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스큐 시스템-292화 (292/425)

레스큐 시스템 292화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은 이야기를 하다 고개를 돌려 문을 쳐다봤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깔끔한 정장을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신재식 씨, 지양호 씨, 김수혁 씨.”

그녀는 세 사람의 이름을 한 번씩 부르더니 손에 든 종이와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그러곤 확인이 되었는지 종이를 갈무리하곤 말했다.

“만찬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잠깐 대화를 하는 사이, 어느새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소방관 정복을 갖춰 입은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의 뒤를 따라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청와대 내부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수혁이 하던 상상과는 조금 달랐다.

‘이런 분위기구나.’

정장을 입은 공무원? 정치인? 누군지 모를 사람들이 뭐가 그리 바쁜지 뛰듯이 돌아다녔다.

“무슨 일 있나?”

지양호가 수혁에게 속삭였다.

“그냥 평소의 모습입니다.”

세 사람을 안내하던 여자가 지양호의 음성을 들었는지 대답해 주었다.

“흠흠.”

괜히 민망해진 지양호가 헛기침하며 딴청을 부렸다.

여자는 그런 지양호를 보며 살짝 미소 짓고는, 안내를 계속했다.

그렇게 그녀의 뒤를 따라 한참 동안이나 이동한 끝에, 만찬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만찬장은 고풍스러운 한옥 스타일의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가운데에는 커다란 테이블과 그 주변으로 십여 명이 앉아 있었다.

“왔군.”

셋에게 아는 척을 한 사람은 바로 소방청장 강현성이었다.

‘쯧.’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수혁이 속으로 혀를 찼다.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소방청에서의 첫인상이 너무도 안 좋았던 까닭이었다.

강현성 역시 수혁을 별로 좋아하진 않을 것이다.

수혁의 요구 덕분에 몇몇 고위직 공무원들의 머리를 날려 버려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현성은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우리 홍보 모델 오셨네.”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수혁을 반겨주었다.

수혁은 억지로 웃으며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홍보 모델이란 말에 눈꼬리가 파르르- 떨려왔다.

그러고 보니 깜빡 잊고 있었다.

비리를 저지른 놈들의 목을 치는 대가로 소방청 홍보 대사를 맡기로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자리가 더욱 싫어졌다.

“자자,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자리에 앉게.”

강현성은 자신이 마치 이 자리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세했다.

그 모습에 지양호도 거북한 표정을 지었다.

지양호는 선천적으로 이런 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데다, 강현성의 태도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까지 온 마당에 뒤돌아 나갈 수도 없는 일.

어쩔 수 없이 강현성의 손짓에 따라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이거, 오랜만에 보는군요.”

강현성이 신재식에게 아는 척을 했다.

“그렇습니다.”

신재식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을 현장에서 뛰어온 신재식이 강현성을 아는 것이 신기했다.

“한 5년 정도 되지 않았습니까?”

“아마 그 정도 될 겁니다.”

“그런데 그때에 비해 많이 야위셨군요.”

수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강현성은 신재식의 몸 상태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신재식이 허허- 웃으며 대꾸했다.

둘의 나이는 비슷했지만, 외모로는 신재식이 훨씬 많아 보였다.

병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신재식이 고생을 많이 했다는 뜻이다.

강현성은 신재식의 말에서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더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자네가 요즘 핫한 김수혁이라는 젊은이군?”

수혁의 옆자리에 앉은 점잖게 생긴 중년인이 말을 걸었다.

‘누구지?’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누군지 정확하게 떠오르진 않았다.

수혁이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자, 그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 실례했군. 나는 강형주라고 하네.”

강형주라는 이름을 들은 수혁의 눈이 커졌다.

아는 사람이었다.

직접적으로 만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지만, 분명 접점이 있는 사람이었다.

‘행정안전부 장관!’

수혁이 받은 표창에 떡하니 박혀 있는 이름 아니던가?

표창을 수여한 사람은 행안부 장관이 아닌, 소방 재난 본부의 본부장이 했기에 바로 떠올리지 못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라 느낀 것은 TV에서 몇 번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고.

“…김수혁입니다.”

수혁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강형주는 강현성과는 달리 별다른 감정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반대로 오히려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수혁이 몸담고 있는 특수 구조대 창설을 위해 가장 발 벗고 나선 것이 바로 강형주였기 때문이었다.

‘짐과 함께 장인어른을 설득했다고 했지.’

일선에서 뛰는 소방관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 양반이었으니, 나쁜 감정이 생길 리가 없었다.

“영웅이라고 칭송받는 젊은이를 만나게 되어서 영광이네.”

강형주는 진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수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아닙니다.”

영광이라니…….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직접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네만, 하도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낯설지가 않구만.”

강형주가 웃으며 수혁을 쳐다보았다.

“어, 저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사실 많이 들은 건 아니었다.

짐과 장인어른에게 스치듯 몇 마디 들은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순 없었기에 최대한 포장을 했다.

“설마 자네가 최문식, 그 친구의 사위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지. 고생이 많겠어.”

“하, 하하.”

수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여기서 좋다고 맞장구를 쳤다간 나중에 올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와는 여러 인연이 있군. 은송이도 그렇고…….”

‘응?’

그것 말고도 다른 인연이 있단 말인가?

