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190화
도지사가 돌아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훈장 수여식이 시작됐다.
정말로 도지사 한 명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던 것이다.
수혁은 괜히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저 양반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망신이냐.”
이 행사가 단순한 표창식이었어도 눈살이 찌푸려질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건 평범한 표창식이 아니다.
독일 정부가 주최하고, 독일 대사관에서 이루어지는, 훈장 수여식이었다.
그런 상황에 사진 한 방 찍자며 행사를 지연시키다니…….
만약 저쪽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면, 외교 결례로 이어질 수도 있을 만한 일이었다.
그런 일을 태연하게 저지르고 저렇게 희희낙락하는 모습이라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니, 애초에 저런 사람이 어떻게 도지사가 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수혁이 그렇게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이, 훈장 수여식은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독일 대사가 직접 수혁과 지양호에게 훈장을 수여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기자들의 카메라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작은 십자가 모양의 훈장.
생각보단 가벼운 작은 훈장이 수혁의 왼쪽 가슴에 부착되었다.
별로 탐탁지 않아 했던 수혁도, 막상 훈장을 장착하자 괜한 뿌듯함이 몰려왔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행사는 심플하게 이루어졌다.
나중에 율리안에게 들은 바론, 독일에서 수여식이 거행됐다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번에는 주한 독일 대사관에서 치러진 만큼, 약식까진 아니더라도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다고 했다.
허례허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수혁과 지양호로선 너무도 다행이었다.
화려하지만 심플했던 훈장 수여식이 끝나자, 오찬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영화 같네.”
영화 속에서나 보던 야외 파티 같았다.
각종 음식이 테이블 위에 마련되어 있었고, 샴페인을 든 이들이 돌아다녔다.
“그냥 고깃집에서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는 게 더 좋은데.”
지양호가 입맛을 다셨다.
꽤나 고급스러운 오찬이었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맞지 않는 옷이나 다름없었다.
불편하고, 답답했다.
하지만 이 자리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수혁과 지양호였다.
훈장을 수여받은 당사자들이었으니까.
그러니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수혁은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의 축하 인사를 받느라 혼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하나같이 서울과 경기 소방 재난 본부의 간부들이거나, 정치권의 사람들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오죽하면 특수 구조대나 신일서 구조 3팀의 대원들이 수혁의 근처에도 오지 않을 정도였다.
괜히 수혁의 근처에 있다가 체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수혁은 그런 동료들을 보며 괜히 배신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불편함의 끝판왕이 자신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수혁은 재빨리 자리를 피하려고 했지만, 그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이거 축하 인사가 늦었습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사람은 바로 도지사였다.
“……감사합니다.”
간발의 차이로 몸을 피하지 못한 수혁은 전혀 반갑지 않은 얼굴로 도지사의 축하를 받아주었다.
하지만 도지사는 수혁의 표정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오직 이 자리의 주인공인 수혁과 자신이 서로 인사하는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한 것 같았다.
“이거 이럴 게 아니라 사진이나 한번 찍읍시다.”
수혁은 자신도 모르게 ‘또?’라고 물을 뻔했다.
그것을 가까스로 참아낸 수혁이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너무 억지로 지은 탓인지, 누가 봐도 일그러진 모양새였다.
도지사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잠시 멈칫- 했다.
이번에는 너무 대놓고 싫다는 느낌을 보여줬는지라, 도지사도 무시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도지사는 꿋꿋하게 수혁을 향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어떤 면으로는 대단하네.’
저 정도는 되어야 정치를 할 수 있는 건가?’ 하고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뭔가 불편하신 거라도 있나 봅니다?”
도지사가 수혁에게 물었다.
“아, 그냥 이런 자리가 익숙하질 않아서요.”
너 때문에 그렇다고는 말을 할 수가 없었기에, 수혁은 순발력을 발휘해 변명했다.
이 자리가 불편하다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수혁의 변명은 자연스러웠다.
그러자 도지사의 입술이 살짝 꿈틀거렸다.
‘무슨 의미지?’
방금 도지사가 지은 표정은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수혁을 비웃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고, 반대로 호감 어린 미소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그만큼 모호한 표정이었다.
수혁은 왠지 기분이 나빴다.
호감보다는 비웃음 쪽에 가깝다고 받아들인 것이다.
마치 자신을 촌놈 취급하는 듯한 느낌.
수혁은 도지사와 다르게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눈살을 찌푸리며 도지사를 쳐다봤다.
하지만 도지사는 이번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런 수혁과 눈을 마주쳤다.
“그럴 수 있죠. 소방관이 이런 자리에 참석하는 경우 자체가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런 걸 보면 김수혁 씨는 참 대단합니다.”
무시하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수혁은 한숨을 내쉬며 도지사의 말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저에겐 과분한 자리입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대한민국에서 타국의 훈장을 받은 사람이 몇 명인지 아십니까?”
모른다.
그런 일에는 관심조차 없었으니까.
“대한민국 역사를 다 뒤져도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김수혁 씨는 그중 한 명이 된 거고요. 그러니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격이야 충분하니까.”
수혁은 도지사의 말을 들으며 하마터면 헛웃음을 내뱉을 뻔했다.
