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184화
전승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수혁을 죽일 듯이 노려보기만 하다가, 그대로 박상태가 올라오자 사다리를 타고 빠져나갔다.
이제 병원 안에 홀로 남은 수혁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잘한 건가?’
가만있으면 전승철은 어떻게든 수혁에게 앙갚음하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그에게는 그럴 힘이 있었고, 본래 그런 성격이었으니까.
그래서 일단 경고를 하긴 했다.
자신을 건드리는 일이 결코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막상 저지르고 보니, 후회가 되었다.
괜한 도발을 해서 신경을 더 건드린 게 아닌가? 하는 후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수혁은 고개를 저었다.
이래도 걱정이고, 저래도 걱정이라면, 차라리 지금처럼 하는 게 나았다.
“잘한 거야.”
수혁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창가로 다가섰다.
마침 사다리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괜찮냐?”
“네, 괜찮아요.”
박상태가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물었고, 수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타라.”
대체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수혁은 가벼운 몸짓으로 창틀을 넘어 박상태 옆에 섰다.
“내려간다.”
사다리가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혁은 고개를 들어 방금 전까지 자신이 있던 곳을 올려다보았다.
고작해야 한 시간 남짓 한 짧은 시간.
그리 구조하기 힘든 것도 아니었다.
조금 바쁘게 뛰어다니며 이동을 많이 하긴 했지만, 난이도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수혁은 저 안에 있던 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한 시간이 아닌, 하루를 꼬박 있었던 것 같았다.
“힘드냐?”
수혁의 표정을 본 박상태가 물었다.
사실 겉으로는 그리 지쳐 보이지 않았다.
화재 현장에서 구조하다 나온 소방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땀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고 있었으니까.
머리가 흠뻑 젖어 비라도 맞은 것 같았던 특수 구조대와는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박상태는 수혁이 힘들어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냥요. 정신적으로 조금 지쳤어요.”
특히나 전승철과의 일 때문에 더욱 그랬다.
“복귀하면 좀 쉬어라. 꼴이 말이 아니네.”
“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혁의 모습을 본 박상태는 안에서 정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소의 수혁이었다면 쉬긴 뭘 쉬냐며 괜찮다고 했을 테니까.
하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나중에 이야기해 준다고 했으니, 그때를 기다리면 되었다.
“자, 도착. 일단 너는 차로 가 있어.”
구조는 끝이 났지만, 화재 진압은 아직 멀었다.
신일서만으로는 진압이 불가능해 지원들이 속속 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과 힘을 합쳐야 간신히 불길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병원의 화재는 규모가 컸다.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구조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다른 대원들은 화재 진압을 돕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고, 오직 김강식만이 쉬고 있었다.
“왔냐?”
김강식은 구조차 안에서 드러누워 물에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덮고 있었다.
화재의 열기로 인해 피부가 뜨겁게 익어버렸기 때문이다.
“괜찮으세요?”
“나야 괜찮지. 나보단 네가 걱정이다.”
자신은 신재식과 함께 빠져나왔지만, 수혁은 그 이후로 곧장 특수구조대를 구하러 갔으니까.
“저도 괜찮아요.”
수혁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도 드러누워 버렸다.
“그래도 좀 쉬어라.”
김강식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수건을 덮으며 눈을 감았다.
‘아, 지친다.’
병원에서 퇴원 후, 가장 힘들었던 현장이다.
가만히 누워서 생각에 빠져 있던 수혁은 문득 뭔가를 떠올렸다.
‘그런데 그 불안감은 뭐였지?’
분명 뭔가가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불안감은 어느 순간엔가 씻은 듯이 사라졌고,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병원 옥상이 붕괴한 일이나, 특수 구조대가 고립된 것을 의미한 것이 아닌 건 분명했다.
그보다는 훨씬 심각한.
수혁조차도 긴장하게 만들 정도의 위험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결국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니…….
‘그냥 괜한 걱정이었나?’
그저 느낌에 불과했다.
스킬도 감지하지 못했으니, 괜한 기우일 확률이 높았다.
그럼에도 수혁은 찜찜함을 지우지 못했다.
아직 뭔가가 남아 있을 것 같다는 느낌.
하지만 더는 수혁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애써 그 생각을 밀어냈다.
‘일단 좀 자자.’
수혁은 빠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 * *
“X새끼네, 그거.”
박상태가 전승철을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그 모습에 수혁이 쓰게 웃었다.
괜히 친한 동네 형에게 고자질한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물에 빠진 걸 구해놨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뭐?”
반면 수혁에게 병원 안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박상태는 화가 잔뜩 난 기색이었다.
그것은 김강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안 봤는데, 상종 못 할 새끼네.”
둘은 무조건적인 수혁의 편을 들었다.
“뭐, 급해서 제가 좀 서두른 감이 있긴 했는데요…….”
괜히 민망해진 수혁이 그렇게 말을 했지만, 박상태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안 했으면 네가 데리고 나온 부상자 죽었어.”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에 연락을 받았었다.
대원의 상태가 너무도 위중해, 정말이지 조금만 더 늦었으면 이송 중 사망했을 수도 있었다면서 말이다.
지금도 안심할 단계는 아니라 병원에서도 촉각을 세우고 집중 치료 중이라고 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수혁을 욕할 일은 아니었다.
수혁이 그렇게 서두르지 않았으면, 그 대원은 죽었을 테니까.
“네가 실수를 했다 쳐. 그래도 그 새끼는 그러면 안 되지. 특구 팀장이나 되는 놈이 혼자 패닉에 빠져서 사리 분별도 못 하고…….”
