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280화
‘마지막 날 뺑이 치게 생겼네.’
오늘은 수혁이 신일서에서 근무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한가하길 빌었다.
조금이나마 대원들과 같이 수다를 떨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수혁은 한숨을 내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수혁이 조수석의 문을 잡고는 힘을 주었다.
끼기긱-!
그러자 뒤틀린 차체 때문에 꼼짝도 하지 않던 문이 틈을 벌렸다.
‘각성’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이 정도는 평소의 수혁에게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본 사람 없지?’
수혁은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수혁의 행동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수혁은 그대로 문을 열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요구조자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안전벨트를 맨 덕분인지, 사고의 규모에 비해 부상이 그리 심하지 않아 보였다.
“이게 당신을 살렸네요.”
수혁은 요구조자에게 작게 말을 하고는 안전벨트를 뜯었다.
그러곤 의식이 없는 요구조자를 차 밖으로 꺼냈다.
‘세 명째.’
수혁이 현장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구조한 요구조자가 벌써 세 명이나 되었다.
아직 다른 대원들이 한 명도 구하지 못한 것을 보면 수혁이 얼마나 빠른지 알 수 있었다.
“주십시오!”
구급대원 한 명이 수혁의 품에 안긴 요구조자를 발견하곤 달려왔다.
수혁은 그에게 요구조자를 넘겨주며 다시 몸을 돌렸다.
“하아.”
현장을 돌아본 수혁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게 도대체 몇 대냐.”
눈으로 대충 훑어만 봐도 열다섯 대 이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최소한 15중 추돌 사고 현장이라는 뜻이었다.
수혁이 스킬을 사용해 확인한 결과, 목숨이 경각에 달린 요구조자는 없었지만…….
‘숫자가 너무 많아.’
현장에 출동한 구조대원은 구조 3팀이 전부였다.
하지만 요구조자의 수는 그들의 몇 배나 되었다.
수혁이 세 명이나 구조했음에도 그랬다.
지금 당장 위험해 보이는 사람이 없긴 했지만, 그것도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른다.
“수고했어.”
서장이 수혁을 보며 말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수혁 역시 서장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서장이 특혜에 가까운 배려를 해주지 않았더라면, 꽤나 곤란한 처지에 놓였을 수도 있었으니 인사하는 것이 당연했다.
서장은 웃으며 수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지 말라고 하면 안 되겠지?”
“하하…….”
수혁이 어색하게 웃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서장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듬뿍 담겨 있었던 것이다.
서장 역시 수혁 덕분에 많은 이득을 보았다.
자신의 부하가 세계적인 영웅이 되어 위쪽에서 치하도 많이 받았고, 무엇보다 라이벌인 조연서 서장에게 우쭐거릴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수혁이 특수 구조대로 가는 것이 아쉬울 수밖에.
하지만 붙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붙잡아서는 안 된다.
서장 역시 수혁이 신일서에만 있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인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거기 가서도 잘할 거라고 믿을게.”
“걱정하지 마십쇼.”
수혁이 웃으며 대답하자, 서장 역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서장이 손을 내밀었다.
“그동안 진짜 수고 많았어.”
수혁은 서장과 악수하고는 서장실을 빠져나왔다.
밖에는 구조 3팀 대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 끝났냐?”
“네.”
“오래도 한다. 할 말이 뭐가 그리 많으신지.”
박상태가 혀를 찼다.
그들이 서장실 앞에서 수혁을 기다린 시간이 무려 30분을 넘어서고 있었던 탓이다.
“이제 마지막인데 그 정도 인사는 해야죠.”
수혁도 살짝 질린 표정이었지만, 서장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이해를 했다.
“아무튼 끝났으면 이제 가자.”
송별회는 며칠 전에 했으니, 이제 와 또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유는, 그저 퇴근을 같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혁을 포함한 대원들은 서를 빠져나갈 때까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작별 인사는 송별회 때 질리도록 했으니, 딱히 할 말이 더 있지도 않았다.
괜히 낯부끄럽기도 했고.
그렇게 수혁은 구조 3팀과 담담하게 인사하고는 헤어졌다.
‘끝이네.’
자신의 차에 탄 앉은 수혁은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신일서를 돌아봤다.
너무도 익숙한 건물의 모습이 수혁의 눈동자에 아로새겨졌다.
이전 생과 이번 생, 모두 합쳐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가 근무해 온 곳.
그곳을 떠나 이제는 새로운 곳으로 가야 할 때였다.
‘잘 지내라.’
수혁은 홀로 마지막 인사를 하고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다 챙겼어요?”
아침부터 최은송이 수혁을 쪼기 시작했다.
“저 초등학생 아니거든요?”
수혁이 웃으며 그런 최은송을 말렸다.
“그래도 오늘 첫날인데. 뭐 빠뜨린 거 없는지 잘 확인하고 가야죠. 괜히 첫날부터 상사들한테 찍히면 힘들어져요.”
“그럴 거 없어요. 어차피 다들 아는 사람들이고.”
새로운 근무지라고는 하지만, 수혁은 이미 그곳에서 한 달간 지원 나가 일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안면도 많이 익혀놨었으니 그리 긴장이 되지도 않았다.
“그래도요.”
하지만 최은송은 안심이 되지 않는지 몇 번이나 수혁을 챙겼다.
“다림질을 좀 더 하는 게 좋을까요?”
수혁의 제복은 이미 손가락이 베일 것 같은 각이 잡혀 있는 상태였다.
새벽부터 최은송이 혼신을 다해 다림질한 덕분이었다.
“지금도 충분해요.”
모든 게 완벽하다는 것을 확인하자, 최은송이 마침내 수혁을 놔주었다.
“좋아요. 이제 출근해도 돼요.”
