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283화
“일주일이요?”
“그렇습니다.”
회의는 무려 일주일간 이어진다고 한다.
아무리 서로 호의를 갖고 대부분의 요구 조건을 수용한다고 해도, 조정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혁은 회의가 그렇게 오래 진행된다는 이야기에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저도 일주일 동안 여기에 있어야 되는 건 아니겠죠?”
그래선 안 된다.
솔직히 자신이 회의에 참가해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참가해 봐야 할 말도 없었다.
그 시간에 일을 한다면 수십 명을 구하고도 남을 것이다.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수혁 씨는 오늘만 참석하시면 되니까.”
톰의 말에 수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왜 부른 겁니까?”
수혁이 회의에서 하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톰이 필요한 것을 말하라곤 했지만, 정말로 필요한 것이 없었고, 솔직히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다.
그런 자신을 왜 불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징적인 겁니다.”
“……상징?”
“이 지원이 가능한 이유는 오롯이 수혁 씨 덕분이니까요.”
그러니까, 보여주기 용이라는 뜻이었다.
기자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내일이 되면 수혁이 오늘 이 회의에 참석했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것을 눈치챈 수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희는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했는데, 한국 측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더군요. 꼭 수혁 씨를 회의에 참석시키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용당하는 것은 미국만으로도 족한데, 한국에서도 수혁을 이용하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짜증이 치솟아 올랐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혁이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지금처럼 그냥 마스코트가 되어 앉아 있다가 돌아가는 것 외에는.
“근데 제가 안 왔으면 짐의 얘기를 어떻게 전하려고 하셨습니까?”
짐 머레이는 톰에게 수혁이 필요한 모든 것을 수용하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그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면 물어볼 수가 없지 않은가?
“오늘 1차 회의가 끝난 후에 제가 직접 찾아가려고 했습니다.”
‘아, 그러면 되는구나.’
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이곳에 부른 건 미국이 아닌 한국이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오늘만 참자.’
조금 불편하더라도 감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왕 여기까지 온 이상 높으신 분들에게 할 말은 하고 갈 생각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조금은 참아야만 했다.
“회의 속행하겠습니다.”
“들어갑시다.”
수혁과 톰이 일어나 다시 회의실로 향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회의.
수혁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머릿속을 비운 채로 듣기만 했다.
미국 측 사람들이 가끔 질문을 던질 때를 제외하곤,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한국 측에선 수혁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니,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말 그대로 마스코트와 별다를 바 없는 취급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톰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당사자인 수혁도 가만있는데 나설 수는 없었기에 인상을 찌푸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제 식사하러 가실까요?”
시간을 확인한 강현성이 웃으며 회의를 중지시켰다.
그 말에 수혁이 퍼뜩 정신 차렸다.
멍 때리고 있는 사이, 어느새 점심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무슨 할 말이 이렇게도 많은지.’
그냥 단순히 지원 품목의 목록을 정하고, 보내면 될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일어나지.”
강현성이 수혁을 보며 말했다.
여전히 사람 좋은 인상이었지만, 그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게 되고 난 뒤부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색할 순 없었기에 수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는 저희 쪽에서 예약을 해두었으니 그쪽으로 가시면 될 겁니다.”
수혁은 당연히 청사 내부 식당에서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서 온 손님들을 구내식당에서 대접할 순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것도 첫 끼를 말이다.
회의실을 나서자, 수혁을 이곳까지 안내했던 공무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수혁은 톰과 함께 그의 뒤를 따라갔다.
공무원이 안내한 곳은 고급 한정식집이었다.
톰을 비롯한 미국 측 인사들은 신기한 눈으로 식당 내부를 살폈다.
하지만 수혁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고급 한식당이라면 장모님이 운영하고 최은송이 일을 하는 예향정이 이곳보단 몇 배는 훨씬 고급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이쪽입니다.”
종업원 한 명이 나와 일행을 맞이했다.
한국과 미국 측의 인사를 모두 합하면 거의 30명에 육박하는 인원이었음에도 모두 같은 곳에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청사 주변이라 그런지 대형 룸도 구비가 되어 있구나.’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모두 자리에 착석하자 기다렸다는 듯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수혁에겐 익숙한 음식들.
최은송이 집에서도 자주 해주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반대로 미국 측 인사들은 눈을 반짝였다.
최근 한식의 이름이 조금씩 미국에서도 넓게 퍼지는 중이었다.
그중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치킨과 코리아 바비큐였지만, 그 외의 메뉴들도 차근차근 알려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전통 한정식집에 왔으니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국 음식은 건강식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보니 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알 것 같습니다.”
미국 인사 중 한 명이 그렇게 말을 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맞장구를 쳤다.
“한국의 비만율이 낮은 건 건강한 음식 덕분이라고 들었습니다.”
“확실히 미국에 비하면 배가 나온 사람이 드물더군요, 하하!”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이 자리만 봐도 체격 차이가 상당했다.
미국 측 사람들은 톰을 제외하면 모두 고도 비만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에 반해 한국인들은 호리호리한 몸매가 대부분이었고.
