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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큐 시스템-236화 (236/425)

레스큐 시스템 236화

다음 날.

“김수혁.”

출근한 수혁을 박상태가 조용히 불렀다.

수혁은 자신의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박상태를 쳐다봤다.

아침 인사를 하기 위해 부른 것치고는 표정이 심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수혁이 물었다.

분명 어제저녁, 집에서 최은송이 해준 요리를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헤어졌다.

그런데 고작 몇 시간 만에 저렇게 심각해질 일이 뭐가 있을까?

‘떠오르는 건 하나밖에 없는데 말이지.’

수혁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런 수혁의 생각은 맞았다.

“소방 시설 점검 보고에 대한 지침이 내려왔다.”

“쯧.”

박상태의 대답을 듣자마자 수혁이 혀를 찼다.

저런 표정으로 그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결과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뜻을 의미했다.

“손떼란다, X발.”

박상태가 씹어뱉듯 욕설을 내뱉었다.

“그게 다예요? 손떼라고?”

“그래. 이제부턴 자기들이 알아서 처리한다고, 신경쓰지 말란다. 이게 뭔 개짓거린지.”

말만 들어보면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말 그대로 위쪽에서 처리한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수혁과 박상태는 잘 알고 있었다.

손떼라는 말 자체가 이 사건을 그냥 덮어두겠다는 의미로 자주 쓰인다는 것을 말이다.

“서장님은 뭐라고 하세요?”

수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박상태가 고개를 저었다.

“서장님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곳에서부터 내려온 지시야.”

그러니까 서장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말이었다.

“음…….”

수혁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위에서 지시가 내려온 이상, 더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따로 조사해서 재보고를 올린다고 해도 지금과 별다를 것 없는 결과가 나올 게 뻔했다.

아니, 애초에 처벌할 생각이었다면 지금 올린 보고만으로도 충분했다.

몇몇 설비 점검 회사들이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명확한 증거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수혁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수혁이 평범한 소방관이었다면, 지시가 내려온 대로 신경을 끊고 손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혁은 평범한 소방관이 아니었다.

“정말 이대로 손뗄 생각은 아니죠?”

“미쳤냐?”

이건 무단 횡단이나 노상 방뇨 같은 사소한 불법행위가 아니다.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이 달려 있는 일이었다.

소방관이 그걸 보고 그냥 못 본 척 눈을 감는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자신들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지시? X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내가 언론에 꼰질러서라도 이 일 키운다.”

박상태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수혁은 그런 박상태를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혹시나 위의 압박에 굴복하지나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 박상태는 박상태였다.

“일단 언론은 좀 참아주세요.”

박상태의 말대로 언론에 흘리는 게 가장 빠른 길일 수도 있었다.

공무원의 특성상, 논란이 일어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기 때문에 한 번 이슈가 되면 처리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 방법은 꼬리 자르기나 다름없었다.

강선우를 비롯한 관련 회사들의 사장들, 그리고 공무원 하급 공무원들 몇몇이 징계를 받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정작 이 일로 이득을 보고, 사건을 덮으려는 자들은 언제나 그렇듯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테고.

수혁은 절대로 그런 꼴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언론을 이용한다면, 다른 방법과 함께 병행해서 해야 효과가 더 컸다.

“잡으려면 다 잡아야죠.”

“……방법이 있냐?”

박상태는 수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이런 불법행위를 말 한마디로 덮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고위 공직자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그런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한번 시도는 해봐야죠.”

만약 잘되지 않으면, 그때 가서 언론에 터트려도 된다.

수혁은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는지 떠올려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당연하게도 짐 머레이였다.

그가 나선다면 이런 일을 해결하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행안부 장관을 비롯한 여러 정치인과도 선이 닿아 있는 데다, 그가 가진 재산만으로도 엄청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수혁은 짐 머레이라는 이름은 일단 머릿속에서 지웠다.

현재 그는 미국으로 돌아간 상태.

그런 짐 머레이를 부탁 한 가지 하기 위해 불러들이기엔 너무도 미안했다.

그리고 더는 빚을 지고 싶지도 않았고.

‘그럼 뭐가 있을까…….’

수혁의 머릿속에 수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수혁이 맺은 인연들이었다.

그중엔 방송 관계자들도 있었고, 연예인이나 소방청의 높은 분들도 있었다.

그때였다.

그들을 생각하며 어떻게 이 일을 해결할지 떠올리던 수혁의 스마트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응?”

지금 이 시간에 연락할 사람이 없었기에, 수혁이 의아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수혁의 눈이 살짝 커졌다.

스마트폰 액정에는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여보세요?”

수혁이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한껏 들뜬 대답이 들려왔다.

[오빠! 오랜만이에요!]

버블걸스의 시애였다.

* * *

“괜찮을까요?”

시애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눈앞의 PD를 쳐다봤다.

“수혁 씨와 친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긴 한데…….”

시애가 자신 없는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는 요즘 스케줄이 너무 바빠 수혁에게 연락을 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PD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시애를 향해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시애가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이게 뭐라고 PD가 아이돌에게 고개를 숙인단 말인가?

