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242화
“화재 현장 밖으로 빠져나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여름의 열기 때문에, 잔뜩 올랐던 체온은 떨어지질 않습니다.”
그렇게 탈진, 탈수해서 쓰러지는 소방관들이 많다.
중간중간 수분을 보충하고, 휴식을 취함에도, 이 계절에 화재 출동하면 쓰러지는 대원들이 꼭 발생한다.
‘그리고 그중에는…….’
다신 일어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박상태는 굳이 그런 얘기까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예슬과 박동석은 왠지 숙연해졌다.
“뭐, 어쨌든. 지금은 이렇게 에어컨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 아닙니까.”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박상태가 웃으며 밝은 음성으로 말을 끝냈다.
두 배우와 대원들은 바깥에서 한껏 달아올랐던 몸을 식히며 그렇게 복귀했다.
“기회가 생길 것 같냐?”
박상태가 조용히 물었다.
마이크도 꺼둔 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까지 자리를 옮긴 상태였음에도, 박상태의 음성은 낮았다.
“글쎄요. 생기지 않을까요?”
“인마, 그렇게 확신이 없으면 어떻게 해?”
박상태가 조금 초조해하자, 수혁은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아직 첫날 점심시간도 안 됐어요. 촬영은 3일 동안이니, 그사이엔 기회가 생길 거예요.”
위쪽에서 저지르는 비리와 불법 행위를 언제, 어떤 방식으로 터트려야 할까?
화재가 발생하고, 그곳에 출동했다가 소방 시설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모습이 찍힌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화재가 운 좋게 지금 타이밍에 일어날 확률은 높지 않았다.
그렇다고 방화를 저지를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 박상태로선 답답할 뿐이었다.
“무슨 생각이 있어서 방송 출연 허락한 거 아니었어?”
“그렇죠.”
“대체 그 생각이란 게 뭔데?”
박상태는 수혁이 뭔가 방법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귀찮음과 불편함을 감수하고 방송 출연에 동의한 것이었고.
그런데 지금 수혁의 모습을 보면, 그런 건 처음부터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하려고 해도 불이 나야 시도라도 하죠.”
그건 그랬다.
신일서의 출동이 아무리 잦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모두 화재 출동인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화재 출동은 그 빈도가 구조 출동이나 구급 출동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화재 자체가 그렇게 빈번하게 일어나는 재난은 아니었으니까.
“명색이 소방관이 돼서 불 좀 나라고 빌 수도 없는 일이니까. 조금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수혁의 말에 박상태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역시 맞는 말이었다.
자신들의 뜻을 이루자고, 애꿎은 사람들이 희생될지도 모르는 일을 바라는 것도 이상했다.
“결국은 하늘에 맡기고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말이군.”
기발한 계획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실망으로 바뀌었다.
그런 박상태의 표정을 본 수혁이 머리를 긁적였다.
“뭐, 정 안 되면 쓸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고요.”
그 말에 박상태의 눈이 반짝였다.
“그게 뭔데?”
박상태가 다급하게 물었지만, 수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야, 말 좀 해봐라. 나 답답해서 죽는 꼴 보고 싶냐?”
박상태가 가슴을 치며 인상을 쓰자, 수혁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대답해 주기로 했다.
“사실 별건 아니에요.”
박상태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보다 훨씬 초라한 방법이었다.
“익명의 제보… 라는 게 있었죠?”
“제보?”
수혁이 대답에 박상태가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잔뜩 기대하게 만들어놓고는, 익명의 제보라니.
“그게 방법이었냐?”
“네.”
수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박상태는 고개를 저었다.
현장에 있을 때는 그렇게 믿음직한 녀석이, 이렇게 가끔 허당 짓을 하곤 했다.
“그러니까 익명의 제보를 해서 그걸 우리가 알아본다, 이 말이지?”
“정확해요.”
“그게 될 것 같냐?”
박상태가 한숨을 내쉬었다.
“백날 제보해 봐라. 그게 먹히나.”
신일서에 전화해서 제보한다고 해도, 자신들을 그것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알아본다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묵살되고 말 테니 말이다.
“이번에는 다르잖아요.”
“다르긴 뭐가 달라?”
박상태가 눈살을 찌푸리자, 수혁은 반대로 웃으며 한쪽을 가리켰다.
박상태의 시선이 수혁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그곳에는 ‘타인의 삶’ 제작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방송이요.”
이번 계획의 목적은 비리를 밝혀내서 위에 보고하는 것이 아니었다.
방송을 통해 사회적인 이슈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니 위에서 막든, 묵살하든 상관이 없었다.
수혁의 말에 박상태가 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마 안 될 거다.”
박상태는 부정적이었다.
“왜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
“서장님.”
수혁이 반론을 하려 했지만, 박상태가 내뱉은 한 단어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서장님 성격 알지? 위쪽에 찍히는 걸 죽는 것보다 싫어하시는 거.”
물론이었다.
이전 생부터 겪어왔었으니까.
“만약 제보가 들어온다고 해도, 서장님은 아마 허락해 주지 않으실 거다.”
서장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수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서장의 성격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수혁이 고민하고 있자, 이번엔 박상태가 아이디어를 냈다.
“어떻게요?”
“익명의 제보는 하되, 다른 쪽에 하는 거지.”
수혁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쪽이라면 어디요?”
설마하니 다른 소방서나 상급 기관을 얘기하는 건 아닐 테고.
“저쪽.”
이번엔 박상태가 한쪽을 가리켰다.
