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264화
호텔을 나선 수혁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ENGINE 316.
톰 브래디가 구조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소방서였다.
“엄청 고풍스럽네.”
대부분의 소방서가 직사각형의 멋대가리 없는 한국의 소방서와는 달리, ENGINE 316은 영화에서 보던 고풍스런 디자인으로 지어져 있었다.
그만큼 오래된 곳이라는 이야기겠지만, 관리가 잘 되어 있는지 낡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괜히 신일서와 비교를 한번 해본 수혁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순간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뉴욕 소방관들의 시선이 수혁에게 집중됐다.
어제 새벽 갑자기 떨어진 긴급 명령으로 인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갑자기 낯선 동양인이 방문했으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여긴 관광지가 아닙니다만.”
구조 1팀의 팀장 로이스가 수혁을 향해 다가오며 앞을 가로막았다.
“아, 누구 좀 찾으러 왔는데요.”
수혁이 어색하게 웃으며 로이스를 쳐다봤다.
‘여긴 무슨 괴물들만 모아놨나.’
단순히 몸만 크게 부풀린 게 아니었다.
한 명, 한 명이 극한으로 단련되어 있는 육체의 소유자였다.
평소에 얼마나 훈련을 열심히 하는지 절로 느껴졌다.
“누굴 찾아오셨다고요?”
동양인이 뉴욕 소방서에서 찾을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톰 브래디였던가? 구조대장이라던데요.”
로이스의 눈이 수혁의 대답에 살짝 커졌다.
“대장을 만나러 오셨다고?”
그러고 보니 오늘 출근하자마자, 누군가 자신을 찾아오면 곧장 사무실로 안내해 주라고 했던 톰의 말이 떠올랐다.
그게 설마 동양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로이스는 약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수혁을 훑어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시죠.”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장인 톰이 시킨 일이었으니 안내를 했다.
수혁은 그런 로이스의 뒤를 따라가며 안을 살폈다.
출동 명령이 떨어진 것도 아닌데 소방서 안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대원들은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러댔고, 온갖 장비들이 밖으로 꺼내져 차에 실리고 있었다.
‘명령이 떨어졌나 보네.’
짐 머레이가 FDNY라는 곳에 연락한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국토안보부인지 뭔지 하는 곳에서 명령이 떨어졌던가.
어디가 되었든 소방관들이 테러를 대비해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긍정적인 모습이었다.
똑똑-
“대장, 손님이 왔어.”
한 사무실 앞에 도착한 로이스가 노크하며 수혁의 방문 사실을 알렸다.
“들어와.”
안에서 톰의 음성이 들려왔다.
로이스가 문을 열자 어두운 표정의 톰이 수혁을 반겼다.
“오셨군요.”
톰은 자리에서 일어나 수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는 나가서 계속 준비해.”
톰은 수혁과 악수를 하고는, 멀뚱하게 서 있는 로이스에게 명령했다.
로이스는 수혁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준비해야 할 것이 산더미였기에 곧바로 돌아 나갔다.
“못 주무셨습니까?”
수혁이 톰을 향해 물었다.
톰의 안색은 어둡다 못해 시꺼멓게 죽어 있었다.
마치 불면증에 시달려 며칠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한 사람의 얼굴 같았다.
“그렇게 됐습니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더군요.”
수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테러가 일어난다는 소리를 듣고 잠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짐 머레이 역시 뜬눈으로 밤을 새지 않았던가?
“조금 눈을 붙이는 것이 좋았을 텐데요.”
오늘 하루는 꽤나 길 것이다.
하루 종일 움직여야 하고, 운이 좋지 않다면 구조를 위해 미친 듯이 뛰어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수면이 부족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면 낭패였다.
수혁의 말에 톰이 쓴웃음을 지었다.
실제로 톰은 현재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는 단순히 테러에 대한 불안감으로 잠을 못 이룬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9월 11일.
거기에 테러라는 이야기를 듣자, 환청이 심해졌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수혁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금도 계속해서 톰을 괴롭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을 정도였다.
살려줘, 톰!
제발, 제발 구해줘!
톰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환청에 신경쓰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었지만, 피를 토하는 것 같은 비명을 지르는 동료의 목소리는 그렇게 쉽게 무시할 수가 없었다.
“…어디 안 좋으십니까?”
수혁이 그런 톰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무리 봐도 톰의 현재 상태는 정상 같지 않았던 것이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수혁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톰이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지었다.
별것 아니라는 것을 어필하는 것이었지만, 수혁의 눈엔 왠지 아슬아슬해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오늘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인데, 심지어 톰은 구조대장이었다.
그 말은 곧 이 소방서에 있는 그 누구보다 경험이 많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뉴욕의 지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것이고.
그런 사람을 제외할 순 없었다.
수혁은 애써 톰의 상태를 외면했다.
미안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출동은 언제 하기로 되어 있습니까?”
마라톤 대회는 오후 2시에 시작된다.
지금이 오전 8시니, 앞으로 남은 시간은 여섯 시간.
이제 슬슬 현장에 나가 준비해야만 했다.
“이제 거의 준비가 다 되었을 겁니다. 늦어도 30분 내로는 현장으로 출동할 겁니다.”
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서둘렀으면 좋겠지만, 준비하는 것이 그렇게 말처럼 쉽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재촉하지는 않았다.
“다른 쪽 소식은 아십니까?”
경찰과 국토안보부에서 파견한 요원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그들도 이제 움직이기 시작한다고 들었습니다.”
뉴욕 경찰과 소방관, 그리고 요원들까지 합치면 수백 명의 인원이다.
