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278화
“여보세요?”
퇴근 후 저녁을 먹고 최은송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수혁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날세.]
“아, 짐!”
전화를 한 사람은 바로 짐 머레이였다.
[잘 지냈나?]
“그리 잘 지내진 못한 것 같네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신혼여행에서 다녀온 직후부터 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시달렸다.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과 방송사들의 섭외 요청 전화가 끊이질 않았다.
오죽하면 박상태가 특수 구조대로 가기 전에 한 번쯤 수락하는 건 어떻겠냐고 말을 할 정도였다.
[허허, 많이 바빴나 보군.]
“누구 덕분에 어쩔 수 없죠.”
수혁이 케인 로저스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연락했네.]
짐 머레이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한국 소방관들에 지원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네. 몇 달 내로 엄청난 물량의 보급품들이 한국으로 들어갈 게야.]
그 말을 들은 수혁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렇게 귀찮고 부담스러운 일을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정확히 얼마나 많은 예산이 들어갔는지는 나도 잘 알지 못하네만, 케인은 내가 놀라 뒤로 나자빠질 정도라고 하더군.]
정말로 짐 머레이가 나자빠지진 않겠지만, 그만큼 많은 예산이 투입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감사합니다.”
[내게 고마워할 게 뭐가 있나? 오히려 내가 자네에게 고마워해야지.]
짐 머레이의 말이 옳았다.
자칫 잘못했으면 더욱 커졌을 피해를 막아낸 수혁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 할 건 짐 머레이였다.
[자세한 사항은 한국 정부와 협의하기로 했으니, 자네는 크게 신경쓸 것 없네.]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수혁이 웃었다.
[아참, 그리고 한 가지 더 가르쳐 줄 것이 있네.]
“말씀하세요.”
[명예시민에 대한 건일세.]
케인 로저스가 약속한 보상 중 하나였다.
솔직히 수혁에게 미국 명예시민은 그리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명예로운 일이기는 하겠지만, 지금도 과분할 정도로 많은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굳이 명예시민이라는 타이틀 하나를 더 단다고 해서 좋을 건 별로 없었다.
‘내가 미국을 자주 갈 것도 아니고.’
수혁은 그리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케인이 전에 말한 것처럼, 자네에게 명예시민을 수여하기로 결정되었다네.]
“그런가요?”
[아직 발표는 되지 않았지만, 화이트 하우스에서 직접 결정한 일이니 조만간 대변인을 통해서 알려질 걸세.]
“저는 딱히 필요 없는데…….”
수혁의 말에 짐 머레이가 껄껄 웃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지. 은근히 괜찮은 혜택들도 많고. 무엇보다 더는 한국에서 자네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자신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니?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만, 미국 역사상 명예시민이 수여된 적은 단 여덟 번에 불과하다네.]
그것은 수혁도 박정우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만큼 자격이 까다롭다는 뜻이지. 절대로 아무에게나 수여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고. 그런데 여덟 명, 아니, 이제 자네까지 아홉 명밖에 없는 명예시민을 무시한다면, 과연 미국이 가만있겠나?]
짐 머레이가 말하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수혁은 고작 지방 공무원인 소방관에 불과했지만, 미국 명예시민이 된다면 그 어떤 정치인이나 고위 공무원들도 수혁에게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미국을 무시하는 처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 그건 좀 마음에 드네요.”
높으신 양반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행동할 수 있다는 건 큰 매력이 있었다.
물론 대놓고 무시할 순 없겠지만, 예전보단 훨씬 운신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요구조자들을 구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수혁의 구조 방법을 평범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수혁과 같은 능력도 없었고, 엄청난 육체를 갖고 있지도 않았으니까.
때문에 구조 방식에 반대하는 이들이 분명 생길 것이다.
신일서나 특수 구조대의 대원들은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기에 괜찮았지만, 다른 이들도 그럴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았다.
특히나 현장 경험도 거의 없이 책상에 앉아 입으로만 일하는 고위자들 말이다.
그런데 명예시민이라는 방패가 있다면 그들의 손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외에도 여러 혜택이 있겠지만, 자네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군.]
수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지금 수혁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미국에서 해줄 장비 지원뿐이었다.
[아무튼 오늘은 그것을 알려주려고 연락했다네.]
“감사합니다.”
굳이 직접 이렇게 연락한 것이 고마웠다.
[그럼 이만 쉬게. 조만간 한국에 들어갈 예정이니 그때 보자고.]
“그렇게 하죠. 언제든 환영합니다.”
수혁이 전화를 끊자 최은송이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짐이 뭐라고 해요?”
“전에 약속했던 것들을 보내기로 결정이 됐다네요.”
“그 장비 지원이요?”
“네. 준비를 마치는 대로 바로 보낸다니, 몇 달 후에는 도착할 것 같아요.”
“잘됐네요.”
최은송이 배시시- 웃었다.
세상 어떤 사람이 혼자서 미국에게 그만한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그것도 정치인도 아니고, 일개 소방관이 말이다.
최은송은 그런 자신의 남편이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들었냐?”
“뭘요?”