‘기분이 나쁘진 않지만…….’

항상 갑질을 일삼던 PD에게 이런 대접을 받는 게 신기하긴 했다.

하지만 부담스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시애는 한숨을 내쉬며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부탁은 해볼게요.”

시애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하자, PD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시애는 난감하기 그지없는 기색이었다.

‘무슨 낯으로 연락을 하지?’

마지막으로 연락한 것이 작년이었다.

수혁이 심각한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해외 스케줄로 인해 그 소식을 늦게 들은 탓에 연락하는 것이 늦었다.

그마저도 수혁이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는지라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다.

그 이후로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수혁에게 연락할 시간이 없었고.

‘핑계지 뭐.’

수혁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다.

아무리 바쁘다고는 하지만, 그 잠깐의 시간을 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시애는 조금씩 미루다 결국 지금까지 수혁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에휴, 어떻게 한담?’

수혁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이렇게 오랜만에 전화하는 것도, 그리고 그 연락의 이유가 절대 쉽지 않은 부탁을 하는 것이란 사실도.

수혁을 볼 낯이 없었다.

하지만 PD가 이렇게 부탁을 하는데,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기에 시애는 전화를 드는 수밖에 없었다.

시애는 심호흡을 하곤, 수혁의 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몇 초 후.

실로 오랜만에 듣는 수혁의 음성이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여보세요?]

그것을 들은 시애는 방금 전까지의 미안함이 사라지고, 반가움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오빠! 오랜만이에요!”

자신도 모르게 잔뜩 들뜬 목소리로 수혁을 불렀다.

곧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수혁은 그녀의 우려와는 반대로, 반갑게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바쁜데 어떻게 연락했어?]

예전과 다를 바 없는 태도.

시애는 그것이 기뻤다.

“죄송해요, 오빠. 제가 그동안 너무 바빠서 연락을 못 했어요.”

[죄송은 무슨. 너 바쁜 건 우리나라 사람이 다 알고 있는데.]

버블걸스는 지금 최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예전에 수혁과 함께 출연했던 예능 이후로 관심을 끌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국민 아이돌이란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뜬 것이었다.

덕분에 팬들이 그녀들의 건강을 걱정할 정도로 가혹한 스케줄을 소화해 내고 있었다.

연예인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는 수혁이었지만, 버블걸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정도였다.

때문에 수혁은 시애가 연락하지 않는다고 해서 전혀 섭섭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쓰러워했으면 했지.

“몸은 좀 어때요?”

[빨리도 물어본다.]

수혁이 키득하며 웃었다.

퇴원한 지가 언제인데 지금 와서 그걸 물어본단 말인가?

“죄송해요오.”

시애가 다시 한 번 사과하자, 수혁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몸은 다 나았지. 날아다닐 정도로 다 회복됐어.]

“아, 다행이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음에도, 시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참, 나 은송 씨랑 결혼하기로 했다.]

“네? 언니랑요? 와!”

갑작스런 수혁의 결혼 소식에 시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방 뛰기 시작했다.

“정말요? 언제요? 어디에서? 나 가도 되죠?”

흥분한 시애가 질문을 쏟아냈고, 수혁은 그에 대한 대답을 모두 해주었다.

그렇기 수다가 몇 분간 이어지고.

잠시 소강상태가 되자 수혁이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야?]

지금 시간은 오전 9시를 조금 넘긴 상태.

안부 전화를 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시애는 잠시 머뭇하다, 눈을 질끈 감고는 본론을 꺼냈다.

“오빠, 저……. 혹시 예능 한 번 출연하실 생각 없어요?”

PD가 한 부탁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번에 버블걸스가 출연하게 된 예능에 수혁도 동반 출연을 제안해 달라는 것.

‘이거면 돼.’

시애는 수혁이 이런 것을 싫어하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예전 다큐멘터리를 찍다 사고가 난 이후로는 방송 출연을 모두 고사했다.

때문에 시애는 부탁을 한 번 하는 것으로 자신의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했다.

수혁은 한참 동안이나 대답이 없었다.

괜히 불안해진 시애가 대신 입을 열었다.

“저, 오빠. 불편하시면 거절하셔도 돼요. 저도 그냥 부탁받은 거라…….”

[네 부탁인데. 한 번 하지 뭐.]

“안 하셔도……. 네?”

그런데 돌아온 수혁의 대답은 시애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것이었다.

[찍자고, 예능.]

“정말요? 왜요?”

시애의 눈이 커졌다.

[네가 부탁해 놓고 왜냐고 묻는 거야, 지금?]

시애의 당황한 음성에 수혁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그렇긴 하지만.”

설마하니 수혁이 승낙할 줄이야.

[디테일한 얘기는 오늘 퇴근하고 하자. 저녁에 시간 돼?]

“네, 네! 오늘은 저녁에 스케줄 없어요!”

시애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오늘 저녁에 은송 씨랑 같이 밥이나 먹으면서 얘기하자.]

“좋아요!”

오랜만에 수혁과 최은송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시애는 들뜨기 시작했다.

[퇴근하고 연락할게.]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통화가 끝났다.

시애는 멍하니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일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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