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183화
‘조금 돌아가야겠군.’
수혁이 ‘미니 맵’을 확인했다.
자신이 봐둔 장소는 지금 이동하고 있는 복도를 따라 쭉 전진만 하면 나오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곳으로 갈 수가 없었다.
화재가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혁은 하는 수 없이 길을 좀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한쪽 모퉁이에서 방향을 꺾었다.
“대체 어딜 가는 거지?”
뒤쪽에서 전승철의 음성이 들려왔다.
음색이 착 가라앉은 것으로 봐선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 같았지만, 그와 동시에 왠지 싸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 수혁에게 말을 놓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제야 좀 옛날 같네.’
수혁은 그런 전승철의 모습이 훨씬 낯에 익었다.
같은 현장에서 만나면 전승철은 항상 저렇게 싸늘한 말투로 수혁을 내리눌렀다.
몇 년간 그런 모습만 봐오다가, 갑자기 호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존댓말을 써주는 전승철을 보니 어색할 수밖에.
“아까 설명드렸을 텐데요.”
무전기로 박상태와 연락하며 사다리차를 댈 장소까지 모두 이야기한 상태였다.
하지만 전승철은 듣지 못한 듯했다.
한창 정신이 나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못 들었다. 다시 설명해.”
‘적반하장이라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었지?’
수혁은 전승철의 말에 헛웃음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다급한 구조 요청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와 구해줬더니…….
수혁은 그의 말을 무시하려다, 이내 생각을 바꿔 혀를 차며 대답해 주었다.
또 괜한 시비에 휘말려 시간을 낭비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곳으로 오며 봐둔 장소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사다리차를 타고 빠져나갈 계획입니다.”
“봐둔 곳이 있다고?”
전승철이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수혁을 노려보았다.
사실 수혁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혁에게 품은 감정과는 별개로, 실력과 능력 자체는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냥 시비를 걸고 싶은 것이었다.
수혁은 그런 전승철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그랬기에 더욱 짜증이 났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대원에게 온 정신을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계속해서 신경에 거슬렸다.
“네, 있습니다. 그게 문제가 됩니까?”
그래서인지 수혁의 대답은 조금 날카로웠다.
그것을 느낀 것일까?
전승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팀장님.”
분위기가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낌 대원 중 한 명이 그런 전승철을 뒤에서 불렀다.
“조금 진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대원의 표정에는 걱정이 가득해 보였다.
부상을 입은 동료에 대한 걱정도 있었지만, 아까부터 계속 이상하게 행동하는 전승철에 대한 걱정도 컸다.
“지금은 이 녀석들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는 게 급선무입니다.”
대원의 말에 전승철이 멈칫- 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이성적인 생각과 행동이 필요할 때다.
아무리 화가 나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상태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부하들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전승철은 심호흡했다.
그리고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에 집중했다.
“알았다.”
전승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도 수혁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물론 수혁이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홀로 달려와 준 것은 고마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팀장인 전승철과 갈등을 빚은 것이 문제였다.
본래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었으니, 대원의 입장에선 팀장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수혁과 신경전을 벌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어찌 됐든 수혁이 없으면 자신들만으론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으니까.
나중에 문제를 삼더라도 지금은 수혁의 말을 따르는 것이 좋았다.
다행히 전승철은 대원의 말을 알아듣고 더는 수혁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아니, 대화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로 수혁의 뒤만 따를 뿐이었다.
앞서가던 수혁은 이런 분위기에 괜히 가슴이 답답해졌다.
‘후…….’
작게 한숨을 내쉰 수혁은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에만 신경쓰기로 했다.
전승철과의 문제는 그 후에 해결하면 되었다.
‘사과해야 하려나?’
어찌 됐든 전승철은 수혁보다 상급자다.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이긴 했지만, 그런 전승철을 밀어 넘어뜨린 것은 분명 나중에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게다가 수혁은 언젠가 특수 구조대로 옮길 의향이 있었으니, 지금 그와 악연이 된다면 고달파질 게 뻔했다.
솔직히 사과하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었지만, 훗날 있을 귀찮은 일을 피하려면 그게 가장 쉬운 길이었다.
‘이전 생에서도 그러더니, 나랑은 진짜 안 맞는 사람이네.’
웬만하면 전승철과는 엮이고 싶지가 않았다.
수혁은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미니 맵’을 통해 확인한 경로를 따라 몇 분가량 이동한 끝에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일단 이쪽에 부상자들을 내려놓으시죠.”
수혁이 안내한 곳에는 불이 거의 번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곳이라면 창문을 통해 충분히 빠져나가고도 남을 정도로 안전해 보였다.
수혁이 품에 안고 있던 대원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자, 다른 대원들도 부상자들을 내려놓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수혁과 달리, 그들은 매우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장비와 사람을 동시에 들고 움직이는 것은 엄청난 체력과 근력을 요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작 몇 분을 움직인 것만으로도 체력이 바닥이 나버렸다.