수혁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강형주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기만 할 뿐, 대답해 주진 않았다.

“어쨌든 자리가 조금 불편하겠지만, 부담 갖지 말고 즐겁게 식사하게.”

“감사합니다.”

강형주와의 대화 덕분인지, 수혁은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였다.

“대통령님 입장하십니다.”

문이 열리며 비서실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절도 있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혁 역시 늦지 않게 일어나 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흠.’

꽤 많이 봐온 사람이었다.

이전 생에서도 봤고, 이번 생에서도 봤으니.

수혁의 입장에선 꽤나 오랫동안 대통령의 위치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난했지.’

임기 동안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잘한 것도 딱히 없는.

말 그대로 평이한 임기를 보냈다.

물론 대한민국에선 그것도 나름대로의 업적이라면 업적이겠지만.

“반갑습니다.”

대통령은 수혁을 비롯한 사람들을 둘러보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저게 트레이드마크였지.’

대통령의 임기 동안 그를 싫어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별다른 실수를 하지 않은 덕분도 있었지만, 저 호감 가득한 얼굴 덕분이라는 평도 많았다.

얼굴만 보자면 뒤가 구린 일 따위는 손도 대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으니까.

실제로도 그러했고.

“서 있지 말고 앉읍시다.”

대통령이 자리에 앉으며 말하자, 수혁도 의자를 끌어 앉았다.

“이렇게 소방 관계자분들을 모시는 건 처음이군요.”

청와대 만찬은 꽤 자주 열리긴 하지만, 소방 관계자들이 모이는 일이 자주 있지는 않았다.

임기 동안 한 번이면 많은 것이었고, 그냥 건너뛰는 대통령들이 대다수였으니까.

초대할 사람은 많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그리 중요하지 않은 소방 쪽은 소외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번에도 수혁이 아니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장관님은 어제 봤고, 청장님은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방청장은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직책이다.

강현상은 임명식 당일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을 만나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한 명, 한 명 이름을 호명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마침내 수혁의 차례.

수혁을 바라보는 대통령의 눈이 반짝였다.

“그쪽이 김수혁 군이겠네요?”

“그렇습니다.”

수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통령이 직접 말을 거는데, 이상하게도 별로 긴장은 되지 않았다.

‘하긴, 긴장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수혁은 한 번 죽음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도, 무너져 내리는 건물 속에서도 담담한 그가 대통령 앞이라고 해서 주눅 들고 긴장할 이유가 없었다.

‘차라리 장인어른이 더 무섭지.’

수혁이 속으로 픽- 하고 웃었다.

“그동안 많은 활약을 했다고 들었어요.”

“과찬이십니다.”

“과찬은요. 국내에서도 많은 사람을 살렸고, 태국 쓰나미에서 수많은 사람을 구조했다고 들었어요. 거기다 이번에 미국에서까지.”

대통령은 정말 감탄한 표정으로 수혁을 지그시 쳐다봤다.

“덕분에 대한민국의 위상이 많이 올라갔습니다. 이 나라의 장으로서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네요.”

수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칭찬을 사양하는 것도 그랬고, 그렇다고 넙죽 받아먹기도 그랬다.

수혁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있자, 대통령은 웃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1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인사가 오갔다.

“이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시장하실 텐데 식사부터 하실까요?”

대통령이 한쪽에 서 있는 수행원에게 눈짓하자, 곧바로 음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이것저것 많이 준비했어요.”

수혁은 당연히 정통 한식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다양한 음식들이 차려졌다.

‘파스타도 있네.’

굳이 먹어보지 않아도 맛있을 것이란 느낌이 팍팍 전해져 왔다.

‘청와대 셰프가 하는 요리니 어련할까.’

수혁은 빨리 식사를 시작하고 싶었다.

“드십시다.”

그런 수혁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대통령은 장황하게 말을 잇지 않고 수저를 들었다.

대통령이 첫 숟가락을 드는 것을 확인한 수혁이 망설이지 않고 음식에 손을 뻗었다.

‘음, 맛있네.’

생각했던 대로 맛은 기가 막혔다.

‘은송 씨와 비교할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개인적인 주관이 듬뿍 담긴 평가를 내린 수혁은 쉬지 않고 젓가락을 놀렸다.

“식사하면서 들으세요.”

그때 대통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 미국에서 크게 국위 선양을 한 수혁 군에게 표창을 수여할 생각입니다.”

슬쩍 고기산적을 향해 젓가락을 뻗던 수혁의 손이 멈추었다.

“미국에서는 명예시민권을 부여한다는데, 대한민국에서 그냥 넘어갈 순 없는 일 아닙니까?”

대통령의 시선이 수혁에게 향했다.

“그래서 대통령 표창과 함께 1계급 특진을 고려 중인데, 어떤가요? 강 청장.”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현성이 슬쩍 수혁을 한번 쳐다보고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진짜 속내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대통령 앞에서 반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강 장관은 어때요?”

“반대할 이유가 없지요.”

강형주는 웃으며 수혁을 쳐다봤다.

마치 잘됐다는 표정인 것 같았다.

“두 분이 동의하시면 그렇게 진행하는 걸로 할까요?”

대통령의 말에 수혁이 마른침을 삼켰다.

‘밥 먹으러 왔다가 진급하게 생겼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