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239화
“어서 와요.”
이기석 PD가 환하게 웃으며 시애를 맞아주었다.
그의 입장에서 시애는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성적이 그리 좋지 않고 힘들기만 한 자신의 예능에 선뜻 출연을 결정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수혁의 섭외도 도와줬으니 말이다.
하루 종일 등에 업고 돌아다닐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안녕하세요, PD님.”
시애는 가장 먼저 그런 이기석 PD에게 인사했다.
그러곤 곧장 수혁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오빠!”
“어, 왔어?”
시애는 며칠간 수혁과 함께 촬영한다는 사실이 기쁜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일찍 오셨네요? 아직 출근 시간까진 조금 남은 걸로 알고 있는데.”
“누가 출근 시간에 맞춰서 출근해. 좀 더 일찍 와야지. 거기다 나는 아직 팀 막내라서.”
팀 내 누구도 수혁을 막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수혁이 지금껏 보여준 능력과 행동들이 너무도 대단했으니까.
나이만 제외하고 본다면 베테랑 구조대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는 너는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수혁이 시애를 향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오히려 일찍 온 것은 자신이 아니라 시애였다.
출연자들은 자신들보다 조금 여유가 있었음에도 벌써 왔다.
대원들조차 수혁과 박상태를 제외하면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은 이른 시간에 말이다.
“저도 막내라서요.”
시애가 혀를 내밀며 귀엽게 웃었다.
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본 출연자들의 명단을 떠올려 보면, 확실히 시애보다 어린 사람은 없었다.
경력도 마찬가지였고.
“일단 준비부터 하시죠.”
이기석 PD는 둘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시애에게 마이크를 채워주기 시작했다.
“오늘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네요.”
이기석 PD가 살짝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조금 그럴 것 같네요.”
소방관의 일이라는 것이 그랬다.
평소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하고, 체력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힘들 수밖에 없는 일.
불과 재난과 싸운다는 것이 단순히 체력만 좋아서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날씨까지 찜통이었으니 현장에 한 번 나가면 그대로 탈진할 가능성도 있었다.
“최대한 신경써 보겠습니다.”
위험한 곳에는 일체 접근을 불허하고, 방송용으로 쓰일 수 있을 정도로만.
이기석 PD가 원하는 것도 그 정도였고, 수혁이 허락해 줄 수 있는 선도 딱 거기까지였다.
“부탁드립니다.”
이기석 PD는 수혁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김수혁! 일 시작할 준비해!”
그때 박상태가 수혁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조금 이따 보자.”
수혁은 이기석 PD와 시애에게 인사하고는 사무실로 향했다.
“어이구야.”
사무실 안에는 카메라 천지였다.
다큐멘터리 촬영 때도 카메라들을 설치하긴 했었지만, 지금은 그때완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개인 책상에도 하나씩 놓여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래가지곤 방귀도 함부로 못 뀌겠다.”
박상태도 살짝 불편한 표정으로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평생을 카메라 사이에서 사는 연예인과 다르게, 그들은 일반인이었다.
당연히 부담스럽고 불편할 수밖에.
“3일만 참아요.”
수혁 역시 박상태와 같은 마음이긴 했지만, 계획한 일을 실행하려면 감수해야만 했다.
“그래야지.”
박상태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서장님도 좋아하시더라.”
촬영이 결정되고,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던 서장을 떠올린 박상태가 헛웃음을 지었다.
“원래 이런 거 좋아하시잖아요.”
출세욕과 명예욕이 높은 서장으로선, 자신의 서에서 이런 촬영을 한다는 것이 기꺼울 것이다.
방송에 좋은 장면이 많이 나간다면, 자신과 신일서의 평판도 덩달아 올라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괜히 좀 죄송하네.”
하지만 박상태는 그런 서장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서장의 기대와는 달리, 자신들은 현 소방계의 어두운 면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만약 그것이 방송을 타게 되면, 서장은 높으신 분들에게 꽤나 시달림을 당할 게 분명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괜히 미안해졌다.
“서장님도 이해하시겠죠.”
위쪽에서 그 일을 그냥 덮으라는 지시가 내려왔을 때, 서장 역시 분노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도 했다.
결국은 끗발이 딸려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지만, 그 역시 그냥 넘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을 것이다.
눈총을 좀 받는 대가로 그놈들에게 엿을 먹이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수만 있다면, 서장은 이해해 줄 것이다.
수혁이 아는 서장은 그런 성격이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박상태가 고개를 흔들며 상념을 털어냈다.
“일단은 근무 준비부터 끝내자고.”
“네.”
수혁과 박상태가 주섬주섬 책상을 정리하며 준비하고 있을 때, 대원들이 하나씩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와, 밖에 보셨어요? 무슨 사람이……. 아니, 여긴 카메라가 왜 이렇게 많아?”
박정우가 사무실로 들어오다 카메라들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거 방귀도 함부…….”
“뒷북이야.”
어쩜 이렇게 생각하는 것들이 다 똑같은지.
박정우는 말을 하다 박상태의 핀잔에 입을 다물었다.
수혁이 픽- 하고 웃었다.
“촬영이 몇 시부터 시작이라고 했지?”
대충 준비를 먼저 마친 박상태가 수혁을 향해 물었다.
“촬영은 이미 하고 있고,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건 한 시간쯤 후부터로 알고 있어요.”
분위기를 보아하니 출연자들도 슬슬 도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오프닝을 촬영하고, 그 뒤에 대원들의 소개를 할 것 같았다.
“그럼 조금 시간이 있는 거네?”
“그렇긴 하죠.”
“그럼 장비 점검 좀 미리 해두자.”
예능이긴 하지만, 그래도 공중파 방송이다.
