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210화
‘저길 뚫고 간다고?’
슈미츠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독일에서 훈련받을 때, 수도 없이 많이 본 화재다.
직접 방화복을 입고 그사이를 뛰어다닌 적도 있었다.
그래서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얼마든지 불구덩이를 헤치며 요구조자를 구하러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렇게 많이 봐온 모습이었음에도, 다리가 움직여지질 않았다.
수혁은 그런 슈미츠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눈치를 챘다.
갓 배치받은 신입들이라면 항상 겪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고.’
수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첫 출동이었던 쇼핑몰 화재.
그때는 화재가 거의 진압되어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수혁은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슈미츠도 그때의 수혁과 같은 느낌일 것이다.
온몸이 굳어버리고, 마치 불길이 자신을 덮쳐 오는 듯한 두려움이 엄습해오는 듯한 느낌.
하지만 수혁은 슈미츠를 향해 별다른 말을 해주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써 줄 정도로 여유가 있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이건 슈미츠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어떻게 진입할 생각이지?”
대원이 수혁에게 물었다.
특수 구조대의 베테랑 대원인 그가 보기에도 이 불길을 뚫고 들어가는 것은 위험해 보였다.
억지로 뚫으려면 가능이야 하겠지만, 지금은 슈미츠라는 짐덩이가 있는 상황.
만약 불길 안에서 슈미츠가 조금이라도 지체를 한다면, 셋 모두가 위험해질 수가 있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쉽사리 진입을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냥 뚫고 갑니다.”
수혁의 단호한 말에 대원의 눈이 커졌다.
“……저 녀석은?”
대원이 슈미츠를 가리켰다.
슈미츠는 둘의 대화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돌렸다.
“알아서 잘 따라올 겁니다.”
슈미츠는 뛰어나다.
그것은 옆에서 직접 지켜봤던 수혁이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처음으로 겪어보는 현장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얼어 있긴 했지만, 막상 뛰어들면 금세 적응할 것이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슈미츠의 옆에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불길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슈미츠 한 명 정도라면 수혁이 어떻게든 보호를 해줄 수 있었다.
수혁은 차라리 슈미츠가 안에서 실수를 저지르길 바랐다.
그러면 그것을 통해 조금이라도 뭔가를 더 느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원은 머뭇거렸다.
수혁의 실력을 믿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위험한 방법이었다.
선배이자, 한 명의 소방관으로서, 절대 허락해 줄 수 없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지. 아무리 생각해도 저 녀석을 데리고 저 불을 뚫고 진입하는 건 불가능해.”
“음.”
대원의 반대에 수혁이 신음했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슈미츠에게 그토록 팀워크의 중요성을 강조해 놓고는 자신이 그것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일 순 없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죠.”
수혁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일서의 구조 3팀이었다면 아무 말 없이 수혁의 말대로 따랐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수십, 수백 번 수혁의 능력을 눈으로 확인했다.
아무리 위험해 보이는 행동이라도, 수혁이라면 할 수 있을 것이란 확고한 믿음이 박혀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대원은 아니다.
그간 소문으로는 많이 듣긴 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구해낸 수혁의 활약상이었으니, 자연스레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덕분에 수혁에 대한 것을 꽤나 많이 알고 있었다.
수혁이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했는지.
그렇지만 그는 소문으로 듣기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눈으로 확인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구조 3팀과 다르게 전적으로 믿고 맡길 정도로 수혁을 신뢰하진 않았다.
수혁은 그런 대원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와 입장이 바뀌었다면, 수혁 역시 똑같이 말했을 테니까.
“좋아, 같이 고민해 보자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김갑수가 있었으니 요구조자들이 당장 위험한 상황에 빠지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가하게 웃고 떠들며 움직일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수혁과 대원은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화재 진압을 먼저 하고, 불길이 잦아들었을 때 진입하는 건?”
“너무 늦어요.”
“우회할 길은 없을까?”
“아예 없는 건 아닌데…….”
다른 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돌아간다 해도 상황이 달라질 것은 없었다.
불길은 이곳에서만 타오르고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화전을 연결해서 뿌리며 진입하는 건요?”
소화전 한 개로 진압을 하기엔 턱없이 부족할 정도로 불길은 거셌다.
하지만 자신들이 지나갈 정도의 역할을 하는 건 가능할 수도 있었다.
“엄호 방수 가능해?”
기본적으론 구조대원들 역시 호스를 잡고 방수하는 법을 숙지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화재 진압대보다 그 실력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구조대와 화재 진압대는 그 역할이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구조대원들 중 엄호 방수와 같은 기술을 구사할 수 있는 구조대원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수혁의 경력은 눈앞의 대원보다도 오래되었다.
평범한 소방관 생활을 했기 때문에 오직 구조 활동에만 매진하는 특수 구조대보다 방수 경험이 많았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 수혁의 신체 능력이라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대원은 수혁의 자신 있는 대답에 헛웃음을 지었다.
저렇게까지 단호하게 말을 하니, 믿지 않을 도리도 없었던 것이다.
“한번 믿어보지. 그럼 일단은 건물 내에 있는 소화전부터 찾아야겠군.”
결정했으니, 이젠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대원이 가장 가까운 소화전이 어디에 있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수혁이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있습니다.”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수혁의 태도에 대원은 어리둥절해했다.
그 모습을 본 수혁이 웃으며 변명했다.
