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260화
아침이 밝자, 수혁은 곧장 제임스를 찾았다.
그러곤 지금 당장 짐 머레이와 통화해야 한다고 재촉했다.
갑작스러운 요청이었지만, 제임스는 바로 짐 머레이에게 전화 연결을 해주었다.
“짐.”
[좋은 아침이군.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슨 일인가? 무슨 문제라도 있나?]
왠지 다급해 보이는 수혁의 음성에 짐 머레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수혁은 새벽에 생각했던 것을 말하려다 멈추었다.
전화로 하는 것보단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혹시 어디에 계십니까?”
[보스턴이네만.]
수혁은 보스턴이란 도시를 들어보긴 했지만,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오늘 뉴욕에 오실 수 있으세요?”
수혁의 말에 짐 머레이는 잠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꼭 말씀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흠.]
짐 머레이는 잠시 고민을 했다.
오늘 스케줄이 빡빡했다.
하루 종일 회의와 미팅이 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는 꽤나 중요한 것들도 있어서 쉽사리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하지.]
하지만 짐 머레이는 그 모든 약속을 취소하기로 했다.
수혁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시간은 좀 걸릴 걸세. 처리할 일도 좀 있고, 가는 시간도 있으니.]
비행기를 타고 온다고 해도 두 시간 정도는 잡아야 한다.
비행시간은 그보다 짧겠지만 웨이팅 시간도 생각해야만 했다.
거기다 바쁘게 처리할 일도 있었으니 아무리 빨라도 점심 이후나 되어야 뉴욕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래도 최대한 서둘러 주세요.”
수십 명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었다.
짐 머레이에게는 미안했지만, 그가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그만큼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가능성도 높아진다.
[알았네. 바로 준비하지.]
전화를 끊고 제임스에게 넘겨주자,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수혁을 쳐다봤다.
“무슨 일 있습니까?”
수혁의 태도가 어제부터 조금 이상했다.
저녁을 먹을 때까진 즐거운 모습이었다가, 산책하던 도중부터 급격히 분위기가 안 좋아졌던 것이다.
혹시나 불편한 점이 있던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제임스 때문이 아니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당신은 정말 고마울 정도로 잘해주고 계시니까.”
수혁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제임스는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오늘 일정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짐이 오기 전까지 어디 좀 다녀올 데가 있어요.”
“다녀올 곳이라면?”
“센트럴 파크요.”
제임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수혁의 태도가 관광이나 산책을 위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저는 그냥 데려다주기만 하시고, 제임스는 은송 씨를 맡아주세요.”
“……따로 다닐 생각이십니까?”
신혼여행인데?
혹시 어제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게 둘이 싸워서 그런 건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
“할 일이 있어서요. 은송 씨가 심심하지 않게 잘 좀 부탁드립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의 연속이었다.
그렇다고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거냐며 물을 수도 없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수혁은 최은송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아침 식사도 하지 않고 곧장 센트럴 파크로 향했다.
최고급 리무진에서 내리는 동양인의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지만, 수혁은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는 일단 주변을 살펴보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수혁은 마라톤 코스를 따라 걸으며 ‘위기감지Ⅲ’ 스킬을 사용했다.
벌써부터 폭탄이 설치되어 있을 확률은 적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면서 자신이라면 폭탄을 어디에 설치할지 생각해 보았다.
수십 명의 사람이 동시에 목숨을 잃을 만한 장소.
“……많네.”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데나 폭탄을 갖다 놔도 그 정도의 희생자는 나올 것 같았다.
심지어 내일은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이 운집해 있을 테니 경우의 수가 더욱 늘어난다.
‘결국은 짐하고 이야기를 먼저 해봐야겠군.’
수혁은 마라톤 코스를 따라 계속 이동하며 생각에 잠겼다.
눈으로는 주변을 확인하고, 머릿속은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누군가 갑자기 앞을 막아섰다.
‘응?’
쉴 새 없이 주변을 둘러보던 수혁이 앞을 쳐다봤다.
‘…뭐가 이렇게 커?’
거의 2m는 되어 보이는 키에 얼마 전 같이 예능을 촬영했던 박동석보다도 더 큰 덩치.
수혁이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 가장 큰 거구의 사내였다.
짐 머레이가 보내준 두 명의 흑인 경호원들보다도 더.
갑자기 그런 사람이 앞을 막아서자 수혁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겁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무슨 해코지를 하려고 해도, 솔직히 총을 쏘지 않는 이상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으니까.
그저 이런 사람이 왜 자신을 막았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실례합니다.”
“네?”
그런데 의외로 그의 말투는 정중했다.
위압적인 태도이긴 했지만, 적어도 시비를 거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수혁이 그를 찬찬히 훑어봤다.
‘응?’
처음엔 당황해서 알아보지 못했지만, 거구의 사내가 입고 있는 것은 분명 제복이었다.
그것도 소방관 제복.
‘소방관?’
뉴욕 한복판에서 갑자기 자신을 막아선 사람이 소방관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아니, 그전에 왜 소방관이 자신을 막아선 것일까?
수혁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관광객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로……?”
수혁은 사내가 왠지 자신을 의심스럽다는 듯한 기색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왜지?’
뭔가 의심받을 행동을 했던가?
