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291화
톰이 돌아가고 난 후.
수혁은 책상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졌다.
‘고맙다라…….’
처음엔 톰의 기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을 구했다고는 하지만, 그만큼 많은 피해가 일어난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신중했다면.’
‘내가 조금만 더 잘 알아봤더라면.’
그랬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피해였다.
하지만 폭탄은 터졌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 때문에 힘들었다.
이런 자신이 영웅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 불편하기 그지없었고, 사람들의 칭찬이 거북했다.
그런데 톰은 반대였다.
희생된 사람이 아닌, 구조한 사람을 먼저 생각했다.
‘관점의 차이라는 거지.’
널리 퍼진 이야기가 떠올랐다.
컵에 물이 반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과 물이 반이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의 차이.
‘나도 모르게 그사이 꽤나 부정적으로 바뀌었나 보네.’
이전 생의 수혁이었다면 지금과는 조금 달랐을 것이다.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안타깝고 애도를 할지언정,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신을 탓하진 않았을 터였다.
테러가 일어나 사람들이 죽고, 다친 것은 수혁의 잘못이 아니었으니까.
나쁜 것은 테러범이지, 수혁이 아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면 가슴 한쪽에 묻어두고 평소의 수혁으로 돌아왔을 텐데…….
이번 생에서는 조금 달랐다.
수혁은 혼자서 너무 많은 짐을 떠안으려 하고 있었다.
애써 자신이 모든 사람을 구할 순 없다고,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되뇌었다.
그저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구조하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 있어?”
수혁의 한숨 소리를 들었는지, 강병규가 빼꼼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심각한 얘기하고 왔어? 분위기는 좋아 보였는데.”
톰과 수혁이 사무실을 나갈 때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수혁이 살짝 어색하긴 했지만, 톰이라는 외국인은 그저 반가운 기색만이 가득했었다.
그런데 나갔다 온 수혁의 표정이 계속해서 좋지 않으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강병규에게 자세한 내용을 얘기해 주고 싶지도 않았지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고개를 저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흠, 그래?”
강병규도 수혁의 기색을 눈치채고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물러났다.
수혁은 강병규가 말을 건 덕분에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괜히 고민해 봐야 해결되는 게 없긴 하지.’
사람 마음이 마음처럼 쉽게 되는 것도 아니고.
톰처럼 털어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게 하루이틀에 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톰조차도 10년이나 고생하지 않았던가?
‘차근차근하자, 차근차근.’
일단은 최대한 테러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잘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현재 수혁에게 중요한 일은 총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미국에서 오는 소방 장비 지원.
이 일은 수혁이 딱히 나설 필요가 없긴 했다.
대부분의 절차는 위쪽의 높으신 양반들이 처리를 잘해줄 테니 말이다.
수혁은 그저 정식으로 체결이 되면 언론에 얼굴 몇 번 비춰주면 되었다.
두 번째는 미국 명예시민 수여였다.
수혁에게 명예시민증을 수여한다는 공식적인 발표까지 한 상황이었으니, 그것을 피하긴 어려웠다.
짐 머레이가 적극 추천을 한 상황이었기에 거절할 수도 없었고.
다만 미국에서도 준비할 것이 적지 않아 올해 말쯤에나 수여가 된다고 했으니, 아직 시간은 조금 남아 있었다.
마지막은 청와대 만찬이었다.
수혁의 마음에 가장 들지 않으면서도, 가장 먼저 하게 된 일이다.
“저도 꼭 가야 합니까? 그냥 안 가면 안 됩니까?”
수혁은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전승철에게 물었다.
“그게 될 것 같나?”
전승철이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죠?”
수혁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 만찬에는 소방계의 굵직굵직한 인사들이 모두 초대를 받아 함께하는 자리였다.
행정안전부 장관을 비롯해 소방청장, 운영지원과장, 기획조정관, 소방정책국장, 119 구조구급국장 등등.
본래라면 소방교에 불과한 수혁은 쳐다도 보지 못할 인사들이 초청받는 자리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자리에 낯익은 이름도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지양호와 신재식.
한 명은 독일 연수 때부터 인연을 계속 이어오고 있었고, 한 명은 전설적인 구조대원이었다.
지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두 명이나 있다는 사실에 수혁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팀장님은 안 가십니까?”
“내가 낄 자리가 아니지.”
전승철이 중앙 119본부 소속 특수 구조대의 팀장이지만, 아직 청와대 만찬에 초대받을 만큼 특별한 실적을 올린 것은 아니었다.
경력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말이다.
“잘 다녀와라. 대장님도 청와대 만찬까지 뭐라고 하진 않으실 테니, 마음 편히 다녀와도 될 거다.”
전승철의 말에 수혁은 진태수를 떠올렸다.
수혁을 그리 탐탁지 않아 하는 특수 구조대의 대장.
전승철의 말에 따르면 진태수 역시 수혁이 특수 구조대에 오게 된 걸 가장 반긴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했는데, 솔직히 그런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다.
오히려 수혁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다.
“어쩔 수 없군요.”
한숨을 내쉰 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장님한테 보고하고 가야 합니까?”
“안 좋아하실 텐데. 그냥 가라. 보고는 내가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수혁은 정복을 입은 상태였다.
