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313화
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그간 항상 사람들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던 수혁이다.
그랬던 그가 어리긴 하지만 선배인 백진호에게 욕을 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너, 너…….”
“대가리가 깨지고 싶은가 보군.”
수혁의 말은 그냥 허세가 아니었다.
정말로 백진호의 머리를 깨진 않더라도, 주먹 한 방 정도는 먹일 생각이었다.
수혁이 싸늘하게 얼어붙은 표정으로 백진호를 향해 다가가려고 하자, 박상태가 팔을 붙잡았다.
“관둬라.”
백진호를 날려 버리면 속이 시원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나중에 귀국하면 분명 문제를 삼을 수도 있었으니, 참아야만 했다.
수혁은 잠시 고민하다 박상태의 말을 듣기로 했다.
지금은 주먹 한 방 날릴 시간도 아까웠다.
“이야기 들으셨으면 이제 베를린으로 갈 준비를 하셨으면 합니다만.”
박상태가 자신과 말다툼을 하던 팀장을 쳐다봤다.
“아직 승인이 난 것은 아니지.”
하지만 그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면서도 수혁의 눈치를 슬쩍 보는 것이 그도 겁을 집어먹긴 한 것 같았다.
그저 자존심 때문에 뜻을 굽히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수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안 가시겠다는 겁니까?”
“승인이 나면 그때 움직일 거다.”
“그렇게 늦은 시간만큼,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명령이 없으면 우리끼리 움직일 수 없다.”
그는 정말로 승인이 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하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지금 이곳에도 요구조자가 넘치도록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십니까?”
수혁이 돌아보며 다른 팀장들을 쳐다봤다.
그러자 박상태의 눈치를 보고 있던 몇몇 팀장들이 앞으로 나섰다.
“일단 준비해 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승인이 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놀랍게도 대다수의 팀장들이 그 말에 동조했다.
박상태와 친분이 있는 이들도 많았던 데다, 수혁을 좋게 보고 있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수혁이 허튼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수혁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아, 짐은 굳이 챙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꼭 필요한 것들만 준비해서 이동하시면, 후에 숙소 측에서 챙겨서 보내줄 겁니다.”
그 정도는 율리안이 해결해 줄 수 있었다.
“그거 다행이군.”
그렇게만 되면 만약 승인이 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 손해 볼 것은 없었으니까.
그냥 해프닝 정도로 취급해도 될 정도였다.
“10분 후에 로비에서 보도록 하지.”
팀장들이 자신의 대원들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남은 것은 수혁과 박상태, 그리고 백진호와 말다툼하던 팀장 한 명뿐이었다.
팀장의 팀원들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것이다.
네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수혁에게 겁을 집어먹은 백진호는 자리를 피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자존심 때문에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후배인 수혁에게 대가리가 깨진다느니 하는 말을 들었는데, 그냥 갔다간 다른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살 게 분명했다.
“우리도 가자.”
박상태는 더 이상의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수혁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후회할 거다.”
팀장은 수혁과 박상태를 향해 그렇게 말을 했다.
“저희가 왜 후회를 합니까?”
박상태를 따라가려던 수혁이 움직임을 멈추고 물었다.
“몰라서 묻나?”
“예. 몰라서 묻습니다.”
“허, 참!”
그는 수혁의 당돌한 대답에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행동하는 게, 당신들 눈에는 그렇게 한심해 보입니까?”
“뭐라고?”
팀장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 역시 평생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헌신해 온 소방관이었다.
지금은 의견이 맞지 않아 이러고 있었지만, 그도 자신의 직업에 대해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새파란 후배가 그것을 깎아내리고 있었다.
“나는 명령 체계를 지키고 싶은 거다. 정당한 명령도 없이 네 마음대로 행동할 거면 계급이 왜 필요하고, 명령 체계가 왜 필요해!”
“웃기지 마십쇼. 당신들이 하는 행동은 그냥 단순히 자존심을 굽히기 싫어서 그런 것뿐입니다.”
수혁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가요. 더는 상종하고 싶지도 않네요.”
박상태에게 그렇게 말을 하고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진심으로 더 말을 섞었다가는 귀가 썩을 것만 같았다.
“멈춰, 이 새끼야! 감히 네까짓 놈이 뭐라고, 당신? 너 제정신이야!”
팀장이 수혁을 향해 분노를 터트렸다.
하지만 수혁과 박상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그들도 빨리 필요한 것들을 챙겨 베를린으로 향할 준비를 해야만 했다.
“멈추라고!”
분노한 팀장이 달려와 수혁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띵-!
엘리베이터가 멈추며 문이 열렸다.
“어, 수혁 씨! 여기 계셨군요!”
엘리베이터 안에는 이홍관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찾고 있었습…….”
다급히 수혁에게 다가오던 이홍관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잘 왔습니다, 홍관 씨.”
그를 먼저 반긴 것은 수혁이 아니었다.
바로 수혁의 어깨를 붙잡으며 소리친 팀장이었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수혁을 가리켰다.
“홍관 씨가 저희 대장은 아니지만, 이번 지원팀의 책임자인 것은 맞죠?”
“아, 네. 그렇습니다만.”