생각해 봤지만 딱히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을 뿐이니까.
“저는 뉴욕 소방서에서 근무하고 있는 톰 브래디라고 합니다.”
역시 소방관이었다.
“아, 네. 그러시군요.”
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 소방관들의 사진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소방관이라기보단 보디빌더에 가까운 근육의 소유자들.
눈앞의 톰이라는 소방관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나이는 조금 있어 보였지만.
“질문 몇 가지 드려도 되겠습니까?”
톰은 정중하게, 하지만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분위기로 물었다.
그런 톰의 태도에 수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뭡니까?”
수혁은 자신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티를 팍팍 냈다.
하지만 톰은 개의치 않았다.
“아까부터 이 주변을 계속 돌아다니시던데, 이유라도?”
“그냥 관광 중이었습니다.”
“카메라도 없이?”
“꼭 사진을 찍어야만 관광인 것은 아니니까요.”
수혁은 톰의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했다.
실제로 그가 잘못한 것은 없었으니, 꿀릴 것이 없었다.
“마라톤 코스를 따라서 관광이라… 특이하군요.”
톰이 마라톤 코스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수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톰은 그런 수혁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확실히 뭔가 있군.’
톰은 수혁이 수상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질문에 저렇게 반응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톰은 자신도 모르게 수혁에게 한발 다가갔다.
그러곤 수혁의 어깨를 붙잡았다.
일단 붙잡아놓고 물을 생각이었는데, 수혁이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턱-
톰의 손목을 붙잡았다.
‘무슨 돌덩이 같네.’
톰의 팔뚝은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힘도 장사였다.
물론 그렇다 해도 수혁보다 강할 리는 없었다.
톰이 얼굴을 찌푸리며 힘을 줬지만, 그의 팔은 단 1㎜도 움직이지 않았다.
“허?”
톰은 경악했다.
수혁의 덩치가 동양인치고는 괜찮긴 했지만, 자신과는 비교 자체가 되질 않았다.
그런데도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톰이 힘을 잔뜩 주며 안간힘을 써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수혁은 힘을 주는 것 같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넌 뭐냐.”
결국 힘으로 제압하는 것을 포기한 톰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수혁이 그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 잠깐 사이에, 톰의 팔뚝에 새빨간 손바닥 자국이 남았다.
“그건 제가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수혁은 흥분하지 않고 물었다.
“네 모습이 수상해서.”
조금 전까지 보여줬던 정중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의심과 우려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대체 뭐가 수상하다는 겁니까?”
수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라톤 대회 전날, 코스를 따라가며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수상하지 않으면 뭐가 수상할까?”
그런 말을 하면서도 톰은 자신의 말이 억지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 역시 자신이 과거의 그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톰의 말에 수혁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설마하니 이런 걸로 이상한 오해를 받을 줄은 생각도 못 한 것이다.
“이봐요.”
수혁은 한숨을 내쉬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러곤 김수혁이라는 이름을 검색해 톰에게 보여주었다.
“저는 한국의 소방관입니다. 여행을 왔다가 내일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기에 주변을 한번 확인해 본 것뿐이고요. 그냥 직업병 같은 겁니다.”
수혁의 스마트폰을 본 톰의 눈이 커졌다.
수혁의 기사와 사진들이 엄청나게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이 동양인이, 푸켓에서 영웅이라 불렸던 바로 그 소방관이라는 것을.
당시 톰도 푸켓으로 지원 나간 미국 구조대원들 중 하나였다.
물론 일반 대원이 아닌 대장의 자격으로 갔었다.
그리고 그 참혹한 현장에서 수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홀로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구하고, BBC에서 영웅이라고까지 칭한 한국의 소방관.
톰은 그런 수혁에게 존경스럽다는 감정까지 품었다.
게다가 그 소방관이 세계 최강 소방관 대회에서 기록을 몽땅 갈아엎은 것 역시 유명하지 않던가?
그런데 그 사람이 눈앞에 있다고?
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스마트폰과 수혁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동양인의 얼굴은 구별하기가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대놓고 있는데 몰라볼 정도는 아니었다.
“푸켓의 영웅.”
톰이 중얼거리자 수혁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별명은 조금 오글거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알아봤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네, 맞습니다. 그게 접니다.”
수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톰의 얼굴에서 의심이 사라졌다.
의심?
눈 녹듯이 사라졌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톰은 곧바로 수혁에게 사과했다.
수혁이 어설프게 내뱉은 변명을 믿은 것이다.
그 역시 어딘가 낯선 장소를 가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자신의 직업과 관련된 것들이었으니까.
대피로나 소방시설 같은 것 말이다.
수혁이 말한 대로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톰이 사과하자 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뭘 의심했는지는 몰라도, 오해가 풀렸으니 되었다.
지금은 이렇게 실랑이를 할 시간이 없었다.
수혁이 슬쩍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1시 30분.
시간이 꽤나 흘렀다.
잠시 후면 짐 머레이가 도착할 때가 되었다.
“괜찮습니다. 더 할 말 없으면 전 이만.”
오해도 풀렸겠다, 슬슬 짐 머레이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로 이동해야만 했다.
수혁은 톰에게 대충 인사하고는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거기 두 사람. 무슨 일입니까?”
‘이런, 젠장!’
경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