어쩌면 거의 천 명에 달할지도 모른다.
그만한 인원이 뉴욕 시내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할 것이다.
‘테러범들이 쫄아서 그만뒀으면 좋겠는데.’
그 엄청난 사람들이 수색하고 있으니, 겁을 먹고 테러를 포기할 수도 있었다.
수혁은 제발 그러길 바랐다.
“수혁 씨는 장비 필요 없으십니까?”
방화복이나 봄베 같은 장비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구조용 장비나 탐지 장비는 이미 준비가 끝났으니까.
톰이 말한 것은 제복이었다, 소방관의 자격을 나타내는 제복.
지금처럼 단순히 관광객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것보단, 소방관 제복을 입고 있는 편이 움직이기 훨씬 편할 것이다.
사람들의 협조를 이끌어내기도 쉬웠고.
“주신다면 감사하죠.”
그렇지 않아도 옷을 좀 갈아입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챙겨온 옷 중 가장 편한 옷을 입고 오긴 했지만, 소방관 제복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니까.
톰은 사무실 문을 열고 부하 중 한 명에게 수혁의 몸에 맞는 제복 한 벌을 갖고 오라고 시켰다.
부하는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별다른 의문을 표하지 않고 수혁을 슬쩍 쳐다보고는 옷을 한 벌 가져왔다.
“맞을지 모르겠네요.”
이곳의 대부분이 보디빌더 뺨치는 육체의 소유자들을 생각해 보면…….
왠지 클 것 같았지만 수혁은 일단 옷을 벗고 제복을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 톰이 자신도 모르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단순히 크기로만 따지자면 수혁은 톰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수혁의 육체는 단순히 부풀대로 부푼 근육이 아니었다.
단 1㎜의 낭비도 없는 완벽한 비율의 육체.
마치 장인이 평생을 바쳐 조각한 명작과도 같았다.
대체 어떻게 저런 육체가 존재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톰이 감탄의 눈으로 수혁을 쳐다보고 있는 사이, 수혁이 환복을 마쳤다.
다행히 옷은 수혁에게 잘 맞았다.
수혁 역시 평범한 사람보단 훨씬 건장한 체격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크긴 해도, 크게 거슬리진 않았기에 수혁은 만족했다.
“응?”
수혁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톰의 모습에 무슨 일이냐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톰은 화들짝 놀라며 험험- 하고 헛기침을 했다.
넋을 잃고 남자의 몸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게 민망했던 것이다.
“옷이 맞는 것 같아 다행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수혁은 허공에 팔을 휘둘러도 보고 제자리 뛰기도 몇 번 해본 뒤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슬슬 출동할 때가 된 것 같으니 나가시죠.”
톰이 사무실 문을 열자, 어느새 준비를 마친 소방관들이 도열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톰은 그들의 앞에 서서 수혁을 소개했다.
“오늘 하루 우리와 함께 일할 김수혁 씨다. 한국에서 온 소방관이지.”
소방관들은 갑작스런 소개에 멀뚱히 수혁을 쳐다보다 뭔가 생각났는지 눈을 치켜떴다.
“그 김수혁?”
“푸켓의 영웅!”
생각보다 수혁의 이름을 아는 이들이 많았다.
수혁이 민망한 표정으로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아는 것 같으니 굳이 소개는 따로 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출동하는 편이 나았다.
톰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더는 지체하지 않고 출동을 명령했다.
ENGINE 316 소속의 모든 대원이 한 번에 출동을 시작했다.
지금부터 뉴욕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는 다른 지역에서 지원 형식으로 맡아주기로 했다.
뉴욕시에서도 사활을 걸고 테러를 막아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택한 선택이었다.
수혁은 톰과 함께 구조차에 올라타 센트럴 파크로 향했다.
둘은 마라톤 출발 지점부터 수색을 시작하고, 다른 소방관들은 톰이 나눈 구역별로 이동하기로 했다.
뉴욕 시내를 가로지르던 차량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자신들이 맡은 곳으로 향했다.
“잘돼야 할 텐데.”
톰이 불안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FBI와 NSA의 대테러 전문가들도 투입되었다는 말이 있었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톰은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날의 기억 때문일 수도 있고, 평범하게 테러에 대한 걱정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감일 수도 있지.’
톰을 보는 수혁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톰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수혁은 지금 톰보다 훨씬 더 큰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방금 전까진 평범했던 시야가, 글자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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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요구조자를 최대한 많이 구조하라!
내용 : 뉴욕 시내 한복판에서 테러가 일어난다. 그로 인해 수십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고, 수백 명의 사람이 부상을 입고 고통에 신음할 것이다.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더 많은 사람의 목숨이 위험하다. 최대한 많은 요구조자를 구해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라!
보상 : 대량의 경험치, 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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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본 수혁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발생했던 퀘스트와는 달랐다.
퀘스트는 언제나 이미 발생한 현장에 대해서만 주어졌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을 막으라는 식의 퀘스트였고.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퀘스트에는 분명 테러가 ‘일어난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 말은 곧 자신들이 테러를 막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물론 퀘스트가 100%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실제로 수혁이 죽을 뻔했던 전통 시장 화재에서 퀘스트는 수혁이 모든 요구조자를 구할 수 없을 것이라 했었다.
하지만 목숨을 잃을 각오로 모두를 구해냈고, 그 대가로 훨씬 더 큰 보상을 받아내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번에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혁은 애써 그렇게 희망을 품었다.
‘막을 수 있어. 막아내야만 해.’
그럼에도 수혁의 표정은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