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196화
“내가 제일 먼저 온 건가?”
자신을 바래다준 최은송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학교 내부로 들어온 수혁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다.
독일의 소방관들이야 오늘 오후에 이곳에 도착한다 치고, 함께 교육할 지양호나 다른 교관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넘 일찍 오긴 했지.”
최은송의 출근 시간을 맞추기 위해 집을 일찍 나섰기에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빨리 도착하긴 했다.
이제 여름이 부쩍 다가와 낮이 많이 길어진 상태였음에도 이제야 막 해가 뜨기 시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소방 학교 측에서 이번 연수에 공을 많이 들였는지, 여기저기에 독일어로 된 환영 문구와 안내문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말을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도 소방 학교 내의 시설을 쉽게 사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준비 많이 했네.”
수혁은 그것들을 천천히 구경하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강당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여기서 환영식을 할 테고…….”
독일로 연수를 갔을 땐 요란한 환영 인사 같은 게 없었다.
독일 특유의 삭막함인지는 모르겠지만, 환영식은 간단하고 빠르게 진행이 되었다.
물론 수혁과 지양호는 그것을 더 마음에 들어 했고.
하지만 여기는 한국이다.
내용보단 남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가 더욱 중요한 나라.
쓸데없는 식순과 높으신 양반들이 나와 일장 연설을 늘어놓을 확률이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강당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행사 안내문 한 장을 뽑아 확인한 수혁이 혀를 찼다.
누군지 이름도 모를 사람들의 인사와 연설이 한눈에 봐도 가득했다.
“대체 이 사람들이 누군데?”
수혁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으며 종이를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오늘 지양호의 심기가 많이 불편해질 것이라 예상하면서 말이다.
독일로 연수를 갈 때, 인천공항에서 보여주었던 지양호의 성격이라면, 오늘 하루 종일 투덜거릴 게 뻔했다.
그때였다.
“어?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되는데.”
뒤쪽에서 누군가 수혁을 향해 말을 걸었다.
수혁이 뒤를 돌아보자,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방관 한 명이 한숨을 내쉬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들어오셨습니까? 여긴 아무한테나 개방된 곳이 아닌데.”
그는 수혁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물었다.
수혁은 근무복이나 정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었다.
소방 학교 측에서 교관복을 지급해 주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젊은 소방관은 수혁을 이곳에 멋대로 들어온 민간인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아, 저는…….”
수혁이 오해를 풀기 위해 손을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젊은 소방관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수혁의 말을 끊었다.
“일단 나가세요. 안 그래도 어제 힘들게 청소 다 해놨는데, 이렇게 흙발로 막 들어오시면 어떡합니까?”
그 소리를 들은 수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소방관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이를 생각해 보면 교관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이곳의 학생일 확률이 높았다.
학생이 아니라면 소방 학교의 시설물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던가.
둘 중 어느 것이라도 수혁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할 수 없는 위치였다.
수혁은 엄연히 이곳에 교관으로 초청받은 상태였으니 말이다.
계급 역시 수혁이 눈앞의 젊은 소방관보다 높을 테고.
하지만 수혁은 젊은 소방관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현재 자신이 사복을 입고 있으니,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저런 식의 태도는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나가죠.”
수혁은 일단 그의 말대로 강당에서 나가기로 했다.
어차피 여기에 있어도 딱히 할 일도 없었으니, 나중에 교관복으로 환복한 뒤 다시 오기로 한 것이다.
젊은 소방관은 수혁의 뒤를 따라 나가며 혀를 찼다.
수혁의 신발이 정말로 흙투성이일 리가 없었건만, 그는 바닥에 흙이 묻은 것처럼 불쾌해했다.
“계급이 뭡니까?”
강당 밖으로 나간 수혁이 그를 향해 물었다.
“소방사 시보입니다만…….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십니까?”
수혁이 갑자기 계급을 묻자, 젊은 소방관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방금 전까지는 수혁이 단순히 몰래 소방 학교를 구경하러 들어온 일반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그렇게 막 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계급을 물어보는 것을 보니, 왠지 자신이 잘못한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평범한 일반인이 소방관의 계급을 물어볼 리가 없었으니까.
‘학생이네.’
소방사 시보라면 정식으로 임용되어 서에 배치되기 전, 소방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이었다.
수혁과 호봉 수는 그리 차이가 나지 않겠지만, 계급으로 보자면 두 계급이나 낮았다.
그야말로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할 계급 차인 것이다.
“그렇군요.”
수혁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행정실이 어딥니까?”
“행정실 말입니까?”
질문받은 소방관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이것으로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수혁이 그냥 구경하러 온 일반인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십니까?”
만약 수혁이 소방관이고, 일이 있어서 이곳에 방문한 것이라면 큰 실수를 한 것이었다.
그러니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누구긴 누구야? 교관이지.”
대답한 것은 수혁이 아니었다.
수혁과 젊은 소방관의 고개가 동시에 한쪽을 향했다.
“선배님!”
그곳에는 어느새 나타난 지양호가 왠지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제일 먼저 온 줄 알았는데, 빨리도 왔네.”
“그럴 사정이 좀 있어서요.”
수혁이 웃으며 지양호에게 인사를 건넸다.
훈장 수여식 이후 오랜만에 보는 것이라 반갑기 그지없었다.