전승철이 패닉 상태에 빠졌었다는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황상, 전승철은 분명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자기 부하가 죽어가고 있는데 수혁의 멱살을 잡고 길을 막을 생각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았을 테니까.
“이거 나중에 문제되지 않을까요?”
김강식이 박상태를 보며 물었다.
전승철이 마음만 먹으면 수혁을 폭행으로 물고 늘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상황이 상황이었는지라 인정될 확률이 그리 높진 않았지만, 귀찮아질 게 뻔했다.
“그렇진 않을 거다. 그걸 걸고 넘어지려면 자기가 한 병X 짓을 다 까야 되는데, 그러면 특구 팀장 자리가 위태롭지.”
재난 현장에서 돌발 상황이 일어났다고 패닉에 빠지는 구조대 팀장?
그런 게 용납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긴, 그렇겠네요.”
전승철의 커리어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특수 구조대의 팀장으로서 능력을 인정받고, 경력을 더 쌓으면 그 위로 더 올라갈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을 분풀이 때문에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조심은 해야겠지. 엿을 먹이려면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특수 구조대의 팀장이라는 위치는 큰 권력은 없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할 수가 있었다.
전승철이 그것을 이용해 수혁에게 어떤 짓을 저지를지는 아무도 몰랐다.
“네 얘기 들어보니까 뒤끝 있는 성격 같던데. 혹시 무슨 일 생기면 혼자 끙끙대지 말고 바로 알려. 알았냐?”
“네, 그럴게요.”
수혁이 웃으며 대답했다.
같은 팀장인데도 박상태와 전승철은 이렇게 달랐다.
수혁은 자신에게 이렇게 신경써 주는 선배들이 고마웠다.
물론 수혁은 전승철이 무슨 짓을 저지른다고 해도 그것을 진짜로 알릴 생각은 없었다.
괜히 걱정만 끼칠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정 힘들면…….’
짐 머레이가 있었다.
그는 수혁의 후견인을 자청하며 뒤를 봐주고 있었다.
애초에 특수 구조대 설립 자체가 수혁을 위한 것이었을 정도이니 전승철 하나를 막아내는 것은 그에겐 일도 아니다.
“그나저나, 너 그놈한테 찍혔으니 나중에 특구가면 힘들어지지 않겠냐?”
“그럴 수도 있겠네요.”
박상태의 말에 김강식이 맞장구를 쳤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수혁은 언젠간 특수 구조대로 갈 것이다.
그것은 구조 3팀의 모든 대원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수혁이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팀에 들어가면 되지 않을까요?”
전승철은 특수 구조대 1팀의 팀장이다.
그러니 다른 팀에 들어가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박상태는 그렇게 쉽게 보지 않았다.
“다른 팀이라고 그놈이 가만히 놔둘 것 같냐? 괴롭히려면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지.”
팔은 안으로 굽는다.
처음부터 함께해 온 전승철과 나중에 들어온 수혁.
특수 구조대의 대원들이 누구와 더 많은 신뢰를 쌓았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당연히 전승철의 말을 따를 것이고, 그것은 수혁에게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언제 들어갈지 기약도 없는데요, 뭐. 그전까지는 어떻게든 해결이 되지 않을까요?”
특수 구조대가 설립된 지 이제 고작 한 달가량밖에 되지 않았다.
무슨 예기치 못한 사고가 일어나 결원이 생기지 않는 이상, 모집 공고는 한참 후에나 일어날 일이었다.
“그렇긴 하지.”
박상태와 김강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년 단위의 시간이 흘러야 재모집이 시작될 것이다.
세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일은 그들의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을 때가 많았다.
* * *
“……지원이요?”
“그래.”
“제가 왜요?”
“그쪽에서 요청했다잖아. 그리고 위에서 그 요청을 받아들였고.”
수혁과 박상태는 서로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특수 구조대에 갈 날이 아직 먼 훗날이라는 이야기를 나눈 게 바로 어제다.
그런데 오늘 특수 구조대에서 수혁을 지원해 달라며 요청을 보낸 것이다.
물론 진짜로 특수 구조대로 발령이 난 것은 아니고 지원의 형태였지만, 어이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부상을 당한 대원이 당분간은 병원 신세를 져야 한단다. 그래서 지원이 필요한데, 특구 쪽에선 너를 지원해 달라고 했고.”
“하아…….”
특수 구조대도 사람이었으니, 여섯 명이 하던 일을 세 명이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일반 대원에게 지원 요청을 하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나도 당황스럽긴 한데, 어쩌겠냐?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박상태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차며 그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그 사람 짓이겠죠?”
“그럴 확률이 높지.”
두 사람은 동시에 전승철을 떠올렸다.
이렇게 타이밍 좋게 수혁을 특수 구조대로 부른 것이 우연일 리가 없었다.
“밑에 두고 괴롭히겠다는 것 같은데……. 괜찮겠냐?”
박상태는 수혁의 능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니, 전승철이 무슨 짓을 해도 수혁에게 해를 입히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죠. 언제부터 가면 돼요?”
“내일, 바로 특구로 출근을 하면 돼.”
“얼마나요?”
“일단은 한 달이다.”
“한 달…….”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제가 빠지면 여기는 어떻게 해요?”
그렇지 않아도 구조 3팀에서 수혁의 역할이 큰데 빠져 버리면, 오히려 이쪽에 공백이 생긴다.
“여기도 지원이 나올 거다. 돌려막기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박상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아무튼 조심히 다녀와라. 무슨 일 생기면 꼭 연락하고.”
“그럴게요.”
박상태가 사무실 안으로 사라지자 수혁이 머리를 긁적였다.
“한번 해보자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