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207화
수혁은 일단 부드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힘들었지?”
뉘앙스야 통역사의 재량이라지만, 수혁의 표정만으로도, 수혁이 어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늘만 힘들었겠습니까?”
하지만 돌아온 슈미츠의 대답은 냉담했다.
그 모습에 수혁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다. 연수 기간은 고작 한 달밖에 없고, 그사이에 우리가 알고 있는 걸 교육하려면 이런 방식을 사용할 수밖에.”
“그건…….”
슈미츠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교육방식이 힘들긴 해도,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 역시도.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감정이 쌓여가는 것은 별개였다.
‘나도 유격 조교들을 모조리 싸잡아 죽이고 싶었으니까.’
수혁은 슈미츠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대한민국 남자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교관과 조교에게 가진 감정들은 거의 비슷할 테니 말이다.
“그러니 이해해라.”
수혁은 자신이 그렇게 싫어하던 조교가 했던 말을 똑같이 해주었다.
“하아.”
슈미츠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훈련이 힘든 것보단, 다른 것이 더 힘들고 짜증이 났다.
바로 수혁이라는 존재.
수혁을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 같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자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면담.
고작 두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주제에 무슨 면담이란 말인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수혁은 그런 슈미츠를 가만히 쳐다봤다.
확실히 슈미츠는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알아차린 수혁은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하기로 했다.
“너, 나 마음에 안 들지?”
흠칫!
수혁의 말을 들은 통역사가 통역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정말 그 말을 통역하는 게 맞냐는 듯, 수혁을 쳐다봤다.
“……교관님?”
“통역해 주세요. 제 말 그대로.”
통역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수혁의 말대로 통역해 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들은 슈미츠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슈미츠는 일단 수혁의 질문에 부정했다.
하지만 수혁은 다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너, 나 싫어하잖아.”
“어이가 없군요. 제가 교관님을 싫어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수혁은 커피를 한 모금 입에 가득 털어 넣고는 꿀꺽 삼켰다.
“그건 아무래도 좋아.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주는 것 없이 싫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 거니까.”
수혁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컵을 내려놨다.
수혁 역시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네 감정 하나 때문에 다른 동료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수혁의 표정이 변했다.
방금 전까지 짓고 있었던 부드러운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슈미츠를 노려보았다.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슈미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적이 없다고?”
지양호의 말대로였다.
슈미츠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슈미츠, 너는 이번 교육생들 중에서도 가장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였겠지.”
낭중지추라고 했다.
슈미츠 정도의 실력이 있다면, 어디를 가서도 충분히 주목받을 수 있었다.
이대로 소방 학교를 졸업하고 임용이 된다면, 분명 뛰어난 소방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방관에게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너는 같은 조원인 다니엘과 헤인델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어. 아니,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
“그건 그 녀석들이 부족해서…….”
“그럼 너는 현장에서 동료가 지쳐 쓰러지면, 그대로 두고 갈 건가?”
변명하려는 슈미츠의 말을 끊고, 수혁이 쏘아붙였다.
“경우가 다르지 않습니까?”
“뭐가 다르지? 아, 실전이 아니라 훈련이라서? 실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현장이 아니라서? 그래서 다르다고?”
수혁이 슈미츠를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훈련에서도 개판인 놈이 현장에서라고 잘할까?”
슈미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방금 수혁의 말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그런 당신은 뭐가 그렇게 잘났습니까?”
슈미츠가 격앙된 표정으로 수혁에게 따지듯 물었다.
하지만 수혁은 그런 슈미츠의 태도에 픽- 하고 웃을 뿐이었다.
“난 내가 잘났다고 말한 적 없다.”
그랬다.
수혁은 슈미츠를 비롯한 교육생들에게 단 한 번도 자신의 자랑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네가 자격을 증명하라는 말에 증명했을 뿐이고, 너희가 하는 훈련을 같이했을 뿐이지. 그것을 보고 열등감을 가진 건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다, 슈미츠.”
슈미츠는 수혁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네 잘못을 가르쳐 주지.”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수혁은 조금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방금 말한 것처럼 너는 성적과 기록에 눈이 멀어 주위의 동료들을 살피지 않았다. 그 말은 너희 조의 팀워크를 깨트린 게 바로 너란 이야기다.”
팀워크에 대한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슈미츠는 그런 팀워크를 깨트렸다.
아니, 애초부터 동료라는 인식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 하는 것은 실전이 아니라 훈련이니까.
동료와 힘을 합쳐 주어진 과제를 해내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성적과 기록을 내는 것에 집중한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네가 곧바로 납득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잊지는 마라. 만약 이곳이 현장이었다면, 너의 그 섣부른 판단 때문에 주위의 동료와 요구조자가 희생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수혁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해줄 말이 없었다.
수혁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조언을 해주었고,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슈미츠가 결정할 일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말을 뼈에 새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긴 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만약 이 이후에도 계속해서 같은 모습을 보이며 변화하지 않는다면, 슈미츠는 절대로 소방관이 될 수 없었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이번 사고로 인해 슈미츠는 율리안에게 찍혔다.