조금 전 수혁이 가리켰던 곳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것을 확인한 수혁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거 좋네요. 저기다 제보하면 서장님도 막아설 명분이 없을 테니까.”
“그렇지.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돼.”
그랬다간 의혹만 더 커질 뿐이었으니, 서장도 못 이기는 척 눈을 감아줄 것이다.
방법을 찾은 수혁과 박상태가 마주 보며 미소지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여기서 뭐 하세요?”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박상태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어, 예슬 씨는 여기까지 어떻게?”
김예슬이었다.
“전화 좀 하려고요.”
김예슬이 손에 든 스마트폰을 들어 보였다.
하긴 사무실은 카메라가 잔뜩 있었으니, 사적인 전화를 마음 놓고 할 순 없을 것이다.
조용하고 사람들의 귀가 없는 곳을 찾다 보니 이곳까지 온 것이었고.
“저희도 그냥 얘기 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시구나.”
김예슬은 왠지 불편해 보이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카메라랑 마이크가 불편하신가 보네.’
자신들이야 언제나 카메라와 함께하니 어색하지 않았지만, 대원들은 아닐 것이다.
그것을 이해한 김예슬이 두 사람을 향해 파이팅 포즈를 취했다.
“힘내세요!”
“아, 네에.”
뜬금없는 행동에 당황했지만,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 * *
구급차 안.
시애는 마른침을 삼키며 눈앞에 누워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피…….’
이렇게 많은 피를 직접 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라오스에서 크게 다치긴 했지만, 당시 시애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는지라 기억도 제대로 나질 않았고.
그 외에 가장 많은 피를 본 것은 요리하다 부엌칼에 손가락을 베였을 때였다.
“시애 씨, 그쪽에서 거즈 좀 꺼내 주시겠어요?”
남자 구급대원 한 명이 시애에게 손을 뻗으며 부탁했다.
“아, 네!”
시애는 정신 차리고는, 교육받았던 대로 구급차 한쪽에 비치되어 있는 거즈를 꺼내 대원에게 건네주었다.
“고맙습니다.”
대원은 거즈를 받아 침착하게 출혈을 막기 시작했다.
“시애야…….”
한편 시애와 같이 구급대에 배치를 받은 개그우먼은 새파랗게 질린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어떻게 그리 멀쩡하냐는 듯 시애를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시애는 그녀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저럴 거면 왜 이 프로그램을 찍겠다고 한 건질 모르겠네.’
교육받을 때도 그랬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자신의 개인기를 보여주기 급급했다.
덕분에 분위기는 좋았지만, 프로그램의 컨셉을 완벽하게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죄송한데, 시애 씨. 이것도 좀 부탁드립니다.”
구급대원은 출혈을 막고 있던 거즈를 시애에게 내밀었다.
피를 잔뜩 먹은 탓에 붉게 물든 거즈.
시애는 잠시 멈칫- 했지만, 이내 그것을 받아 한쪽으로 치웠다.
그 모습을 본 구급대원의 얼굴에 대견하다는 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부상도 심하지 않고, 출혈도 그리 많지 않아서.”
“이, 이게 심하지 않은 거라고요?”
시애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녀가 보기에 눈앞의 사람은 이미 반송장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눈을 감고 신음을 하고 있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죠. 정강이가 골절되긴 했지만 후유증은 거의 없을 테고, 구조도 빨리 돼서 실혈도 적으니까요.”
시애는 구급대원의 말을 들으며 깨달았다.
그와 자신은 심각하다는 것의 기준 자체가 달랐다.
“심각하지 않다는 말은, 무사할 거란 뜻이죠?”
시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구급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건 병원에 가봐야 알겠지만, 최소한 제가 보기엔 한 달 정도 입원하면 충분히 완쾌하고도 남을 정도입니다.”
그 한 달이란 시간마저도 그저 뼈가 붙는 시간이었고.
구급대원의 대답에 시애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누워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나이는 고작해야 삼십대 초반 정도.
그는 통증이 심한지 눈을 질끈 감은 채 연신 신음을 하고 있었다.
시애는 잠시 망설이다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곤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괜찮으실 거래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으세요. 금방 병원에 데려다 드릴 테니까.”
손이 남자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시애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것은 지금이 촬영 중이기 때문에 한 행동도 아니었고,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한 행동은 더욱더 아니었다.
시애는 라오스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정신을 잃어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들은 얘기로는 수혁이 자신을 등에 업고 정글을 가로질렀다고 했다.
당시 수혁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감히 자신이 수혁을 이해할 순 없겠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왠지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시애가 현재 느끼고 있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걱정.
그리고 무사히 병원까지 데리고 가겠다는 다짐.
그 크기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 시애는 그때의 수혁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구급대원 했어도 잘했겠네.’
그 모습을 구급대원이 옆에서 따뜻한 눈으로 쳐다봤다.
혹시나 피가 묻을까 무서워 한쪽 구석에 몸을 구기고 있는 여자와는 비교하는 것도 미안할 지경이었다.
‘3일 동안 많이 가르쳐 봐야겠군.’
촬영은 고작 3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간 이곳에서 뭔가를 배워 간다면…….
혹시 아는가?
다른 곳에서 그것을 활용해 사람을 살릴 수 있을지.
“시애 씨가 그렇게 걱정해 주고 있으니, 분명 괜찮을 겁니다.”
대원의 말에 시애가 깜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아, 아니, 이건 그러니까…….”
시애가 당황하자, 대원이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도 그렇게만 해주세요. 분명 환자에게 큰 힘이 될 테니까.”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진심이 느껴지는 대원의 모습에 시애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