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297화
‘하필이면…….’
수혁은 박상태가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들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 이곳에서 수혁과 비슷한 또래인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이름이 뭐였더라? 아, 그래. 백진호. 이 녀석이야.”
박상태가 종이에 적혀 있는 이름 중 하나를 가리켰다.
‘백진호라.’
예상은 했지만 들어본 적은 없는 이름이었다.
얼굴도 처음 봤으니 이름이라고 들어봤을 리가 없었다.
“꽤 괜찮은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들었다. 나름대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애고.”
의미가 없었다.
아무리 실력이 좋고 뛰어나면 뭐할까?
성격에 문제가 있는데.
하지만 수혁은 내색하지 않았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마당에 팀장인 박상태에게 선입관을 심어주고 싶진 않았다.
만약 그랬다간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물론 그와 별개로 수혁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다른 대원들도 괜찮다. 나도 이 두 명은 안면이 있는데 실력도 좋고, 성격도 나쁘지 않아.”
수혁은 박상태가 가리킨 두 사람의 이름을 확인했다.
전진형, 현명환.
두 사람 모두 삼십대 중반의 꽤나 경력이 풍부한 대원들이었다.
특히 현명환은 특수 구조대 소속으로 실력이 좋다고 소문이 난 구조대원이었다.
“다른 한 명은요?”
“양희성. 걔는 잘 모르겠다. 다른 팀장들도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
수혁과 박상태를 포함해 총 여섯 명의 팀원을 모두 확인한 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한 명 끼어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나쁘지 않은 구성인 것 같았다.
“우리끼리만 돌아다니는 건 아니죠?”
한국이라면 모를까, 현장은 독일이었다.
“현장에선 독일 애들이랑 같이 다닐 거다. 그렇지 않아도 인력이 부족하다니 한 팀이 전부 붙는 것은 무리일 테고, 아마 한두 명 정도 붙겠지.”
그 정도면 충분하다.
많은 도움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의 행동 조율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통역도.
“이제 탑승 시작하겠습니다!”
어디선가 이홍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자.”
마침내 출발이었다.
“어으, 죽겠다.”
비행기에서 내린 박상태는 피곤이 가득한 얼굴로 기지개를 켰다.
열두 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을 했으니, 그 피로감이야 오죽할까?
항공사 측에서 최대한 편의를 봐주었지만, 그렇다 해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넌 괜찮냐?”
“저는 뭐…….”
박상태의 물음에 수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수혁도 피곤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것은 정신적인 문제일 뿐 체력은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오늘부터 바로 투입이에요?”
“아니, 일단은 숙소로 가서 휴식부터. 이런 상태로 현장에 나가봐야 사고만 나지.”
시차 적응도 되지 않았고, 피곤에 찌든 상태로 그 위험한 현장에서 구조 작업을 한다고 도움이 되진 않는다.
차라리 푹 쉰 다음 컨디션을 회복하고 난 후에 투입되는 쪽이 훨씬 좋았다.
“그럼 숙소는 어디예요?”
“그건 독일 측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다고 합니다.”
언제 온 것인지, 이홍관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리 대단한 숙소는 아니겠지만, 제가 듣기로는 그래도 신경을 많이 써주었다고 하더군요.”
자신들이 직접 부탁해서 온 한국 구조대다.
융숭한 대접은 못 해줄망정 푸대접은 하지 못할 것이다.
수혁과 박상태는 딱히 숙소를 가리는 타입도 아니었고, 그저 누워서 잠만 잘 수 있으면 충분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국 심사도 최대한 간소화했습니다.”
“그것도 다행이군.”
박상태의 얼굴이 환해졌다.
잔뜩 지친 이 상황에 입국 심사로 시간이 지체되면, 그보다 힘든 일도 없었다.
수혁은 이홍관의 말대로 순식간에 입국 심사를 마치고는 짐을 찾아 공항 밖으로 빠져나왔다.
“김수혁 교관님!”
이홍관의 인솔하에 다른 대원들과 함께 이동하던 중,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교관?’
수혁을 교관이라고 부를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그리고 저 목소리는 수혁의 기억에 똑똑히 남아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슈미츠.”
그는 바로 슈미츠였다.
슈미츠는 반가운 얼굴로 수혁을 향해 뛰어왔다.
“여긴 어떻게……?”
지금은 한창 정신이 없을 때였다.
인력이 부족해 타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상황이었으니, 한 사람의 손이 아쉬울 텐데.
“대장님의 명령으로 여러분을 모시러 왔습니다.”
슈미츠는 수혁이 유창한 영어로 말을 하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국에서 그가 연수할 때는 수혁과 대화가 거의 통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영어가 많이 는 것이다.
“대장님?”
“율리안 말입니다.”
슈미츠의 말에 수혁이 미소 지었다.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어차피 이홍관이라는 인솔자가 있었다.
그는 이미 숙소의 위치와 그곳까지 갈 방법까지 모두 숙지해 둔 상태였다.
그러니 굳이 이렇게 마중을 나오지 않아도 충분했다.
하지만 독일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아무리 정신이 없다고는 하지만, 자신들이 불러놓고 모르는 척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성대한 환영 행사는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도리는 해야만 했다.
심지어 한국 구조대에는 수혁이 있지 않은가?
독일의 명예 훈장을 받은 소방관이 오는데 가만있을 순 없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슈미츠의 말에 수혁이 이홍관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하냐는 뜻이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이홍관은 슈미츠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별말씀을.”
슈미츠 역시 미소로 인사에 화답했고, 일행의 안내를 시작했다.
“이게 버스냐?”