“지금부터 이 싸가지 없는 새끼를 지원팀에서 배제해 주시죠.”
“네?”
이홍관이 눈을 크게 뜨며 수혁을 쳐다봤다.
“상급자의 명령도 개무시하고 지 마음대로 행동하는 대원은 필요 없습니다. 이런 새끼 하나 때문에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 정식으로 건의 드리는 겁니다.”
“그, 그게…….”
이홍관이 난색을 표하며 수혁을 쳐다봤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뒷말이 나오면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운이 좋아서 영웅 소리 몇 번 듣더니 선배가 아주 우습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팀장은 이홍관이 자신의 말대로 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듯했다.
아무리 수혁이 유명인이고 영향력이 크다고는 하지만, 현장에서 팀장의 권한은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홍관은 팀장의 말을 별로 귀담아듣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수혁의 눈치를 더 보는 모습이었다.
‘……뭐지?’
지금 이 상황에서 이홍관은 자신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그것이 이홍관의 역할이었으니까.
지원팀 내부의 마찰을 중재하는 것이 이홍관이 맡은 업무 중 하나가 아니던가?
당연히 팀장인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고 수혁에게 사과하라고 해야만 하는 상황에, 오히려 수혁의 눈치를 보고 있다니?
“저, 수혁 씨, 한국과 연락했습니다.”
“어떻게 됐죠?”
팀장은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수혁에게 말을 거는 이홍관의 모습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승인이 났습니다.”
“뭐라고!”
이홍관의 말에 팀장이 흥분하며 소리를 질렀다.
“지금 한국에서 승인이 됐단 말입니까?”
팀장이 물었지만, 이홍관은 슥- 한번 그를 쳐다볼 뿐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다행이네요.”
수혁은 고맙다는 듯 이홍관을 향해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이홍관이 손을 내저었다.
“저야 수혁 씨가 시킨 대로 했을 뿐인데요, 뭘.”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처음엔 한국에서도 난색을 표했다.
쉽사리 결정할 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혁이 말을 했던 행안부 장관과 재정부 장관의 이름을 팔았더니, 일이 순식간에 진행되며 바로 승인이 떨어진 것이다.
“그럼 이제 시간 낭비할 것 없이 베를린으로 떠나면 되겠군요.”
“아, 그전에 하나 더요.”
이홍관은 한국 구조팀의 베를린 지원 승인보다, 지금부터 할 말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하실 말씀이 또 있습니까?”
“행안부 장관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이 시간부로 한국 구조팀의 지휘권은 수혁 씨에게 있습니다.”
“……어?”
백진호가 멍청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것에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모두가 충격을 받았으니까.
심지어 박상태마저도.
“알겠습니다. 지금 현 시간부로 지휘권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오직 수혁만이 이렇게 될 것이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
“상태 형, 앞으로 5분 내에 모든 대원을 집합시켜 주세요.”
“그, 그래.”
“명령을 어기는 분들은 명령 불복종으로 귀국 후에 상응하는 불이익을 받게 될 거라는 것도 알려주시고요.”
시선은 박상태를 향하고 있었지만, 그 말은 팀장과 백진호에게 한 것이었다.
수혁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뭐 합니까? 안 움직여요?”
수혁이 뒤를 돌아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러자 백진호가 후다닥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이제부터 수혁은 그냥 후배가 아니었다.
최소한 독일에서만큼은, 수혁은 구조대장이었다.
무려 80명의 구조대원을 이끄는 구조대장.
행안부 장관이 직접 내린 임명이었으니, 수혁의 말대로 명령을 어겼다가 무슨 불이익을 받게 될지 몰랐다.
‘최소한 감봉이야.’
어쩌면 그보다 더 심한 징계가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 자존심 따위는 집어 던지고 꽁지에 불이 붙은 듯 달릴 수밖에 없었다.
박상태도 수혁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은 것은 수혁과 팀장, 그리고 이홍관뿐이었다.
“명령 불복종입니까?”
수혁의 담담한 말에, 팀장이 이를 갈았다.
“……준비하마.”
하지만 결국 그도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더는 선배나 팀장의 권위로 수혁을 짓누를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빨리 움직이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지.”
팀장은 수혁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 몸을 돌렸다.
그러자 수혁은 그에게 관심을 끊고는 이홍관을 쳐다봤다.
이홍관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홍관 씨, 율리안이 베를린으로 향하는 차편을 준비해 줄 겁니다. 그것 좀 확인해 주시겠어요?”
“아, 네. 알겠습니다.”
“최대한 서둘러서 준비해 준다고 했으니, 아마 저희가 타고 다니던 버스를 그대로 사용하게 해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간단했다.
“지금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홍관은 고개를 끄덕이곤 스마트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후우.”
수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테러 소식을 들은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쳐서 쉬고 싶을 정도였다.
그만큼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했다.
‘그래도…….’
원하던 것은 모두 가졌다.
베를린 지원 승인과 지휘권.
아직 부족하긴 했지만, 최소한의 조건은 갖춰졌다.
이젠 1초라도 빨리 베를린에 도착해서 사람들을 구하는 일만 남았다.
‘부디 피해가 크지 않길…….’
수혁은 속으로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