“이전에 와본 적 있는 곳이거든요.”
급조한 티가 역력한 변명이었다.
남양주에 있는 상가 건물에 와본 적이 있고, 하필이면 그 건물에 화재가 일어났다는 말을 믿으라기엔 우연성이 너무 짙었으니까.
대원은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
수혁은 이런 허술한 변명밖에 떠올리지 못한 머리를 탓하며, 자신이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갔다.
‘미니 맵’에 표시되어 있는 소화전에 도착한 수혁은 재빨리 그곳을 열고 호스를 연결했다.
“이거 가지고 달려.”
수혁은 자신의 뒤를 따라온 슈미츠에게 관창 부분을 넘기고는 명령했다.
말을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슈미츠는 눈치껏 수혁의 명령을 이해하고는 호스를 펼치기 위해 온 길을 되돌아갔다.
돌돌 말려 있던 호스가 길게 펼쳐지자, 수혁이 밸브를 열었다.
작은 떨림과 함께 호스가 부풀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다행이네.’
수혁은 소화전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에 안심했다.
요즘 들어 화재 현장에 가면 스프링클러나 소화전이 작동하지 않는 곳이 많았다.
이 건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어진 지 몇 년 되지 않아 보이는 건물이었으니, 스프링클러 설치가 의무적으로 되어 있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스프링클러는 물 한 방울 내뿜지 않고 있었다.
만약 스프링클러가 제대로 역할을 해냈다면, 화재가 이렇게 심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도 한번 알아봐야겠어.’
수혁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일단은 뒤로 미루었다.
지금은 그것보다, 눈앞의 요구조자들이 급했다.
호스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것을 확인한 수혁이 슈미츠의 뒤를 따라 달렸다.
슈미츠는 호스의 관창을 든 채로 수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 줘.”
수혁이 손을 내밀자 슈미츠가 순순히 관창을 넘겼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수혁이 대원에게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부관창수를 맡지.”
호스의 압력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단단히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나뒹굴 정도였다.
그래서 화재 진압 시에는 관창수와 부관창수가 2인 1조로 호스를 잡고, 함께 힘을 합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리 피지컬이 좋은 소방관들이라 할지라도, 제대로 된 방수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혼자 할 수 있으니, 선배는 저 녀석 좀 챙겨주세요.”
하지만 수혁은 대원의 말을 거절했다.
수혁의 힘이라면 혼자서 양팔에 호스 두 개를 끼고 달려도 상관없을 정도였으니, 괜한 인력 낭비를 하는 것보단 역할을 나누는 게 더 나았다.
“가능하겠어?”
혼자서 한다는 말에 대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뒤에서 지켜보시다가 힘들어 보이면 그때 도와주세요.”
“그래, 알았다.”
대원은 수혁이 저렇게까지 말하자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수혁이 혼자서 호스를 잡고 진입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수혁의 말대로 슈미츠를 챙기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정말 수혁이 힘들어 보이면 그때 도와도 늦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럼 준비하시죠.”
수혁이 호스를 잡고 불길 앞에 서자, 대원이 슈미츠를 데리고 수혁의 뒤에 바짝 붙었다.
준비가 된 것을 확인한 수혁이 관창을 돌리자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엄청난 압력이 분사되기 시작했음에도, 수혁의 몸은 조금도 휘청거리지 않았다.
수압이 정상인 것을 확인한 수혁은 관창을 돌리며 물줄기를 조절했다.
일자로 강하게 뻗어 나오던 물줄기가 점차 넓게 퍼지며 마치 방패처럼 수혁의 앞을 가로막았다.
“갑니다.”
수혁이 불길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넓게 퍼진 물 입자가 넘실대는 불길을 차단하며 일행을 보호했다.
‘뜨겁다!’
그럼에도 모든 열기를 차단하진 못했기에 슈미츠는 엄습해 오는 열기에 하마터면 걸음을 멈출 뻔했다.
“멈추지 마!”
옆에 있던 대원이 그런 슈미츠의 몸을 억지로 밀치며 전진했다.
“여기서 멈추면 죽는 거야. 알겠어?”
겁을 주기 위한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실제로 슈미츠는 이 엄청난 열기에 갇힌다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반 강제적으로 걸음을 옮기던 슈미츠는, 온몸이 익어가는 듯한 통증 속에서 문득 수혁의 모습을 확인했다.
수혁은 한쪽 팔로 호스를 붙잡고 쉴 새 없이 주변을 살피면서도, 단 한 번의 머뭇거림도 없이 전진하고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호스의 압력이 얼마나 강한지는 슈미츠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독일 소방 학교에서 교육받을 때 된통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피지컬에 자신이 있던 슈미츠는 혼자서 호스를 잡아보겠다며 호기를 부렸고, 그 대가로 호스와 함께 땅을 나뒹구는 경험을 해봤다.
그러니 호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압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수혁은 마치 장난감이라도 든 것처럼 너무도 쉽게 호스를 들고 있었다.
그것도 이렇게 불길이 넘실대는 한복판에서 말이다.
그뿐인가?
엄호 방수가 얼마나 능숙한지, 사방에 가득한 불길이 일행에게 전혀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구조대가 아니라 화재 진압대의 베테랑 대원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대체 어떻게……?’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저런 실력을 갖출 수 있단 말인가?
슈미츠는 다시 한 번 수혁에 대한 짙은 패배감이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