누가 들으면 이 오찬을 준비한 게 도지사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아니, 왜 자기가 생색을 내고 있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
독일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
단순히 경기도지사라는 것 하나 때문에 초대를 받아 참관하게 된 것이 전부인 그가, 마치 자신이 이 오찬의 주인인 양 행세를 하고 있었다.
“식사는 잘하고 있나?”
난감해하고 있는 수혁을 구해준 것은 바로 율리안이었다.
율리안은 지양호와 함께 웃는 얼굴로 수혁에게 다가왔다.
“아, 율리안. 맛있는 게 많네요.”
“다행이군. 그런데 이분은……?”
율리안이 이번엔 수혁의 앞에 있는 도지사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 반갑습니다. 나는 경기도지사를 맞고 있는 김진수입니다.”
김진수 도지사는 유창한 영어로 율리안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아, 예. 그렇군요.”
하지만 율리안은 도지사라는 소개에도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지양호에게 이미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어떤 성격인지,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국적은 다르지만, 율리안 역시 소방관이다.
도지사가 한 행동에 열이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타국의 정치권 인사에게 폭언을 퍼부을 순 없었으니, 율리안은 수혁을 데리고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을 선택했다.
“저희 대사님께서 수혁을 보고 싶다고 하셔서, 이만 실례해야겠군요.”
“대사님께서요?”
도지사의 눈이 반짝였다.
“같이 가시죠. 그렇지 않아도 나 역시 귀국의 대사님과 하고 싶은 말이 있었…….”
“죄송합니다.”
도지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인맥을 늘리기 위해 동행을 요청하려 했지만, 율리안은 그것을 칼같이 끊었다.
“수혁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단호한 율리안의 태도에 도지사가 흠칫했다.
“하, 하하. 그럼 어쩔 수 없죠. 담소는 다음 기회에 나누는 수밖에.”
도지사는 딱딱한 웃음과 함께 수혁과 율리안, 그리고 지양호를 한 번씩 쳐다보고는 몸을 돌려 멀어졌다.
“하아…….”
도지사가 사라지자 수혁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힘들었냐?”
지양호가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묻자, 수혁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별말은 안 하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빠지는지 모르겠네요.”
“저 양반 말투가 원래 그래. 안 그러는 척, 존중하는 척하면서 상대를 깎아내리는 데 도가 텄거든.”
지양호의 말대로 도지사는 지금까지 수혁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 속내를 보면 무시가 베이스에 깔려 있는 느낌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대화였을 것이다.
“다신 같이 대화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 사람이네요.”
수혁은 꽤 기분이 안 좋았는지 얼굴을 찌푸리다, 율리안과 지양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두 분 덕분에 살았어요.”
만약 이 두 사람이 타이밍 좋게 나타나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계속해서 도지사에게 시달렸을 것이다.
“사실, 노리고 온 건 아니다.”
“네?”
“진짜로 독일 대사가 널 불렀어. 얘기 좀 하자고.”
율리안과 지양호는 정말로 수혁을 데리러 왔다가, 우연히 도지사를 보고는 떼어낸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지금 가야 해. 따라와.”
지양호와 율리안은 서로 몇 마디를 나누고는 수혁을 어디론가 안내했다.
‘독일 대사.’
훈장 수여식을 할 때 보기는 했다.
수혁의 가슴에 직접 훈장을 달아준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
하지만 따로 불러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아니, 대체 나랑 무슨 얘기를 하겠다고.’
한 국가의 대사와 일개 소방관.
너무도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단순한 공치사를 하려는 것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따로 불러내진 않았을 것이다.
그냥 오찬장에서 하는 편이 훨씬 편하고 보기에도 좋았으니까.
그런데 따로 수혁을 불렀다.
그 말은 곧 수혁에게 하고 단순한 공치사가 아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가 없었지만.
수혁이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간 곳은 대사관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정원이었다.
오찬장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진 않았지만, 프라이빗한 느낌이 물씬 풍겨 왔다.
허가받지 못한 인원은 이쪽으로 다가오지도 못할 것 같았다.
“아, 왔군.”
놀랍게도 독일 대사는 능숙한 한국말로 수혁을 반겨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수혁이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그렇게 긴장할 것 없네. 그냥 한번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부른 것뿐이니까. 자, 여기 앉지.”
대사는 수혁과 다른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가 앉아 있던 티 테이블에는 찻잔이 아닌, 맥주병이 놓여 있었다.
“독일에서 자네들이 해준 일에 대한 것은 잘 들었네.”
한국말로 이야기를 하는지라 율리안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는 이미 대사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는 듯 신경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일단 그것에 대한 감사부터 표해야겠군. 고맙네.”
대사는 수혁과 지양호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그 모습에 수혁과 지양호는 민망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항상 하는 말이었지만, 그들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으니까.
둘에게 감사 인사를 한 대사관은 맥주를 집어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난 연수를 통해 우리 쪽 소방관들이 배운 것이 많다고 하더군. 그래서 이번에는 지난번과는 반대로 독일 소방관들을 한국으로 연수를 보낼 예정이라네.”
대사의 말에 수혁과 지양호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들의 교육을 자네 둘이 맡아줬으면 하네만. 괜찮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