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234화
며칠이 흘렀다.
그간 수혁은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출동, 구조, 복귀, 서류 작업, 장비 점검, 퇴근.
집으로 돌아와서는 최은송이 해준 저녁을 먹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소방 시설 점검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원래부터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으니 수혁은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렸다.
만약 위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고 조치를 취하면 좋고,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수혁이 직접 나서면 된다.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장난질을 친 놈들은 죗값을 받게 될 것이다.
수혁은 그때를 기다리며, 다른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이제 슬슬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소파에 누워 영화를 보고 있던 수혁이 최은송에게 말했다.
“음…….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수혁이 프러포즈를 한 지도 2주가 다 되어간다.
서로의 마음은 확인했지만, 아직 남은 산이 하나 더 있었다.
지금까진 미뤄두었지만, 이젠 미룰 수가 없었다.
수혁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최은송과 결혼하고 싶었다.
“부모님께 한번 여쭤볼게요, 언제 시간 되시는지.”
“떨리네요.”
수혁이 엄살을 피우자 최은송이 웃었다.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걸요?”
최은송의 아버지인 최문식은 결코 녹록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수혁을 인정한다.
뛰어난 소방관인 것을 인정하고, 사람들이 영웅이라 부를 정도로 대단한 일을 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사위로는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에야 최은송의 얼굴을 봐서 참고 있었지만, 만약 결혼 얘기가 나온다면…….
‘아마 나를 죽이려고 하시지 않을까?’
최문식의 딱딱한 얼굴이 떠오르자, 수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각오는 되어 있는데, 사실 좀 무섭긴 하네요.”
아무리 그래도 최문식이 결혼을 반대하진 않을 것이다.
애초에 어떻게든 반대할 생각이었다면, 동거 자체를 허락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수혁은 겁이 났다.
최은송이 풋- 하고 웃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도둑질하려고 하는데 당연히 겁이 나야죠.”
“하긴 그렇네요. 도둑질하는데 겁이 안 나면 이상하지.”
수혁 역시 최은송을 마주보며 웃었다.
“수혁 씨 비번에 약속을 잡는 게 좋겠죠?”
“아무 때나 상관없긴 한데, 그렇게 해주면 감사하죠.”
시간이야 박상태나 서장에게 말하면 빼주긴 할 것이다.
둘 다 수혁의 말이라면 끔뻑 죽는 사람들이고, 결혼이라는 중대사였으니 그 정도 시간을 빼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비번에 약속이 잡히는 편이 가장 좋긴 했다.
수혁이 빠진 사이,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 손을 쓸 방도가 없었으니 말이다.
“어디 보자……. 수혁 씨 비번이 언제더라?”
최은송이 스마트폰을 꺼내 캘린더를 확인했다.
“이번 주 금요일이네요.”
“그래요?”
수혁보다 최은송이 그의 스케줄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럼 금요일 점심때로 약속 잡을게요.”
“그렇게 해요.”
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섭다고 해서 언제까지 미루고만 있을 순 없었다.
어서 허락받고, 최은송과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다.
지금 생활과 크게 변하는 것은 없겠지만, 법적인 부부 사이가 되는 것과 단순한 동거의 차이는 컸으니…….
“힘내요.”
최은송은 그날이 기대된다는 듯 붉게 상기된 얼굴로 수혁에게 힘을 불어 넣어 주었다.
“무슨 일이야 있겠어요?”
대답하는 수혁의 눈동자는 떨리고 있었다.
“상견례?”
박상태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상견례는 아니죠. 제가 부모님이 안계신데.”
“아, 그러네. 그럼 뭔데?”
“허락받아야죠.”
“아하!”
박상태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그 자리에 자신도 갔으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거기 가면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장면을 볼 수 있는 거냐?”
“무릎 꿇고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이런 거요?”
김강식과 이재한 역시 낄낄거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혹시 압니까? 김치 싸대기 같은 거 맞을지.”
박정우도 한 발 걸치며 농을 걸었다.
‘이 아저씨들이 진짜…….’
수혁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뭐, 그런 본인 역시 뼛속까지 아재이긴 했지만 말이다.
“언젠데?”
“이번 주 금요일이요. 점심때 만나 뵙기로 했어요.”
“비번이네?”
“네. 은송 씨가 그날로 맞추기로 했어요.”
박상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비번인데 그걸 뭐 하러 보고해?”
근무 날이었으면 당연히 보고하고 월차나 반차를 사용해야겠지만, 비번인 이상 굳이 보고할 필요가 없었다.
박상태가 의문스럽게 묻자, 수혁이 머뭇거렸다.
“왜, 뭐 도와줄 거 있어?”
수혁의 태도가 이상하자 박상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그냥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수혁에게는 가족이 없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형제나 일가친척도 없었다.
고아원 출신이었으니까.
애초에 자신의 뿌리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 수혁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바로 구조 3팀의 대원들이었다.
가족과 다름없는 사람들.
남들은 유난 떤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수혁은 그런 사람들에게 일생일대의 중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박상태가 수혁을 가만히 쳐다봤다.
수혁은 자세하게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왠지 수혁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지금도 괜히 쭈뼛거리며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니, 눈치채는 게 더욱 쉬웠다.
“그래, 고맙다.”
박상태가 수혁을 향해 웃어주었다.
수혁 역시 그런 박상태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번 산만 넘으면 결혼이네.”