최은송의 허락에, 수혁이 허허 웃으며 문을 나섰다.
괜한 유난을 떤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수혁은 누군가 이렇게 자신을 챙겨준다는 사실이 너무도 즐거웠다.
“그럼 다녀올게요.”
“오늘도 몸 조심히 다녀와요.”
수혁은 최은송의 이마에 살짝 키스를 해주고는 출근했다.
특수 구조대 본부는 신일서보다 조금 더 멀었기에 수혁은 평소보다 빨리 집을 나섰다.
이른 시간인지라 도로에는 차가 그리 많지 않았다.
덕분에 수혁은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도착할 수가 있었다.
수혁은 주차장에 주차하고는 익숙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인사하려던 수혁이 말끝을 흐렸다.
‘아무도 없네.’
아직 출근하지 않은 듯했다.
“음, 어쩔까.”
야간 근무를 한 3팀에게 가서 인사를 해야 할지, 아니면 여기서 자신의 팀을 기다릴지.
수혁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수혁의 고민을 해결해 주기라도 하듯, 사무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일찍 왔군.”
전승철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수혁은 전승철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래.”
전승철은 잠시 머뭇거리다 수혁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작게 말했다.
“잘 왔다.”
그것을 들은 수혁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백준하의 장례식 날.
수혁은 전승철의 모습을 떠올렸다.
초췌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수혁에게 네가 필요하다며 부르짖던 모습.
‘많이 좋아진 것 같네.’
시간이 흐른 만큼 부하를 잃었다는 슬픔과 상처가 꽤 아물었을 것이다.
물론 그 흉터는 평생을 가겠지만, 저 정도로 좋아진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제 자리는 어딥니까?”
수혁이 물었다.
“전에 쓰던 곳을 쓰도록.”
전승철은 한쪽을 가리켰다.
이전에 수혁이 지원 나왔을 때 썼던 책상이었다.
미리 치워둔 것인지, 책상은 깨끗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으으, 피곤해.”
수혁이 자신의 자리에 앉아 필요한 물품들을 꺼내고 있는데, 사무실 문이 열리며 대원들이 출근하기 시작했다.
“어? 너구나.”
“벌써 올 때가 됐었네.”
대원들은 수혁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야, 영웅이 우리 팀에 들어오다니. 팀장님한테 듣기는 했는데, 믿기질 않네.”
그들의 눈빛은 동료가 아닌, 무슨 신기한 동물을 보는 것 같았다.
그것을 느낀 수혁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시끄럽군.”
전승철의 차가운 음성에 대원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확실히 신일서랑은 분위기가 달라.’
전승철은 이전보다 훨씬 딱딱해진 성격이 된 것 같았다.
그것이 백준하의 죽음 때문인지, 아니면 경험이 쌓이며 변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나쁘진 않지.’
가족 같았던 신일서의 분위기도 좋았지만, 이런 분위기도 괜찮았다.
팀장의 리더십이 강하면 그만큼 조직력이 오를 테니 말이다.
‘그리고 가족은 지금도 충분해.’
특수 구조대에서도 신일서처럼 웃으며 일할 생각은 없었다.
“흠흠.”
대원들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그 선배들은 다 돌아간 건가?’
수혁이 특수 구조대에 지원을 나왔을 때, 같이 지원 나왔던 두 명이 더 있었다.
오지환과 이희도.
꽤나 밝은 성격에 수혁과도 잘 맞았던 사람들이었다.
‘안 보이는 걸 보니 돌아간 것 같네.’
조금 전 수혁에게 아는 척을 했다가 전승철에게 핀잔을 들은 이들은, 병원 화재 때 부상을 입고 입원했던 대원들일 것이다.
잠시 후 나머지 대원들도 출근했다.
이번엔 수혁도 아는 얼굴들이었기에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분위기가 너무 다르긴 하다.’
백준하가 순직한 지 시간이 꽤나 흘렀음에도, 분위기는 꽤나 경직되어 있었다.
“김수혁 씨?”
그때 누군가 수혁을 불렀다.
본부 직원이었다.
“예?”
“대장님께서 면담 좀 하자고…….”
“아, 알겠습니다.”
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오겠습니다.”
수혁의 말에 전승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고가 아니라 면담이라는 말에 수혁은 살짝 의아했다.
당연히 신고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뭐, 이게 더 좋지.’
괜히 그런 걸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단 대충 이야기 몇 마디 나누고 끝내는 쪽이 훨씬 나았다.
똑똑-
“들어와.”
중후한 음성이 문 안쪽에서 들려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수혁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쪽에서 구조대장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와우.’
구조대장의 몸은 수혁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미국에서 만난 톰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이를 생각해 보면 놀라울 정도로 컸다.
“반갑다, 김수혁.”
구조대장은 전승철 못지않게 딱딱한 얼굴로 수혁을 맞아주었다.
“오늘부로 특수 구조대 1팀에 배속받은 김수혁이라고 합…….”
“됐고.”
그는 귀찮다는 듯 수혁의 말을 끊고는 소파를 가리켰다.
“아, 예.”
괜히 머쓱해진 수혁이 소파로 가서 앉았다.
“나는 진태수다. 보다시피 여기 대장을 맡고 있지.”
‘무슨 목소리가…….’
동굴 속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너에 대해서 조금 알아봤다. 그동안 어떤 현장에 출동했는지, 몇 명을 구했는지.”
말하는 진태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살짝 생겨났다.
흥미.
그는 수혁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대단하더군.”
“과찬이십니다.”
수혁이 겸손을 떨었다.
“하지만…….”
그런데 갑자기 진태수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여기서는 그딴 식으로 날뛰는 걸 절대 용납하지 못한다.”
수혁의 얼굴 역시 딱딱하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