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276화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상이 뒤집어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뉴스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대서특필되는 일도 없었고, 분노에 찬 사람들이 비리를 척결하라며 시위를 벌이는 일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싱겁기까지 했다.
하지만 수혁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일단 불씨는 던져졌다.
방송이 나간 지 고작해야 하루.
아직까지 큰 반응이 없다뿐이지, 움직임은 있었다.
-어제 ‘타인의 삶’ 본 사람?
-나 봄.
-마지막에 김수혁이 말한 거 진짠가?
-거짓말 같지는 않던데. 근데 그거 진짜면…….
-공무원이 또 공무원 한 거지 뭐.
-하여간 이 철밥통 새끼들. 이거 제대로 조사해 봐야 되는 거 아니냐?
-김수혁이 그렇게 심각하게 말할 정도면 진짜 큰일인 것 같던데.
시작은 인터넷 커뮤니티들이었다.
어제 방송을 본 사람들이 그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사나 다큐가 아닌 예능 프로그램이었는지라, 아직까진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수혁의 말은 진짜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영웅이라 불릴 정도로 투철한 직업 정신이 있는 수혁이 그냥 한 말은 아닐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사람들이 방송 화면을 캡처해 열심히 이곳저곳으로 퍼 날랐다.
한 곳이 두 곳이 되고, 두 곳이 네 곳이 됐다.
영상 캡처는 자막과 함께 순식간에 인터넷에 퍼져 나갔다.
방송이 나간 지 사흘쯤 지나자, 슬슬 언론에서도 눈치를 챘다.
짤막한 기사 몇 줄밖에 없었던 수혁의 발언이 재조명되며, 조금씩 기사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얼마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방영된 장면이 논란이 되고 있죠?]
[네, 그렇습니다. 건물의 소방 시설 관리가 전혀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인데요. 이게 문제가 생각보다 큽니다.]
[어떤 문제죠?]
[작게는 공무원과 업체 사이의 비리 문제로 볼 수도 있지만, 크게 보면 시민들의 안전이 위협받는 문제입니다.]
[그 정도입니까?]
[물론입니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최소한의 안전을 지켜주기 위한 것이 소방 시설들입니다. 평상시라면 몰라도 만약 화재가 발생한다면, 그 피해가 상당할 겁니다.]
[그래서 경찰에서 수사를 한다고 들었는데요.]
[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경찰에서 관련자를 소환하는 등의 수사를 시작했습니다.]
뉴스에서는 아나운서와 전문가가 질문과 답변을 반복하며 뉴스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뉴스를 보고 있던 박상태가 고개를 돌려 수혁을 쳐다보며 물었다.
“충분하죠.”
“과연 수사가 제대로 될까?”
서장에게 압력이 들어올 정도로 높은 양반들과도 연관되어 있는 일이었다.
경찰들이 수사한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은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흐지부지될 가능성도 높았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죠. 생각보다 파장도 크니까요. 뭐, 처벌을 안 받는다고 해도 똑같은 일을 더는 저지르지 못할 테고. 그거면 된 거죠.”
비리를 저지른 놈들을 엿 먹이는 것도 좋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된 점검을 하고 부실한 시설들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
박상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벌보다 중요한 건 사람들의 안전이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조건 후자를 택할 정도로 말이다.
“어제 이기석 PD한테 연락이 왔는데요.”
갑작스런 박정우의 말에 수혁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마당발 아니랄까 봐, 이기석 PD와 지금껏 연락하고 있었다니.
“뭐더라? ‘그것도 알고 싶다’에서 이것에 관한 촬영을 할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그알에서?”
박상태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시사 고발 프로그램인 ‘그것도 알고 싶다’에서 방영되는 주제는 언제나 뜨거운 이슈를 만들어낸다.
예능에서 한번 언급된 것과는 차원이 다른 파장이 일어날 것이다.
“그건 잘됐네요.”
수혁이 슬쩍 웃었다.
그저 잘못된 것만 바로잡아도 만족할 판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정말로 큰 엿을 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박상태는 TV를 끄고는 수혁에게 눈짓했다.
따라 나오라는 뜻이었다.
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상태와 함께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9월의 날씨는 아직 더웠다.
한여름의 뜨거움은 조금 가셨지만, 아직은 가을이라기엔 이른 날씨.
수혁은 박상태를 따라 자판기로 향했다.
“블랙?”
“아니, 제가 컵도 사다 드렸는데 왜 그거 안 쓰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셔요?”
“귀찮아, 인마.”
처음에는 곧잘 사용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다시 자판기 커피로 돌아갔다.
“생각해서 사 왔더니…….”
“아, 마실 거야 말 거야?”
“밀크요.”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어쨌든 공짜 커피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기에 수혁은 냉큼 대답했다.
박상태는 혀를 차며 밀크커피를 뽑아 수혁에게 건네주었다.
“준비는 잘 되어가냐?”
“뭐, 준비랄 게 따로 있나요.”
수혁이 특수 구조대로 이동할 날이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순식간에 흘러간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시간이었다.
“하긴 그렇겠네.”
일단 근무지 자체가 이 도시였으니, 이사할 필요도 없었다.
말 그대로 출근 장소만 바뀌는 것에 불과했다.
인수인계야 후임자가 결정되면 그때부터 하면 될 일이었고.
하지만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수혁이 이동하기 전까지 후임자가 배정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너 나가면 한동안은 힘들겠구만.”