그런 곳에 장비 상태가 엉망인 상태로 나갈 순 없었다.
“다들 장비 점검 시작해.”
박상태의 명령에 대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 전에 했는데.”
박정우만이 조용히 투덜거릴 뿐이었다.
딴에는 혼잣말을 한다고 한 것이었는데, 사무실 안에서 그것을 듣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넌 그럼 앞으로 밥 처먹지 마.”
“네?”
박상태의 말에 박정우가 깜짝 놀라며 그를 쳐다봤다.
“어제도 밥 먹었는데 왜 또 먹어? 앞으론 먹지 마, 이 새끼야.”
박정우가 울상을 지었다.
대원들은 그런 박정우를 보곤 웃으며 장비 점검을 시작했다.
‘음, 이상 없고.’
수혁의 장비는 완벽, 그 자체였다.
매일같이 점검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수혁이 고개를 돌려 대원들의 모습을 살폈다.
“음?”
그러던 중 수혁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재한 선배.”
“응? 왜?”
갑자기 수혁이 자신을 부르자, 이재한이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봤다.
“봄베요. 밸브 헤드 쪽 한번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이재한의 봄베에 위험 요소 표시가 되어 있었다.
정확히 무슨 문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수혁이 가리킨 곳에 문제가 있는 게 확실했다.
“어, 이게 왜?”
수혁의 말대로 밸브 헤드를 확인한 이재한의 눈이 커졌다.
“무슨 일인데?”
“헤드에 크랙이 생겼네요.”
“뭐?”
이재한의 말에 박상태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 장비 관리 똑바로 안 해?”
이재한에게로 다가간 박상태가, 봄베 헤드 부분에 균열이 가 있는 것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이재한이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됐다.”
박상태는 그런 이재한에게 한마디 쏘아붙이려다, 한숨을 내쉬고는 돌아갔다.
사실 이건 이재한의 관리 소홀 때문에 벌어진 문제가 아니었다.
단순히 장비의 노후 때문이었다.
일전에 짐 머레이가 선물해 준 장비 중에 봄베는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보급품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게 연식이 오래된 것들이었다.
아무리 장비 관리를 열심히 한다고 해도, 노후로 인한 내구도 하락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박상태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것이었고.
“재한이는 밸브 교체하고, 다른 놈들도 이상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대원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하지만 다행히 더 이상의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다.
수혁의 눈에도 별다른 위험 요소는 보이지 않았고.
“박상태 팀장님!”
어느 정도 장비 점검이 마무리 되었을 때쯤, 이기석 PD가 박상태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 됐나 보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어느새 수혁이 이야기한 한 시간이 흘러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박상태가 소리를 지르자, 이기석 PD가 찾아왔다.
“이제 슬슬 여러분을 소개할 시간이 되었는데……. 많이 바쁘십니까?”
대원들이 뭔가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자, 이기석 PD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최대한 일을 하는 데 방해하지 않기로 했으니, 촬영 시간을 조금 늦춰야 하나? 고민하는 듯했다.
“아니요. 이제 다 끝났습니다.”
박상태의 말에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그럼 바로 촬영 준비해도 괜찮을까요?”
“그러시죠.”
박상태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작진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대원들의 옷과 머리를 정리해 주고는, 마이크의 상태까지 체크했다.
“준비되셨으면 나가시죠.”
다 괜찮다는 사인이 오자 이기석 PD는 대원들을 데리고 밖으로 향했다.
그곳에선 한창 오프닝 촬영이 진행 중이었다.
“와! 김예슬도 있네?”
박정우의 놀란 음성이 들렸다.
“김예슬이 누군데?”
“모르세요? 요즘 뜨는 배우잖아요.”
수혁도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여배우였다.
‘확실히 배우라 그런가, 아우라가 다르네.’
예전에 했던 촬영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확실히 배우들은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박준환도 있고, 유나도 있네. 눈이 호강하는구나.”
박정우가 연신 감탄하자, 이기석 PD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섭외에는 꽤나 공을 들였습니다.”
출연자들의 이름만으로도 시청률이 어느 정도는 보장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고작 시청률 몇 퍼센트 상승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 편을 통해서 확실히 자리매김을 해야 해.’
경력이 걸린 일이었다.
이번 편을 통해 확실히 자리를 잡지 않으면, 프로그램 폐지가 논의될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막아야만 했다.
“슬슬 준비하시죠.”
오프닝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잠시 후면 출연자들이 신일서의 대원들을 부를 것이다.
그때 들어가서 자신들의 소개를 하면 된다.
“그런데 저희만 합니까?”
이번 촬영은 화재 진압대와 구급대도 포함된다.
그런데 나와 있는 것은 구조 3팀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모든 분을 한 번에 모시기엔 시간이 좀 부족해서요. 어차피 메인은 구조대이니, 일단 여러분만 먼저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박상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모두가 나가면 사람들로 미어터질 게 분명했다.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저희가 앞에서 대략적인 상황을 가르쳐 드릴 테니, 거기에 맞춰서 행동하시면 됩니다.”
이기석 PD가 카메라 옆에 앉아 있는 작가 한 명을 가리켰다.
작가는 스케치북 하나를 들고 계속해서 뭔가를 써서 출연자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출연자들은 그것을 확인하며 멘트를 치고 있었고.
“생방도 아니니까 실수하셔도 상관없고요.”
이기석 PD는 대원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덕분에 대원들의 표정은 처음보다 많이 편안해졌다.
“자, 그럼 들어가시죠.”
시간이 됐다.
“신일서의 구조대원 분들을 소개합니다!”
출연자 중 한 명이 크게 소리쳤고, 수혁과 대원들이 앞으로 걸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