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244화
“오늘 하루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기석 PD는 환하게 웃으며 사람들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는 오늘 기분이 아주 좋았다.
처음 이번 편을 기획했을 때 예상했던 것처럼, 괜찮은 그림들이 꽤나 많이 나온 것이다.
이 정도면 시청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은 제가 사는 거니, 마음껏 드세요.”
이기석 PD가 지갑을 꺼내 그 안에서 법인카드를 빼 들었다.
“오, 법카!”
그 카드의 정체를 알고 있는 제작진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먹고 죽자!”
그들은 닥치는 대로 고기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대신 술은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내일도 아침부터 촬영이 이어진다.
그러니 술을 너무 많이 마실 순 없었다.
“알겠습니다!”
사람들은 크게 아쉬운 표정이 아니었다.
대원들이야 본래 일을 끝내고 술을 마시는 걸 그리 즐겨하지 않았고, 출연자나 제작진이나 몸이 너무 힘들어 그럴 힘도 없었던 것이다.
대신 그들은 오늘 소모한 체력을 보충하려고 작정한 듯, 미친 듯이 고기를 흡입했다.
“수혁 씨.”
수혁 역시 오랜만에 먹는 삼겹살에 정신을 팔려 있다가, 이기석 PD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이기석 PD는 각 팀장들과 같은 테이블에 있었다.
“잠시만요.”
수혁은 젓가락에 있던 고기를 입에 넣고는 우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기석 PD가 소주 대신 사이다를 들어 수혁의 잔에 채워주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요.”
출연자들이야 죽을 맛이었겠지만, 수혁에게는 그리 힘든 하루가 아니었다.
수혁은 멋쩍게 웃으며 잔에 담긴 사이다를 마셨다.
“저놈은 괴물이라, 지금도 쌩쌩할 겁니다.”
박상태가 그런 수혁을 보며 말했다.
“아, 그 말 좀 그만해요.”
수혁이 투덜거렸다.
“인마, 괴물을 괴물이라 그러지, 뭐라 하냐?”
박상태의 말에 다른 팀장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현장에서의 수혁을 보고, 괴물이란 단어 말고는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에휴.”
수혁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말이 욕이 아닌 칭찬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괴물이라 불릴 때마다 괜히 찔렸다.
“예슬 씨랑 동석 씨는 좀 어떻습니까?”
이기석 PD가 구조대에 배치된 두 사람에 대해 물어봤다.
수혁과 구조대가 메인이긴 했지만, 그는 구조대만 확인할 수가 없었다.
다른 출연자들도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음, 다들 잘해주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두 사람이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오히려 작지만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거 다행이네요.”
제작진과 출연자들에게 사전에 교육하긴 했지만, 혹여나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했었다.
그런데 잘해주고 있다니 마음이 놓였다.
“그럼 남은 이틀도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대한 신경쓸 테니까요.”
박상태가 이기석 PD의 말을 받았다.
“그래도 괜찮은 장면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구조대에서도 몇 가지 건질 게 있었고, 의외로 구급대에서 많이 나왔더군요.”
이기석 PD는 구급대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그도 구급대가 하는 일을 그저 환자 이송에만 국한시켜 생각했던 것이다.
시애가 처음 했던 생각처럼 말이다.
그런데 의외로 스토리가 꽤 많았다.
소방관의 열악한 환경을 보여줄 수 있는 장면도 꽤 있었고.
잘만 편집한다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나올 것 같았다.
수혁은 그것을 바랐기에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구급대 분들이 고생이 많으시긴 하죠.”
수혁의 말에 구급대 팀장이 허허하며 웃었다.
“경험도 못 해본 놈이 그걸 어떻게 알어?”
“겪어봐야만 아나요? 옆에서 보기만 해도 고생하시는 게 다 보이는데.”
구급대 팀장은 그런 수혁이 기특했는지, 눈웃음을 지으며 고기 한 점을 건넸다.
“앗, 잘 먹겠습니다.”
회식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하루 사이 친해진 출연자들과 대원들이 왁자지껄 떠들었고, 고기는 끝도 없이 들어갔다.
그때, 한참을 즐겁게 먹고 마시던 이기석 PD가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전화가 왔었습니다.”
그 말에 수혁과 박상태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어떤 전화 말입니까?”
화재 진압대 팀장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게…….”
그는 주위를 한 번 살펴보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비리에 대한 제보라고 하더군요.”
‘역시.’
수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박상태가 제보한 것 같았다.
본래는 내일까지 타이밍을 보다 하려고 했지만, 촬영일이 3일밖에 되지 않다 보니 조금 서두른 듯했다.
“비리라고요?”
수혁과 박상태를 제외한 다른 두 팀장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비리 제보라니?
설마하니 신일서가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말인가?
둘의 표정을 본 이기석 PD가 그런 것은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신일서에 관한 건 아니고, 소방 설비에 대한 것들이었습니다.”
“아!”
두 팀장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 실시한 소방 시설 점검을 그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땠는지도.
자연스럽게 둘의 시선이 수혁과 박상태를 향했다.
“혹시 알고 있으셨습니까?”