그리고 독일에서 율리안의 위치를 생각해 보면, 함량 미달의 슈미츠를 임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만약 변화한다면?
‘그땐 제대로 가르쳐 봐야겠지.’
수혁이 밖으로 나서며 생각했다.
슈미츠는 정말로 뛰어난 인재였다.
승부욕을 조금 줄이고, 제대로 된 훈련과 교육을 받는다면, 수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수혁은 슈미츠가 그런 소방관이 되길 바랐다.
수혁과 통역사가 나가자, 면담실 안에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홀로 남은 슈미츠는 생각에 빠져 한참 동안이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부상을 입은 헤인델은 결국 연수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수술 후 회복 기간이 연수 기간보다 길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헤인델은 아쉬워했지만, 교육생들은 그런 헤인델을 부러워했다.
사고가 일어난 날과 그 다음날.
이틀간의 달콤한 휴식이 끝난 뒤엔, 정말로 지옥과 같은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던 탓이었다.
지양호는 그야말로 악마처럼 교육생들을 굴렸다.
왠지 사고가 일어난 것에 대한 화풀이를 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사전에 세운 계획대로 진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슈미츠는 그사이 많이 변했다.
수혁의 조언을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성적이나 기록에 연연하는 모습을 더는 보여주지 않았다.
다니엘 역시 보다 열심히 훈련에 참가했다.
자신의 판단으로 인해 사고가 벌어졌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구토를 하면서도 모든 훈련을 따라왔다.
그렇게 일주일이 더 지나고, 그 후로 3일이 더 흘렀을 시점.
드디어 이번 연수의 마지막 단계가 다가왔다.
운동장으로 나온 수혁은 이미 도열해 있는 교육생들의 앞에 섰다.
교육생들은 이젠 굳이 정렬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아도 미리 나와 알아서 오와 열을 맞춰 교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군대냐?’
수혁은 미동도 없는 교육생들의 모습을 보며, 기억도 희미해진 군 생활을 떠올렸다.
왠지 소방관이 아니라 군인을 키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수혁이 실없이 혼자 키득거리고 있을 때, 지양호가 나왔다.
“이제 연수 기간도 10일밖에 남지 않았다.”
지양호의 말에 교육생들의 입가가 실룩였다.
차마 대놓고 웃지는 못했지만, 이 죽을 것 같은 훈련이 끝나간다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났던 것이다.
“이 소방 학교에서의 훈련은 오늘로 끝이다.”
교육생들은 예상치 못했던 지양호의 갑작스러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수 기간이 아직 10일이나 남았는데 끝이라니?
그럼 이제부턴 뭘 한단 말인가?
지양호는 어리둥절하고 있는 교육생들을 보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제부턴 실전이다.”
“실전? 현장에 출동한단 말입니까?”
누군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결국 물었다.
평소였다면 불호령이 떨어지며 기합을 주었겠지만, 지양호는 웬일인지 이번엔 그냥 넘어갔다.
“그래. 너희는 각자 세 명씩 조를 이뤄 교관들을 비롯한 몇몇 소방관들의 부사수로, 소방서에서 근무를 시작할 것이다.”
교육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계획 단계에서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이었지만, 교육생들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직 독일에서도 현장 출동을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렇게 고대하던 첫 출동을 느닷없이 한국에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혼란스럽던 분위기는 이내 흥분으로 변해갔다.
첫 출동.
소방 학교의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기대하고 바라는 일이었다.
그것을 이제 경험할 수 있었으니,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표정이 그리 좋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현장 출동이란, 흥분되는 일임과 동시에 두려운 일이었으니까.
다니엘이 그러했다.
분명 이날만을 기다리고 있긴 했지만, 막상 코앞으로 다가오자 걱정이 앞섰다.
‘과연 내가 잘해낼 수 있을까?’
그냥 훈련을 받을 때와는 무게감이 달랐다.
훈련용 더미와 사람의 무게는 같았지만, 사람에게는 생명이라는 도저히 측정할 수 없는 무게가 더해지기 때문이었다.
다니엘이 남몰래 한숨을 쉬고 있는데, 지양호가 말을 이었다.
“조는 이전에 짰던 그대로 진행한다.”
‘응?’
세 명씩 10조.
하지만 헤인델이 없는 지금, 다니엘의 조는 두 명밖에 없었다.
그럼 자신들은 2인 1조가 되는 건가? 하고 궁금해하고 있을 찰나.
지양호가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다니엘과 슈미츠 조는 어쩔 수 없이 두 명으로 진행하고.”
사람 수가 부족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지양호는 이제부터 교육생들이 해야 할 일들과 앞으로 그들을 책임질 사수 소방관들을 배정해 주었다.
한 조씩 호명이 되고, 그들의 사수가 교육생들을 데리고 한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니엘과 슈미츠의 조 차례가 되었다.
“다니엘, 슈미츠. 너희가 근무할 곳은 경기 중앙청 소속 특수 구조대이며, 사수가 될 사람은 김수혁 교관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한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옅은 미소를 띠고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수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