준비된 차량에 탑승한 박상태가 차 내부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한국의 시내버스나 고속버스 같은 것과는 비교가 되질 않았다.
시트의 감촉부터 달랐다.
“홍관 씨 말대로 꽤 신경써 준 것 같네요.”
평범한 버스가 아니었다.
그런 버스가 무려 다섯 대.
80명도 되지 않는 사람을 이동시키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수였다.
심지어 장비들을 옮길 차량도 따로 있었으니, 독일에서 얼마나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지 잘 보여주었다.
버스가 엄청나게 온 덕분에 수혁을 비롯한 대원들은 편하게 숙소까지 이동할 수가 있었다.
“여기예요?”
확실히 이전에 연수 왔을 때와는 규모가 작은 숙소였다.
‘그때는 호텔이었지.’
최고급 호텔까진 아니었지만, 연수생 숙소치고는 지나치게 고급스러웠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단 많이 소박했다.
“죄송합니다.”
슈미츠가 수혁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수혁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 화려하고 비싼 호텔에 머문다는 것 자체가 거북했다.
“왜 사과하는지 모르겠군. 마음에 드는데, 그렇죠?”
수혁이 박상태에게 동의를 구했고, 박상태 역시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보기엔 지금 이 숙소도 차고 넘칠 정도로 훌륭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홍관을 포함한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라가 발칵 뒤집어질 사태가 터지고, 고작 며칠 만에 결정이 된 지원 인력을 위해 이런 숙소를 마련해 준 것 자체가 고마운 일이었다.
실제로 예전 푸켓에서 일어난 쓰나미 때는 제대로 된 숙소조차 없었다.
오죽하면 텐트를 치고 잠깐씩 쪽잠을 자고 구조를 나갈 정도였으니까.
그에 비하면 지금 이곳은 과분할 정도였다.
슈미츠는 수혁의 말에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숙소 내부로 들어가 체크인했다.
이미 이야기가 다 되어 있는 상황이었는지라, 숙소 직원들이 빠르게 나와 대원들을 방으로 안내했다.
“율리안과 인사하고 싶은데.”
수혁이 자신에게 배정된 방에 들어가기 전, 슈미츠에게 슬쩍 말을 꺼냈다.
하지만 슈미츠는 고개를 저었다.
“대장님은 지금 현장에 계셔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구조에 열중하고 있다고 한다.
직접 마중 나오지 못하고 슈미츠를 보낼 정도였으니, 그만큼 바쁘다는 뜻이었다.
수혁은 아쉬운 표정으로 어쩔 수 없다는 듯 방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내일 아침부터 투입될 거다.”
“알고 있습니다.”
“상황은 어떻지?”
수혁이 자신의 짐 정리를 하며 슈미츠에게 물었다.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닙니다. 매몰되어 있는 요구조자의 수가 최소한 백 명이 넘습니다.”
그것도 파악이 된 숫자만 그러했다.
독일에서는 매몰자의 숫자가 최소한 백 명에서 최대 3백 명까지 보고 있었다.
중장비를 투입할 수도 없었는지라 사람의 손으로 구조할 수밖에 없었는데, 인력이 너무도 부족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었다.
다행히 오늘 아침 프랑스와 이탈리아, 벨기에에서 지원이 도착해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 눈에 띄는 성과는 없었습니다.”
발견되는 것은 오직 시체뿐이었다.
살아 있는 생존자는 몇 명이나 되는지, 정말로 있기는 한 것인지.
파악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수혁의 얼굴이 조금 심각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현장에 가서 살펴보고 싶었지만, 수혁도 휴식이 필요했다.
‘이건 장기전이니까.’
수혁의 기억대로라면, 며칠 내로 폭탄이 또 터진다.
그것도 이번과 비교해 절대 규모가 작지 않은 피해가 발생할 것이다.
그런 테러가 앞으로 한 달 내에 몇 번이나 발생한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휴식은 중요했다.
“지금까지 피해는?”
“사망자가 150명을 넘어섰고, 부상자는 아직…….”
통계조차 나오지 못할 정도면 그 수가 정말로 어마어마하다는 뜻.
수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럼 내일 보도록 하지.”
“아, 저는 내일 현장으로 가지 않습니다.”
“음?”
수혁이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보자, 슈미츠가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내일은 일본에서 지원이 올 예정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제가 안내를 맡아서…….”
슈미츠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일본의 지원이 달갑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은 한 명의 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의 상황이었으니까.
슈미츠의 표정이 안 좋은 것은 하필이면 그 안내를 자신이 맡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오늘은 이해한다.
아니, 오히려 원했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준 수혁을 직접 맞이하는 건, 슈미츠도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아니었다.
굳이 자신이 아니더라도 그들을 안내할 사람은 많이 있었다.
그런데 율리안은 이번에도 슈미츠에게 일을 맡겨 버렸다.
슈미츠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수혁은 율리안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다른 부하들을 보내는 것보단, 아직 경험이 부족한 슈미츠를 보내는 게 맞지.’
아마 슈미츠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짜증이 날 테고.
수혁은 피식하고 웃으며 슈미츠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래도 명령이니 따라야지. 어쨌든 도와주러 온 사람들이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슈미츠는 고개를 저으며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저는 내일 오후나 저녁때쯤 다시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혁은 슈미츠가 얼마나 성장했을지 기대가 되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슈미츠가 수혁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휴우.”
대충 짐 정리를 끝낸 수혁이 침대에 누웠다.
‘내일부터인가?’
당분간은 이렇게 편히 누워 있을 시간 따윈 없을 것이다.
수혁은 답답한 가슴을 진정시키며 애써 수면에 들었다.
내일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