수혁은 출근하자마자 대뜸 말을 거는 박상태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오늘 아침에 뉴스 안 봤어?”
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박상태는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미국에서 우리나라에 소방관 장비들을 지원해 준단다. 갑자기 이게 뭔 일이래냐.”
박상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자국에서도 인색한 지원을 타국에서.
그것도 미국이 해준다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뜬금없어도 너무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전날 짐 머레이에게 이미 이야기를 들었던 수혁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불쌍했나 보죠.”
“그게 말이 되냐?”
성의 없는 수혁의 대답에 박상태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분명 뭐가 있는데…….”
박상태가 살짝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수혁을 쳐다봤다.
미국과 한국, 그리고 소방관.
이 세 단어에서 공통점을 찾으라면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테러 사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미국에서 너 때문에…….”
“설마요.”
수혁은 박상태의 말을 막았다.
그 생각이 맞긴 했지만, 수혁은 굳이 그것을 내세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괜히 자기 자랑을 하는 것 같아 낯이 부끄러웠다.
“그거 말곤 딱히 생각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말이지.”
박상태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지만, 수혁은 그것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팀장님!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박정우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미국 지원 얘기라면 알고 있으니까 얘기 안 해도 돼.”
“어? 벌써 들으셨구나.”
박정우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신나게 자랑을 하러 왔다가 실망한 아이 같았다.
“하여간 저놈이 난 놈은 난 놈이에요.”
박정우는 털레털레 자신의 자리로 가며 수혁을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음? 알고 계신다면서요.”
“알고 있는데, 쟤가 왜 난 놈이라는 건진 몰라.”
박상태의 말에 박정우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할 말이 생겼다는 게 기쁜 듯했다.
“미국이 지원을 결정한 게 수혁이 때문이라잖아요.”
“뭐?”
박상태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가며 수혁을 향했다.
‘아이고 머리야.’
대체 저건 어떻게 알아냈단 말인가?
설마 박정우의 소식통이 미국까지 뻗어 있는 것은 아닐 텐데.
“조금 전에 기사에 떴어요. 미국에서 이번 지원을 결정한 건 모두 수혁이 때문이라고. 일종의 감사 표시 같은 거라던데요?”
“허!”
박상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일 줄이야.
“그렇지. 걔네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런 걸 줄 리가 없지.”
박상태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너 알고 있었지?”
“그걸 제가 어떻게 알고 있어요?”
“아니야. 너는 분명 알고 있었어. 몰랐다면 처음에 내 얘기 듣고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까.”
대한민국 소방관이라면 누구나 환호할 만한 일이었다.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것 자체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수혁은 괜히 찔려서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자 박상태는 일단 수혁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박정우에게 물었다.
“또 새로운 소식 없냐?”
“음, 지원 장비 목록 정도요.”
“말해봐.”
박상태는 정말로 지원이 결정 났다는 것밖에 모르는 상태였다.
“기사에는 대략적인 것밖에 안 나와서 전부는 모르고요. 아직 완전히 결정난 사항은 아니라 변경될 가능성도 있다고 하네요.”
일단 밑밥을 깐 박정우가 자신이 본 것들을 하나씩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들은 박상태의 입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잠깐, 뭐라고?”
그러다 박정우의 말을 끊고는 물었다.
“어, 펌프차 백 대랑 공작차 25대, 그리고…….”
박상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소방관 장비 지원이라고 해서 방화복이나 마스크, 봄베 같은 개인 보호 장비를 말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박정우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반적인 장비 전체를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미친, 저게 다 얼마야?”
다른 건 모두 제하고 펌프차 가격만 해도 수백억이다.
거기에 다른 장비들까지 포함하면 도저히 얼마나 되는지 짐작도 가질 않았다.
그마저도 저게 대략적으로 알려진 것뿐이라니…….
단순히 수혁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하는 것치고는 지나치다 못해 황당할 정도였다.
그것은 수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제 짐 머레이에게 듣기로도 많은 예산이 투입되었을 거란 생각은 했다.
그런데 저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들의 뜻에 따라 영웅이 되어주는 대가로는 너무 많았다.
“아직 많이 남았는데요?
박정우는 말을 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표정이었다.
박상태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정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목록을 읊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상상을 초월하는 대가에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절대로 나쁜 일은 아니었다.
장비의 지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다만 마음이 조금 씁쓸했다.
이런 지원을 미국이 아닌, 한국이 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액수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은 미국만큼 돈이 많은 국가가 아니었으니까.
그저 타국의 소방관을 위해 이런 예우를 보이는 미국이란 나라가 부러울 따름이었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어떤가?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김주현 조연출과 인터뷰를 하며 비리를 밝혀낼 수 있게 됐다고 좋아하지 않았던가?
괜한 회의감이 들었다.
‘달라도 너무 다르네.’
수혁은 씁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냐?”
아직도 넋이 반쯤 나가 있는 박상태가 수혁을 불렀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괜히 답답한 마음에 사무실 안에 있고 싶지가 않았다.
분명 좋아해야 할 일이었음에도, 수혁은 가슴속에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얹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