져 내린다면?
모르긴 몰라도 단순한 찰과상으로 끝나진 않을 것이다.
수혁은 앞뒤 재지 않고 온 힘을 다했다.
그러자 광고판은 수혁의 손에 의해 그야말로 종잇조각처럼 허공을 날아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절반에 불과했다.
남은 절반은 그대로 잔해들과 함께 요구조자들의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그때,
마르코가 움직였다.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기에는 너무도 많은 나이.
늙어버린 몸으로 수혁의 보조를 맞추느라 지칠 대로 지쳐 버린 체력.
단순히 걷는 것만으로도 뼈마디가 시려 오던 마르코가 그대로 몸을 던져 요구조자 두 명의 위를 덮었다.
와르르르-!
동시에 잔해들이 마르코의 위로 쏟아졌다.
“이런!”
“대장님!”
그것을 본 주변의 대원들이 경악성을 내뱉었다.
처음엔 수혁의 행동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파손된 데다 절반이 뚝 끊어졌다고는 하지만, 광고판을 무슨 장난감처럼 집어 던지는 광경이 상식적이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후, 대원들은 그딴 것엔 신경도 쓸 수가 없었다.
아래쪽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베를린 중앙청 소속 특수 구조대의 대장이자 이 현장의 최고 지휘자.
당연히 구조본부에서 상황을 보고받고 지시를 내리고 있어야 할 그가 왜 저곳에 왜 저곳에 있단 말인가?
그것도 떨어지는 잔해 아래에서!
당연히 놀라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순간 그들의 머릿속에는 큰일 났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최고 지휘자가 현장에서 사고를 당했다.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는 알지 못했지만, 사고가 났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문제가 되고도 남았다.
소방관들은 눈앞에 깜깜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 굳어졌다.
단 한 사람만 빼고 말이다.
‘괜찮을 거야.’
수혁이었다.
수혁은 마르코의 육체를 떠올렸다.
나이가 들어 다른 소방관들과 비교해 체력이 부족하긴 했지만, 그의 육체만큼은 그 누구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건장했다.
그라면 저 정도로 큰일이 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수혁은 재빨리 움직여 잔해들을 치워내기 시작했다.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는지라, 마르코의 등을 발견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아직 제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대부분의 잔해를 치워냈다.
“괜찮으십니까?”
그러곤 다급히 마르코의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끄응, 괜찮네.”
다행히 마르코에겐 의식이 있었다.
하지만 괜찮다는 말과는 달리, 그의 머리에선 출혈이 있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큰 출혈은 아니었지만, 출혈 부위가 머리였는지라 수혁은 일단 마르코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렇게 하지.”
마르코 역시 그간의 경험을 통해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를 조심스럽게 들어 한쪽에 바르게 눕힌 수혁은 다음으로 요구조자들을 확인했다.
‘……다행이군.’
마르코가 급히 그들을 보호한 덕분일까?
요구조자들은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수혁이 고개를 들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마르코가 부상을 입은 이상,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런 수혁의 모습을 본 대원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대, 대장님!”
그러곤 다급히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요구조자 두 명이 우선입니다. 일단 그분들부터 옮겨주세요.”
수혁은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우선순위를 정해주며 명령을 내렸다.
“당신 뭐야!”
마르코의 부상으로 잠시 흥분한 누군가가 수혁에게 반발했다.
처음 보는 제복을 입고 있는 동양인의 명령을 들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잡소리하지 말고, 그의 명령에 따라라.”
마르코가 질책한 것이다.
“대장님?”
“아니,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다들 말만 하지 않았을 뿐, 수혁의 명령에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한국에서 온 김수혁 대원이다.”
“김수혁?”
“한국?”
그 한마디의 말만으로 그들은 수혁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말이 내 명령이라 생각하고 따르도록.”
마르코가 힘없는 음성으로 다시 한 번 당부했다.
“아, 알겠습니다.”
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조대장인 마르코의 명령을 무시할 수도 없을뿐더러, 수혁이란 이름은 이제 독일에서도 그 영향력이 드높았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자, 수혁은 다시 한 번 지시를 내렸다.
“요구조자들 먼저 이송하시고, 구급대원들을 이쪽으로 불러주세요.”
이번엔 아무런 반발도 없었다.
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들것을 가져와 요구조자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겼고, 구급대원을 바로 불러 마르코의 상세를 살피게 했다.
“잠시나마 도움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지금은 좀 쉬시고 저는 다시 움직여야겠습니다.”
“혼자 할 수 있겠나?”
수혁의 운동량이 얼마나 엄청난지는 바로 옆에서 본 자신이 잘 알았다.
율리안을 이겼다더니, 과연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의 힘과 체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는 있다.
혼자서 계속 구조를 하다간 분명 체력이 바닥나고 말 것이다.