그렇지 않아도 수혁의 빈자리는 엄청날 것이다.
그런데 수혁이 나가고 한 명이 부족해진다면?
“지원이야 오긴 하겠지만…….”
수혁의 빈자리를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터.
박상태는 그때를 생각하기만 해도 골치가 아파질 지경이었다.
“죄송해요.”
수혁은 괜히 미안해져 사과했다.
하지만 박상태는 픽- 하고 웃으며 수혁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
수혁이 특수 구조대로 이동하는 것은 예전부터 기정사실화 되었던 일이다.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가는 것도 아니고,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가는 것이었으니, 사과할 필요는 없었다.
박상태는 오히려 수혁을 응원하고 칭찬해 주고 싶었다.
그의 성격상 그런 건 좀 힘들긴 했지만 말이다.
“너 가기 전에 송별회 할 거야.”
“송별회요?”
“같이한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지만, 할 건 해야지.”
햇수로 따지자면 2년이 넘었다.
하지만 그중 많은 시간을 병원에 입원해 있었기에 생각보다 같이 일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럼에도 수혁은 구조 3팀에 없어선 안 될 사람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런 수혁이 떠나는데 송별회를 하지 않을 순 없었다.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자주 볼 텐데요.”
특수 구조대 본부와 신일서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차를 타고 이동하면 20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였던 것이다.
솔직히 만나고자 한다면 일주일에 두세 번은 만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그런데 송별회까지 한다니, 괜히 낯부끄러워졌다.
그렇게 거창하게 헤어지고 다음 날 현장에서 만나면 서로 민망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박상태는 꼭 하고야 말겠다는 기색이었다.
“서장님 명령이야. 너 데리고 가서 꼭 맛있는 거 먹이라고 하시더라.”
웃음이 났다.
어쩔 수 없이 수혁을 보내긴 해야겠지만, 그래도 인연의 끈을 놓고 싶지 않다는 서장의 의지가 강력하게 느껴진 것이다.
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장은 지금껏 수혁에게 많은 편의를 봐주었다.
누군가 특혜라며 딴지를 걸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 서장의 명령이었으니, 한 번쯤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떠나기 전에 같이 모여서 한잔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해요.”
“제수씨도 데리고 나와.”
“은송 씨도요?”
“너 결혼하고 아직 인사도 못 했잖아.”
처갓집 식구들과 친구들과는 만나서 같이 시간을 보냈지만, 대원들과는 만나지 못했다.
대원들이 워낙 바빴기에 따로 시간을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기회에 만나고 좋지. 언제 또 볼지 모르는데.”
“한번 물어볼게요.”
최은송도 바쁘긴 하겠지만, 거절하진 않을 것이다.
그녀 역시 구조 3팀 대원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대신 이번엔 제수씨보고 요리하지 말라고 해.”
박상태는 최은송의 요리를 좋아했다.
여느 한정식집을 가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맛이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것을 거부했다.
“서장님 카드로 먹을 거니까.”
박상태가 씨익 웃었다.
***
소방 시설 관리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알고 싶다’에서 이 주제를 다룬다는 내용이 퍼지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더욱 늘어난 것이다.
덕분에 난리가 난 것은 위쪽 분들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 그것이…….”
하나 방재 산업의 사장, 강선우가 리모컨을 집어 던지며 소리질렀다.
직원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 벽에 부딪힌 리모컨이 박살이 났다.
강선우는 직원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더욱 화가 났는지 씩씩거렸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여직원 한 명이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뭔데!”
“사장님, 무슨 신문사 기자인데 인터뷰 혹시 가능하시냐고…….”
“X랄! 내가 지금 그딴 거 하게 생겼어?”
강선우의 호통에 여직원은 찔끔하며 문을 닫고 나갔다.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하루만 벌써 다섯 번이 넘는 인터뷰 요청이 왔다.
그날 방송에서 나온 건물의 소방 점검을 자신의 회사가 하고 있다는 걸 대체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일이 이 지경이 될 줄이야.’
처음 수혁이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부실한 점검 상태를 지적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코웃음을 쳤다.
미국에서 꽤나 명성을 얻고 유명해진 모양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수혁이 일개 소방관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 말은 곧, 무슨 짓을 해도 자신과 위쪽 분들은 절대 건드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분명 그랬어야만 했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위쪽에선 연락 없었어?”
직원에게 물었다.
강선우의 눈치를 보며 마른침을 삼키고 있던 직원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어, 없었습니다.”
“쯧.”
강선우가 혀를 찼다.
벌써 며칠째 연락이 되질 않았다.
연락이 되어야 대책을 마련하든 말든 할 텐데, 그럴 수가 없었으니 속이 뒤집힐 정도로 답답했다.
‘설마 꼬리를 자르려는 건가?’
어제까지만 해도 위쪽에서 그저 눈에 띄는 움직임을 자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고 보니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꼬리를 자르려는 것 같았다.
‘그게 맞겠지.’
강선우의 의심은 점차 확신으로 바뀌었다.
‘내가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것 같아?’
빠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강선우의 이가 갈렸다.
“너는 장부들 챙겨. 그리고 김 양한테는 계속해서 연락 시도해 보라고 하고.”
“알겠습니다.”
직원은 꽁지가 빠지게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혼자는 절대 안 죽는다.’
강선우의 눈빛에 독기가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