야채와 나물들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는 데다, 눈앞에 있는 한국인들의 몸매를 보니 그런 말을 나올 만했다.
“식사하시죠.”
강현성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식사를 권했다.
미국의 음식들과는 다른 매력에 미국인들은 연신 감탄하며 식사를 이어갔다.
사실, 그리 맛이 없었더라도 저런 리액션을 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들에게는 이런 식사 자리도 외교의 일환일 테니까.
“입맛에 맞으십니까?”
수혁이 톰에게 물었다.
톰은 고기 산적 하나를 입에 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식은 처음인데 생각보다 맛있군요.”
톰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의 덩치를 생각해 보면 공깃밥 한두 개 가지고는 간에 기별도 안 갈 것 같았지만 말이다.
톰이 만족하는 듯하자 수혁도 안심하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케인 씨가 전해달라는 말이 하나 있었습니다.”
“말씀하세요.”
“명예시민 수여는 통과되었으니, 조만간 발표가 날 것이라는…….”
짐 머레이에게 이미 들은 말이었다.
그래도 수혁은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며 물었다.
“언제쯤 발표가 된답니까?”
짐 머레이의 말에 의하면 미국의 명예시민이 되는 것만으로도 혜택이 상당하다고 했다.
딱히 필요하진 않았지만, 그가 강력하게 받는 것이 좋다며 의견을 피력했으니 궁금한 척이라도 할 참이었다.
“이 회의가 끝나기 전에 발표가 될 거라고 들었습니다만,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군요.”
일주일 안에 발표된다는 뜻이었다.
이르면 오늘이나 내일.
늦으면 6일 후.
그 발표가 불러일으킬 파장에 수혁은 한숨부터 나왔다.
지금도 난리인데, 아시아 최초로 미국 명예시민이 탄생하면 얼마나 시끄러울지 충분히 예상이 되었다.
‘국뽕이 치사량으로 치솟겠구만.’
그리고 반대로 수혁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이들도 더욱 늘어날 터였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진태수였다.
‘또 광대놀음 했다고 뭐라 하진 않겠지?’
오늘 소방청에 방문하는 것도 진태수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아득히 높은 곳에서부터 내려온 요청이었는지라 차마 거부할 수가 없어 보내주긴 했지만, 싫다는 분위기가 팍팍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면서 수혁을 탐탁지 않게 쳐다보는 것이 우스웠다.
‘욕을 하려면 위쪽 양반들을 욕할 것이지, 왜 애꿎은 나를 가지고 그러는지 모르겠네.’
수혁의 죄라면 명령에 따른 것밖에 없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진태수를 미워할 수도 없었다.
그가 수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유가 단순히 질투 때문이 아님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지.’
진태수는 수혁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고 했다.
이건 전승철이 직접 이야기해 준 것이었다.
수혁이 특수 구조대에 오게 되었을 때 자신만큼 기뻐하던 사람이 바로 진태수였다니…….
그가 수혁에게 보여준 모습을 보면 상상도 되질 않았다.
그럼에도 진태수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혹여나 수혁이 그런 명성에 취할까 싶어 두려웠기 때문이란다.
‘내가 애도 아니고.’
진태수를 떠올린 수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걱정 있으십니까?”
수혁이 밥을 먹다 말고 한숨을 쉬자 톰이 물었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수혁이 고개를 젓자, 톰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혹시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웬만한 건 저희가 도움을 드릴 테니.”
수혁이 웃었다.
미국의 힘을 빌려 진태수를 혼내주는 상상을 잠깐 한 것이다.
“그렇게 할게요.”
“김수혁 씨.”
그때 미국인 중 한 명이 수혁을 불렀다.
한국말이었기에 당연히 한국 사람인 줄 알고 돌아봤는데, 수혁을 부른 사람은 미국인이었다.
“주한 미국 대사입니다.”
수혁이 깜짝 놀랐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다 했더니, 설마 대사였을 줄은 몰랐다.
그는 유창한 한국말로 수혁에게 인사를 했다.
“아까는 자리가 자리였는지라 인사를 못 드렸군요. 해리스입니다.”
그의 인사는 공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모습에 수혁이 당황했다.
“기, 김수혁입니다.”
수혁 역시 공손한 태도로 해리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해리스가 환하게 웃었다.
“미국에서의 소식을 듣고, 어떤 분이실지 궁금했습니다.”
해리스가 말하자, 주변에 있던 미국인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에라도 둘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은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미국에서 해주신 일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해리스는 한국식으로, 수혁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수혁에겐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저들의 분위기가 너무도 엄숙했기에, 차마 만류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들과 마주 허리를 숙이는 수밖에.
강현성과 한국 인사들은 놀란 표정으로 그 모습을 쳐다봤다.
수혁이 미국에서 영웅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덕분에 이런 회의까지 열리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미국 대사가 직접 수혁에게 저런 식으로 허리를 굽힐 정도라는 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이 자리에 있는 한국 대통령에게도 저런 태도를 보이지 않는 위치였으니까.
수혁을 쳐다보는 강현성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