누군가 옆에서 도움을 준다면, 훨씬 더 효율적인 구조를 할 수가 있었다.
“내가 몇 명을 붙여주지. 그들과 함께 움직이면 조금 나을 걸세.”
마르코가 자신의 부하 중 몇 명을 붙여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수혁은 고개를 저으며 그것을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마르코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수혁이 자신의 힘을 과하게 믿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네가 범상치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네만, 혼자선 한계가 있어. 내 말대로 하는 게 나을 걸세.”
“정말로 괜찮습니다.”
이번에도 수혁은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는 이유가 뭔가? 혹시 내 부하들이 못 미더워 그러는 건가?”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그저…….”
수혁이 웃으며 한쪽을 쳐다봤다.
수혁의 미소를 처음 본 마르코가 의아함을 느끼며 눈동자를 돌렸다.
대체 무엇을 보기에 저런 표정을 짓는지 확인을 하고 싶었다.
그때 수혁의 입이 열렸다.
“제 동료들이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수혁의 시선이 닿은 곳.
그곳에선 수혁과 똑같은 제복을 입고 있는 동양인 소방관 수십 명이 현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 *
“난리도 아니구만.”
박상태는 현장을 둘러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이전의 테러 현장도 아수라장이었지만, 여기도 그에 못지않게 참혹했다.
아니, 그보다 심했다.
테러가 일어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았기에 훨씬 더 혼란스럽고 급박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수혁은 어디 있습니까?”
그런 박상태의 뒤로 팀장들이 다가오며 물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일단 그놈을 찾아야 구조를 시작할 텐데 말입니다.”
박상태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이곳에 있는 소방관들만 수백 명에 달한다.
완전히 무너져 내린 중앙역 건물 위로는 인명 탐색 견과 소방관들이 쉴 새 없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한쪽에는 부상자와 시체들을 옮기는 이들로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상황에 수혁 한 명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원 몇 명을 뽑아서 수혁을 찾고, 저희는 이곳의 책임자를 먼저 만나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장 현장에 뛰어들어 구조 작업을 하고 싶었지만, 절차라는 게 있는 법이다.
아무렇게나 수십 명이나 되는 인원이 들어가서 마음대로 움직일 순 없었다.
게다가 최소한의 장비라도 저들에게 빌려야 했으니, 함부로 나설 순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하시죠.”
팀장들은 박상태의 말에 동의했다.
“상태 형!”
박상태와 팀장들이 서로 역할을 나누며 이동하려던 찰나, 수혁의 음성이 들려왔다.
박상태가 음성이 들리는 곳을 향해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김수혁!”
수혁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고작 30분.
수혁이 홀로 버스를 나가 현장으로 달려간 것이 고작 30분 전이다.
이동하는데 걸렸을 시간까지 생각하면, 수혁이 구조를 시작한 건 10분 남짓.
그런데 그 10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수혁은 온몸에 흙먼지가 가득했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하셨네요.”
순식간에 박상태의 앞에 도착한 수혁이 작게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사람 좀 구했냐?”
박상태는 수혁의 모습을 보곤 조심스럽게 물었다.
10분 만에 옷이 저 꼴로 변했을 정도면 엄청나게 움직였을 터였다.
그런 만큼 성과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몇 명 정도 구조했어요. 아쉽게 놓친 분들도 있지만…….”
수혁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수고했다.”
박상태가 고개를 주억이며 수혁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에요.”
한가로이 대화나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 우리도 움직여야지. 하지만 그전에 일단 이곳의 책임자와 조율을 좀 해야…….”
“그건 이미 끝내놨어요.”
“뭐?”
수혁의 성격이라면 일단 모든 것에 우선해 사람들부터 구하러 달려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이미 얘기를 끝냈다고?
“우연히 이 현장의 책임자인 구조대장을 만나서 같이 움직였거든요. 조금 전에 대략적인 논의는 끝마친 상태예요.”
수혁은 박상태와 한국 구조팀을 보자마자 마르코에게 자신들의 상황을 설명했다.
박상태에게는 논의라고 말했지만, 사실 마르코에게 일방적인 통보를 한 것과 다름없었다.
다행히 마르코는 수혁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장비들은 구조 본부에서 지급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신다고 했어요. 거기에서 장비들 챙기고 구조 시작하면 돼요.”
수혁의 말에 박상태는 대원들을 구조 본부로 보내 장비를 챙겨오도록 명령했다.
“팀장님들은 잠시 모여주세요.”
이제 한국 구조팀의 최고 지휘자는 바로 수혁이었다.
앞으로 이들의 모든 행동은 수혁의 지시에 따라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구조 지역부터 구조 방법까지 모두.
그리고 수혁은 이 현장에 있는 그 어떤 소방관들보다 정확하게 요구조자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 지도를 봐주세요.”
수혁이 품에서 지도를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