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247화
집을 나선 수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날씨가 영 좋지 못했던 것이다.
‘비가 오려나?’
올여름은 비가 그리 자주 오지 않았다.
남쪽엔 조금 온 것 같았지만,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지역은 바짝 말라가고 있었다.
그걸 생각하면 누군가에게 비는 생명과도 같은 단비겠지만…….
솔직히 구조대원인 수혁에게는 그리 반갑지 않았다.
비가 오면 평소보다도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꽤 바쁘겠네.’
수혁은 직감적으로 오늘 하루가 고단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어제 이기석 PD와 대책을 미리 세워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아무런 상의도 없이 오늘을 맞이했다면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이미 촬영 계획은 다 세워뒀는데, 출동이 너무 잦아 찍을 수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수혁은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봤다.
확실히 당장에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쏟아지기 전에 가야겠다.”
수혁은 비가 내리기 전에 얼른 차에 올라타고는 출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에 도착한 수혁은 주차한 뒤, 차에서 내렸다.
“왔냐?”
때마침 도착한 박정우가 수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 일찍 오셨네요?”
구조 3팀 내에서 박정우는 항상 마지막에 출근했다.
그래서 가끔 눈치를 먹는 역할이었는데, 웬일로 오늘은 그 누구보다도 빨리 출근한 것이 신기했다.
“오늘이 촬영 마지막 날이잖아.”
김예슬을 비롯한 여자 연예인들을 오늘이 지나면 더는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박정우는 아쉬움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출근한 것이었고.
수혁은 그런 박정우를 보며 픽- 하고 웃었다.
“웃어? 그래, 너는 결혼할 여자 있다 이거지?”
박정우가 수혁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하하, 그런 건 아니고요.”
사실 수혁은 박정우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정우가 평생을 함께할 여자를 만난다는 것.
그리고 수혁이 죽기 전까지, 둘은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까지.
수혁은 당시 그런 박정우를 보며 많이 부러워 했었다.
이번 생에서는 많은 것이 변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수혁은 왠지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도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수혁이 웃으며 말하자, 박정우가 반색하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감인지, 뭔지 하는 그거냐?”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귓등으로 들었겠지만, 이건 수혁의 말이다.
지금 당장 길거리로 나가 돗자리를 펴도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수혁의 말.
당연히 박정우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뭐, 그렇게 생각하셔도 되고요.”
수혁이 웃으며 말하자 박정우가 희희낙락했다.
“뭐가 그렇게 좋아?”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먼저 출근한 박상태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혼자 실실 웃고 있는 박정우가 이상했는지, 인사 대신 질문을 먼저 했다.
“안 가르쳐 드려요.”
하지만 박정우는 대답을 거부했다
“뭐 인마?”
“아무리 팀장님이라도 못 가르쳐 드립니다. 괜히 부정탈라.”
“이 새끼가?”
괜히 놀림을 당한 것 같은 기분에 박상태가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커피 타오겠습니다!”
그것을 본 박정우가 다시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갔고, 그 모습에 수혁이 웃음을 터트렸다.
“대체 저놈은 언제 철이 들는지.”
구조대 막내인 수혁의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지만, 박상태는 수혁을 자신과 동등한 위치, 혹은 그 이상으로 여기고 있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정우 선배한테 좀 잘해주세요.”
수혁이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더 어떻게 잘해주냐?”
평소엔 대원들과 놀리고 핀잔을 주기 일쑤긴 했지만, 그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애정표현이었다.
본래는 수혁이 당했어야 할 일이었지만, 솔직히 수혁에게 그런 장난을 칠 수가 없었기에 박정우가 표적이 된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수혁이었기에, 그저 고개를 저으며 웃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올 때 되지 않았나?”
박상태가 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동시에, 박상태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사무실 문이 열리고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타인의 삶’ 제작진들이었다.
“오늘은 좀 늦으셨습니다?”
“날씨가 안 좋다 보니, 사람들이 죄다 차를 끌고 나온 모양입니다. 차가 좀 막혀서…….”
이기석 PD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긴 오늘 날씨가 별로긴 하더군요.”
박상태가 혀를 찼다.
그 역시 비가 오는 날씨는 좋아하지 않았다.
“오늘은 좀 바쁠 것 같으니 준비 단단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박상태는 그들에게 경고해 주고는 제작진들의 손에 이끌려 마이크를 착용하러 밖으로 나갔다.
“저게 무슨 말입니까?”
이기석 PD는 박상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혁에게 물었다.
“비가 오면 출동이 잦거든요. 교통사고부터 시작해서…….”
“아, 그런 뜻이었군요.”
이기석 PD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왠지 모르게 기대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수혁에게는 미안한 말이었지만, 그들이 바쁘면 바쁠수록 더 좋은 그림이 나올 확률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도 충분하긴 하지만, 쓸 게 많으면 많을수록 좋긴 하지.’
이기석 PD는 표정 관리하며 수혁 쪽으로 다가갔다.
“일단 마이크부터 착용하시죠.”
수혁의 마이크는 그가 직접 챙겼다.
그러는 사이 대원들과 출연자들이 하나씩 도착했다.
이윽고 모두 출근을 완료하자, 마지막 날 촬영이 시작됐다.
“체인톱 가져와!”
박상태의 외침에, 수혁이 김예슬과 함께 구조차로 뛰어갔다.
“이거 들고 계세요.”
수혁은 체인톱과 부수 장비들을 꺼내 가벼운 것들을 김예슬에게 넘겼다.
“윽!”