“자신은 있고? 내가 전에 보니까 그 양반 호락호락해 보이질 않던데.”
“그렇긴 하죠.”
“내가 도와줄까?”
“어떻게요?”
“너랑 같이 무릎이라도 꿇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냐?”
박상태가 농담하며 으하하! 하고 웃었다.
“오, 좋네요. 저희도 같이 가서 무릎 꿇을까요?”
“한 명보단 여섯 명이 낫지.”
“시커먼 남자 여섯이서 무릎 꿇고 따님을 주십시오, 하면 볼 만 하겠네.”
떠들썩해진 사무실을 보며 수혁이 머리를 긁적였다.
가족이 없으면 어떤가?
‘여기에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동료들이 있는데.’
수혁이 밝게 웃었다.
“안 돼.”
최문식은 단칼에 거절했다.
“아버님…….”
설마하니 아직 결혼의 ‘결’ 자도 꺼내지 않았는데 앉자마자 안 된다고 할 줄은 몰랐다.
“누가 자네 아버님인가?”
클리셰도 이런 클리셰가 없었다.
“아빠도 참,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안 된대.”
최은송도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최문식을 달랬다.
“크흠.”
최문식은 자신이 너무 성급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어머님은 어디 계세요?”
예약한 식당에 최문식만 왔기에 수혁이 최은송에게 조용히 물었다.
“두 분이 어쩜 그리 똑같은지……. 결혼 얘기도 안 꺼냈는데, 허락하신대요. 그러니까 굳이 이 자리에 올 필요 없다면서 안 오셨어요.”
수혁이 속으로 허허 웃었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하는 행동도 똑같았다.
비록 대답은 서로 정반대였지만 말이다.
“나는 허락한 적 없다.”
최은송의 말을 엿들은 최문식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결혼만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수혁은 그런 최문식을 보며 속으로 미소 지었다.
최문식의 행동은 단순한 투정에 불과했다.
딸을 빼앗기기 싫다는 생각 때문에 보이는 행동.
하지만 정말로 최은송과의 결혼을 허락해주지 않으려고 했다면, 처음부터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을 터.
수혁은 최문식이 이곳에 왔다는 것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아버님.”
수혁이 다시 한 번 최문식을 불렀다.
방금 전과 달리 아버님이란 말에 최문식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수혁은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은송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진지한 수혁의 음성에 최문식이 눈을 감았다.
1분, 2분, 3분…….
무려 10분간이나 최문식은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수혁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지만, 최은송이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최문식의 팔을 살짝 잡았다.
“아빠.”
최은송이 부르자, 최문식이 눈을 떴다.
“나는 자네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네.”
수혁은 대답하지 않고 이어질 최문식의 말을 기다렸다.
“내 그쪽 일은 잘 알지 못하지만, 칭찬도 자자하더군.”
그럴 것이다.
수혁 덕분에 대한민국 소방관의 이미지가 그 어떤 때보다도 좋아졌으니까.
국내뿐만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그렇다.
푸켓에서의 일과 독일의 훈장 덕분이었다.
국위 선양을 톡톡히 하고 있었으니 위쪽에서 예뻐할 수밖에.
“인물도 좋고.”
수혁은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미남은 아니었다.
하지만 큰 키와 균형 잡힌 몸매, 깨끗한 피부는 그 누가 보더라도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인맥 역시 평범하지 않지.”
수혁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최문식은 짐 머레이가 수혁과 긴밀한 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짐 머레이가 제안한 특수 구조대 자체가 수혁을 위한 선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최문식조차 대체 재산이 얼마인지 파악할 수 없는 짐 머레이가 수혁을 그 누구보다 아낀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서라도 그것 하나만으로도 수혁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내 딸을 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겠네만…….”
최문식은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 어딜 가도 수혁과 같은 사윗감을 찾아보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최문식은 내키지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자네는 소방관이지.”
소방관.
그것도 목숨을 담보로 다른 사람들을 구하러 재난 현장을 뛰어드는 구조대원.
최문식은 아직도 신일역 붕괴 사고 때 눈물을 흘리고 있던 딸의 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최은송이 그렇게 바라는 것이니 허락을 해줄까 하다가도, 그날의 그 모습이 떠오르면 마음이 돌아선다.
“하아.”
최문식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문젤세.”
결국은 허락해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로 사랑한다는데, 고작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둘의 사이를 갈라놓을 만큼 최문식은 매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쉽게 허락해 줄 생각도 없었다.
최소한 수혁이 자신을 설득할 정도는 되어야만 고개를 끄덕일 생각이었다.
“아버님 말씀대로 저는 소방관입니다.”
수혁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는, 제가 소방관이란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소방관이란 직업을 비하하는 것이 아닐세.”
최문식은 수혁이 자신의 말을 오해했다고 생각해 급히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서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혹여나 자신이 잘못될 것을 염려하는 것이 분명했다.
당연히 할 수 있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수혁은 자신이 있었다.
“저는 죽지 않습니다.”
“그게 사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약속드립니다. 저는 절대로 은송 씨를 두고 혼자 죽지 않습니다.”
최문식은 수혁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깊었다.
그리고 한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약속을 기필코 지키고야 말겠다는 의지만이 엿보였다.
한참 동안이나 그런 수혁의 눈을 쳐다보고 있던 최문식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식사부터 하지.”
최은송이 수혁을 향해 작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