반면 젊은 소방관의 표정은 수혁과 정반대였다.
‘교관이라고?’
그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수혁이 자신과 같은 소방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하니 교관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수혁의 나이가 자신과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소방 학교의 학생이라고 해도 위화감이 전혀 없을 것 같은데, 교관이라면 누가 믿을까?
“죄송합니다!”
그는 더 늦기 전에 사과해야겠다고 판단하고는 곧장 수혁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나이?
군대도 다녀온 마당에 그런 건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군대나 소방관이나.
계급이 깡패였으니까.
수혁이 교관이라는 것을 안 이상, 방금 전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사과를 해야만 했다.
“응? 무슨 일 있었냐?”
뒤늦게 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는 지양호는 갑작스런 젊은 소방관의 사과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 별일 아니에요.”
수혁은 그런 지양호에게 고개를 살짝 저어 보이고는 젊은 소방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렇게 옷을 입고 온 제 잘못도 있으니까 고개 들어요.”
자신을 일반인이라고 착각할 만한 이유가 충분했기에, 수혁은 그것에 대해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태도는 조금 바꾸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수혁을 향해 귀찮다는 표정으로 빨리 나가라고 말을 한 것.
강당 바닥이 더러워질 것을 염려해 면박을 준 것.
그것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하물며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고 헌신과 봉사를 하는 소방관이 그런 행동을 보인다?
그것은 엄연히 잘못된 모습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는 수혁의 말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수혁이 지적한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차린 것이다.
“사과는 됐고, 앞으로 조심해요.”
수혁은 젊은 소방관의 어깨를 몇 번 두들긴 뒤, 지양호에게 몸을 돌렸다.
둘의 대화를 듣던 지양호는 대충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눈치챈 표정이었다.
“쯧쯧.”
지양호가 젊은 소방관을 향해 혀를 찼다.
수혁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만, 지양호는 원래 그런 꼴을 가만히 보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젊은 소방관을 향해 뭔가 한마디를 하려는데 수혁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냥 실수한 거니까.”
괜히 지양호가 나서서 일을 크게 만들기 전에 수혁이 막았다.
지금은 이런 것에 신경쓰기보단, 앞으로 한 달간 이어질 연수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편이 나았다.
“크흠.”
지양호는 못마땅한 얼굴로 젊은 소방관을 한번 노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행정실로 가야 하나?”
“아무래도 그렇겠죠. 교관복도 지급받아야 하고, 앞으로 일정에 대한 얘기도 해야 하니까.”
“그럼 행정실로 가자. 어느 쪽이냐?”
“글쎄요?”
수혁이 교육받은 소방 학교는 여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곳의 구조를 잘 몰랐다.
자연스럽게 둘의 고개가 젊은 소방관을 향했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둘의 시선을 동시에 받은 젊은 소방관은 흠칫하는 표정으로 둘을 행정실로 안내했다.
그런 그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 *
“여기가 한국이구나.”
이제 갓 소방관이 된 다니엘은 이번 연수에 참가한 30명 중 한 명이었다.
“공항 꽤 큰데?”
“꽤? 아니지. 이건 엄청 큰 거야.”
다니엘은 비행기 안에서 친해진 슈미츠와 공항 내부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그들이 갖고 있던 한국이라는 이미지와는 너무 달랐다.
국가가 둘로 나뉘어져 있고, 세계에서 인터넷이 가장 빠른 나라.
그 정도가 그들이 아는 전부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동남아시아 쪽 이미지를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공항에서부터 자신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괜찮은 나라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교육 연수에 뽑힌 소방관 대부분은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독일의 소방 시스템은 세계 최고다.
그러니 자국에서 교육을 받는 것만으로 충분한데, 굳이 이런 아시아의 작은 나라까지 연수를 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작년에 독일로 연수를 온 한국 소방관들과 같이 교육을 받았던 선배들의 말이 아니었다면, 사양했을지도 몰랐다.
“주목!”
공항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구경을 하던 소방관들이 일제히 앞을 쳐다봤다.
“지금부터 숙소로 이동한다. 구경한다고 한눈팔다 뒤처지지 말고 잘 따라오도록.”
이번 연수의 책임자로 동행한 율리안이었다.
“예!”
신입 소방관들은 독일 소방관의 전설인 율리안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러곤 말 잘 듣는 새끼 오리들처럼 율리안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이번 교육을 담당하는 교관 중에 김수혁이 있다며?”
“아, 나도 들었어. 작년 최강 소방관 경기에서 율리안을 제치고 우승을 한 사람이지?”
“뭔가 착오가 있었던 거 아니야? 아니면 약물을 했던가. 그런 게 아니면 그 기록은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율리안도 세계 신기록을 갱신했다.
그런데 수혁의 기록은 그런 율리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으니, 그런 의심을 할 만도 했다.
“이번 연수에서 한번 확인해 보면 되겠지. 정말로 뛰어난 사람인지, 아니면 다 과장된 소문인지.”
“선배들 얘기로는 정말 괴물이라던데.”
“사람이 아니라는 소문이 있긴 하더라고. 지난번 연수에서 한 체력검정 때 엄청 났다지?”
“축구도 당장 프로로 뛰어도 될 것 같다는 얘기도 있었어.”
다니엘과 슈미츠, 그리고 그 외의 다른 소방관들은 수혁과 율리안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일산에 마련되어 있는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