하지만 아무리 가벼운 것이라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무게가 꽤 나가는 것들이었다.
김예슬은 하마터면 그것들을 떨어뜨릴 뻔했다.
간신히 힘을 줘서 장비를 든 김예슬을 본 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시다.”
수혁이 다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교통사고 현장.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교통사고 신고가 잇따라 발생했다.
지금도 4중 추돌 사고가 나서 급히 출동한 상태.
사고가 난 차량 중 하나에 운전자가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유압 스프레다로 문을 열긴 했지만, 다리가 끼어 꺼낼 수가 없는 상황.
결국 박상태는 톱으로 앞 유리를 제거해 꺼내기로 결정했다.
“가져왔습니다.”
“바로 연결하고, 수혁이는 여기 붙어.”
비가 장대처럼 내렸다.
이런 빗속에서는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소모된다.
평소라면 그리 힘들지 않은 현장이었겠지만, 비 때문인지 대원들의 움직임이 조금 굼떴다.
“서둘러!”
박상태가 대원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요구조자의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 이 순간에도 신고 접수가 계속되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도 교통 사고가 일어난 것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요구조자를 구조한 뒤, 다시 그쪽으로 출동해야만 했다.
수혁은 체인톱을 들고는 박상태와 함께 유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가가가가각-!
유리가 잘려 나가며 조각들이 튀었다.
“조금 뒤로 물러서요.”
수혁이 옆에서 쳐다보고 있는 김예슬과 VJ에게 경고했다.
괜히 유리 조각이 튀어 다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고는 빠르게 유리를 잘라냈다.
어느 정도 틈이 만들어지자, 마음이 급했던 수혁은 그대로 손을 집어 넣었다.
“야, 너 지금 뭐 하는……?”
그것을 본 박상태가 놀라며 말리려 했지만, 수혁의 행동이 한 발 빨랐다.
콰가각-!
수혁은 손으로 유리를 잡아 뜯었다.
그러자 차량 앞 유리가 그대로 분리가 되며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것을 본 출연자와 제작진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과연 저게 사람이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수혁은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차 내부로 들어가 요구조자를 살폈다.
차가 찌그러지며 다리가 끼인 상태였다.
다리 쪽 상처가 깊어 출혈이 심해 보였다.
‘의식은 없고.’
상황이 그리 여유롭진 않았다.
수혁은 잠시 카메라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손을 밑으로 내렸다.
그러곤 카메라가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힘을 주었다.
뿌득- 하는 소리와 함께, 요구조자의 다리를 짓누르고 있던 곳이 벌어졌다.
“꺼내겠습니다!”
수혁이 박상태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수혁이 무슨 일을 했는지 대충 눈치를 챈 박상태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는 꼼짝도 하지 않던 요구조자가 너무도 쉽게 밖으로 꺼내졌다.
“천천히, 천천히.”
요구조자에게 최대한 충격이 덜 가도록 조심스럽게 밖으로 꺼냈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구급대가 곧장 요구조자를 구급차로 데리고 갔다.
“수고하셨습니다!”
시애가 구조 3팀을 향해 인사하고는 몸을 돌려 뛰어갔다.
“남은 요구조자는?”
박상태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없습니다. 모두 병원으로 이송됐어요.”
수혁의 대답에 박상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우린 곧바로 움직이자.”
정리는 경찰에게 맡기고, 또다시 출동할 시간이었다.
오늘 하루가 바쁠 것이란 수혁의 예상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벌써 다섯 번째 교통 사고 출동.
아직 퇴근 시간까지는 다섯 시간 이상 남아 있었다.
“……정말 오늘 추가 촬영을 해야 돼요?”
시애가 울상을 지었다.
전날, 이기석 PD에게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추가 촬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어제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막상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도저히 힘이 나질 않았다.
그것은 다른 출연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하루 종일 빗속에서 움직였더니, 녹초가 된 상태였다.
피곤이 가득한 얼굴로 이기석 PD를 쳐다보자, 그는 난감한 듯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지치긴 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 촬영을 포기할 순 없었다.
“조금만 힘을 냅시다.”
결국은 이렇게 독려하는 수밖에.
출연자들 역시 큰 기대를 하진 않았는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급하게 결정된 일이긴 했지만, 이미 어제 이야기가 된 일이었으니 이제 와 발을 뺄 수도 없었다.
“저녁 먹을 시간은 있는 거죠?”
시애가 최대한 불쌍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물었다.
“물론이죠!”
이기석 PD는 당연하다는 듯 크게 소리쳤다.
“맛있는 저녁 드시라고, 밥차까지 불렀습니다.”
이모들이 하는 식당 밥은 맛이 있었지만, 메뉴가 너무 한정적이었다.
부족한 예산 안에서 해결을 하려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이기석 PD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마지막 저녁만큼은 든든하게 먹이기 위해 밥차를 불렀다.
이기석 PD의 촬영 계획을 들은 예능국장이 흔쾌히 추가 제작비를 지원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촬영이 끝나면 회식도 준비되어 있으니까, 조금만 더 부탁드립니다.”
회식이라는 말에 출연자들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졌다.
“PD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어쩔 수 없네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김예슬이 웃으며 말했다.
이왕 촬영하는 것, 축 처져서 하는 것보단 즐겁게 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고생하시는 대신, 최대한 재미있게 편집해 보겠습니다.”
이기석 PD는 출연자들에게 약속했다.
최대한 재밌게 방송을 내보내, 이들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릴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이기석 PD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 촬영만 잘 끝내면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