바로 오늘이 청와대 만찬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청와대에 간다는 말에 최은송이 어젯밤부터 혼신을 다해 다림질한 덕분에, 정복은 스치면 베일 정도로 각이 잘 잡혀 있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요즘 이래저래 힘들었을 텐데, 하루 쉬고 온다고 생각해.”
“하하…….”
대통령을 포함한 높으신 양반들 앞에서 밥을 먹는 게 과연 휴식이 될까 싶었지만, 수혁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많이 쌀쌀해졌네.”
어느덧 11월.
땅을 뜨겁게 달구었던 열기는 자취를 감추고, 싸늘한 공기가 맴돌기 시작했다.
“얼른 갔다 오자.”
수혁이 아쉬운 표정으로 본부를 한번 돌아보고는 차에 올라탔다.
오늘은 소방관의 날이었다.
본부에서도 식당 이모들이 실력을 발휘해 꽤나 진수성찬을 차려줄 것이다.
수혁은 청와대 만찬 같은 것보다, 식당에서 마음 편히 그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다.
‘소화제를 하나 사 먹고 들어가야겠다.’
체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야, 김수혁! 오랜만이다?”
으하하! 하고 웃으며 수혁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바로 지양호였다.
수혁도 빨리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수혁보다도 더 빨리 와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나야, 뭐 매일 똑같지. 너는 그 잠깐 사이에 더 유명해졌더구만?”
지양호는 수혁과 악수를 하고는 그간 수혁의 활약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저 그거 엄청 부담스럽거든요?”
수혁 역시 톰이나 전승철과 대화할 때와는 달리, 한결 편안한 모습으로 말을 했다.
지양호는 신일서 구조 3팀 대원들 다음으로 수혁과 인연이 깊은 소방관이었으니, 편할 수밖에 없었다.
“부담스럽긴, 인마. 우리 같은 사람은 그런 대접 꿈에도 못 꾼다.”
“청와대 만찬에 초청도 받으셨으면서 무슨.”
“그거랑 미국 명예시민이랑 같냐? 넌 영웅 소리도 듣잖아.”
“미국은 소방관들을 모두 영웅이라 생각하는 나라예요.”
한국과는 인식의 차이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컸다.
요즘 들어 많이 성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미국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죽하면 코믹스의 슈퍼 히어로들이 소방관에게 존경을 표하는 일러스트들이 나돌아 다닐 정도였으니…….
‘한국에선 아직도 소방관들을 자기들 머슴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씁쓸한 현실이었다.
“어쨌든. 네 덕분에 우리도 좋은 일 생기게 생겼다.”
미국에서 오는 장비 지원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번엔 수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수혁에겐 영웅이니, 명예시민이니 하는 것들보다, 장비 지원이 훨씬 더 값진 보상이었다.
“대충 목록 보니까 엄청나더라고요.”
“뉴스에도 나오더만. 그게 정말로 다 오는 거냐?”
“세세한 수량 같은 건 차이가 있을 수도 있는데, 거의 오차는 없을 걸요?”
소방청에서 회의할 때 직접 본 것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얼마 전에 본 톰도 딱히 별말이 없었으니, 그날 본 것들이 그대로 지원될 확률이 높았다.
“이야, 잘 키운 수혁 하나 소방청 안 부럽네.”
최소한 천억에서 어쩌면 수천억에 달할지도 모를 장비들이다.
그런 것을 소방청도 아니고, 수혁 혼자만의 힘으로 얻어냈으니…….
이 정도면 표창을 한 다스로 받아도 모자랐다.
“표창 같은 건 얘기 없어?”
“네. 그런 말은 없네요.”
이번에도 표창을 받는다면 또다시 특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수혁이 해온 업적을 생각하면 아직도 특진을 한 번밖에 하지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하여간 짠돌이 새끼들.”
지양호가 혀를 쯧쯧 차며 욕을 했다.
“여기가 청와대인 건 알고 계시죠?”
“그래서 뭐, 어쩌라고.”
지양호의 거침없는 성격은 여전했다.
“오랜만이군.”
그때 누군가 대기실로 들어오며 수혁에게 아는 척을 했다.
“아, 어르신.”
신재식이었다.
“어르신은. 그냥 선배라고 부르게.”
웃으며 들어오는 신재식의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했다.
살도 최소한 10㎏ 이상은 빠진 것처럼 보였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수혁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묻자, 신재식의 미소가 짙어졌다.
“많이 좋아졌네.”
혈액암.
그것도 치료 시기를 놓쳐 말기에 다다른 상태였으니, 좋아졌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신재식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배.”
“너도 많이 늙었구나.”
“50이 다 되어가니까요.”
지양호는 신재식과 일면식이 있었는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래도 가기 전에 이렇게 한 번 더 볼 수 있으니 다행이군.”
신재식은 수혁과 지양호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 시선에 지양호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고, 수혁은 고개를 숙였다.
자주 병문안을 가겠다는 약속을 거의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수혁이 죄송스러워하자, 신재식이 손을 올려 어깨를 토닥였다.
“내 자네가 그간 바빴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미안해할 것 없네.”
“…죄송합니다.”
수혁이 사과했다.
“아니래도.”
신재식은 자신이 죽기 전에 수혁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간 자신이 쌓아온 경험들.
수혁이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한들, 아직은 갖추지 못한 것들이었다.
‘이제는 전해주지 못할 것 같지만.’
그래도 아쉽진 않았다.
수혁은 지금까지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해낼 것이니까.
신재식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