이기석 PD가 묻자, 다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참.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구급대 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전직 소방관들과 고위 공직자들이 관계되어 있는 일이었다.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이기석 PD는 그 제보 전화를 받고 뭔가 번뜩이는 영감을 받았다.
재미도 좋고, 웃음도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 고발에 대한 내용이 들어가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만약 그 제보가 사실이라면, 그래서 그것이 자신의 프로그램으로 인해 밝혀진다면?
‘시청률은 걱정 없다.’
이기석 PD는 기대감이 가득한 눈으로 팀장들을 쳐다봤다.
“사실입니다.”
“박 팀장!”
민감한 문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박상태의 모습에, 다른 팀장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숨길 게 뭐가 있어? 자꾸 그렇게 잘못된 걸 숨기려고 하니까, 이런 일이 끊이질 않는 거야.”
후환이 두려워 쉬쉬하다가는 절대로 끊어낼 수가 없었다.
다른 두 팀장 역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결국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거 부끄럽습니다.”
“혹시 자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기석 PD가 부탁했다.
그리고 박상태는 망설이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한 제보다.
그러니 뜸을 들일 이유가 없었다.
박상태는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요즘 들어 소방 설비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고,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위에서 점검을 지시했던 것.
그리고 점검 시에 발견한 것들과 그 이후에 벌어진 일까지.
박상태의 말을 듣던 이기석 PD의 얼굴이 조금씩 심각해졌다.
“그거 큰 문제 아닙니까?”
“큰 문제죠.”
자칫 잘못했다간 사람들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나갈 수도 있는 일이란 뜻이었다.
“……그래도 소방 공무원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믿음직한 공무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딜 가나 물 흐리는 미꾸라지는 있게 마련이니까요.”
한두 명.
언제나 그런 한두 명 때문에 조직 전체가 욕을 먹는다.
“이 내용을 방송에 내보내도 괜찮겠습니까?”
이기석 PD가 본론을 꺼냈다.
자신에게 제보가 들어왔고, 예능 PD이긴 하지만 절대 그냥 넘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상의도 하지 않고 그냥 내보낼 수도 없었다.
이기석 PD는 그렇게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탁을 드리고 싶군요.”
박상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두 팀장 역시,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잘됐지. 그 X같은 놈들. 이렇게라도 엿을 먹일 수 있으니.”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질하는 놈들은 뚝배기가 깨져 봐야 잘못인 줄 알거다.”
세 팀장이 모두 허락하자, 이기석 PD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 방송하실 생각입니까?”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수혁이 물었다.
‘타인의 삶’은 뉴스나 시사프로그램이 아닌, 예능이다.
뉴스처럼 보도할 순 없다는 뜻이었다.
“일단 제가 조금 생각해 둔 게 있습니다만…….”
이기석 PD는 제보를 받자마자 시나리오를 하나 썼다.
사실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다.
그저 게임 하나를 추가하는 것뿐이었으니까.
수혁은 이기석 PD의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허술하긴 했다.
생각처럼 잘 흘러가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고.
‘그래도 괜찮네.’
이 예능으로 단번에 바꿀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상, 운만 띄워줘도 그것이 퍼져 나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거기다 불을 조금 지펴주기만 하면 금상첨화겠지.’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위에서도 지금처럼 계속 묵과할 순 없을 것이다.
공무원들은 그런 것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니까.
“그렇게 한번 해봅시다.”
박상태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이기석 PD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했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엿 좀 먹여보자고.”
다른 두 팀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좋습니다. 그럼 그에 대한 촬영은 이틀 뒤, 마지막 날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내일 갑자기 일정을 바꾸는 것은 무리였다.
제대로 된 대본도 써야 했고, 제작진과 출연자들에게도 알려야 했다.
“그럼 그 건은 저에게 맡겨두시고, 오늘은 좀 즐기시죠.”
불판 위에 다시 고기가 올라갔다.
지글거리며 익어가는 고기를 보며 수혁이 미소를 지었다.
“으으…….”
“피곤하시죠?”
다음 날 출근한 수혁은 의자에 앉아 앓는 소리를 내고 있는 김예슬을 보며 피식 웃었다.
“몸이 제 몸 같지가 않네요.”
그리 힘든 일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온몸이 삐그덕거렸다.
“안 쓰던 근육을 써서 그럴 겁니다.”
옆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박동석이 웃으며 대화에 참여했다.
“동석 씨는 괜찮으세요?”
“사실 저도 죽겠네요.”
박동석이 팔을 이리저리 휘돌리며 말했다.
‘엄청 굵네.’
수혁은 그런 박동석의 팔뚝을 보며 감탄했다.
“동석 씨도 힘든데 저는 어떻겠어요.”
김예슬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촬영이 이틀이나 남아 있다는 생각에 도저히 의욕이 나질 않았다.
“그래도 어제는 편한 날이었습니다. 다행히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으니까요.”
만약 화재나 대형 재난이 일어났다면, 지금쯤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제가 안 힘든 날이었다고요?”
김예슬이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실제로 화재 현장에 나가보시면, 어제는 천국이었다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그래도 화재는 그렇게 자주 일어나진 않죠?”
“뭐, 매일 일어나는 건 아니죠. 운이 좋으면 촬영하는 동안 화재 출동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
[화재 출동, 화재 출동.]
물론 수혁은 그렇게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