“여, 여기서 나가면 되는 겁니까?”
대원 한 명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네. 지금쯤이면 준비가 되었을 겁니다.”
수혁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무전기를 들었다.
“상태 형.”
[말해.]
“저희는 도착했어요. 사다리차는 언제쯤 가능해요?”
[잠깐만 기다려. 지금 준비 다 되어간다.]
그 말에 수혁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쳐다봤다.
박상태의 말대로 사다리차가 올라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상을 입은 대원이 세 명. 그중 한 명은 좀 심각해요. 구급대에 말해서, 곧장 병원으로 이송해야 해요.”
[이미 대기 중이다. 너는 좀 어때?]
“저는 괜찮아요.”
[……별문제는 없고?]
박상태는 수혁의 무거운 음성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혁이 전승철을 힐끔 쳐다보았다.
이쪽을 노려보고 있던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 그런 전승철을 쳐다보던 수혁이 입을 열었다.
“뭐, 별문제는 없었어요.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뭔가 있긴 하구만?]
‘귀신이야, 뭐야?’
어떻게 무전기를 통한 대화로 이런 걸 눈치챌 수 있는 것인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별거 아니에요. 잠시 후에 내려가서 봬요.”
수혁은 서둘러 무전을 끊었다.
괜히 전승철을 또 자극할 것만 같았던 것이다.
수혁은 애써 전승철을 외면한 채 부상자를 살폈다.
길게 찢어진 복부에서 출혈이 계속되고 있었다.
만약 빠른 응급 처치를 하지 않았더라면 사망했을 정도의 부상이었다.
‘지금도 좀 위험한데.’
출혈이 심했다.
이미 너무 많은 피를 쏟아냈기 때문에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가 올지도 몰랐다.
“사다리가 올라오면 일단 이분부터 옮기겠습니다.”
수혁의 말에 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봐도 가장 시급한 건 그 대원이었으니까.
하지만 전승철은 왠지 못마땅한 것 같았다.
“아주 지가 대장인 줄 아는군.”
작은 혼잣말.
주변이 너무도 시끄러워, 자신밖에는 듣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소리를 수혁은 놓치지 않았다.
‘하아, 진짜…….’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수혁이 위험한 행동을 한 것은 맞다.
하지만 수혁이 그렇게 서두르지 않았더라면 시간이 더 오래 걸렸을 테고, 그럼 지금 이 대원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결과론적인 말이긴 했지만, 전승철은 수혁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고마움을 표현해야만 했다.
‘그런데 저렇게 꽁해 있으니, 원.’
수혁은 전승철이 얼마나 속이 좁은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앞으로 피곤한 일이 이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사과는 무슨.’
저 정도로 어긋나면 사과를 해도 풀어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수혁은 사과하기로 했던 좀 전의 생각을 바꿨다.
‘누가 이기나 보자.’
지금의 수혁은 이전 생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많은 부분에 있어서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이전 생처럼 일방적으로 전승철에게 숙이고 들어갈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만약 전승철이 자신을 건드리면, 결코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김수혁!”
그때, 드디어 사다리가 창문에 걸리며 박상태의 외침이 들려왔다.
수혁은 박상태를 보고 반색했다.
같은 팀장인데도 사람이 너무도 달랐다.
‘상태 형 같은 사람이 특구에 들어갔어야 했는데.’
박상태라면 실력도, 인성도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그라면 전승철 대신 팀장을 맡아도 무리 없이 이끌어 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박상태가 특수 구조대에 들어갈 생각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부상자부터!”
박상태는 수혁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부상자를 먼저 챙기기 시작했다.
수혁이 조심스럽게 부상자를 박상태에게 넘기자, 사다리는 바로 아래로 향했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사다리가 왕복하며 부상자들을 실어 날랐고, 이내 자신들 차례가 되었다.
“먼저 가시죠.”
수혁은 지친 대원들을 먼저 내보내기로 했다.
“저흰 괜찮으니 김수혁 씨 먼저…….”
“아니요, 먼저 가세요.”
대원들은 양보하려 했지만, 수혁은 고개를 저었다.
“누가 타든 빨리 타! 시간 없어!”
박상태가 소리를 지르자 대원들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자신들이 먼저 빠져나가기로 했다.
그렇게 대원들이 사라지자, 남은 것은 수혁과 전승철뿐이었다.
수혁은 아무런 말도 없이 서 있는 전승철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뭘 보지?”
그런 수혁의 시선이 신경쓰였는지, 전승철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생각? 무슨 생각?”
전승철은 수혁에게 시비를 걸진 않았지만, 그 음성에는 적대감이 가득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하는 생각이요.”
“……뭐?”
수혁의 말에 전승철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 말 알아들으셨을 텐데요?”
수혁이 도발적으로 말했다.
“하, 이 새끼가.”
전승철은 그런 수혁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는지, 헛웃음을 내뱉으며 수혁에게 다가왔다.
“왜요? 또 멱살이라도 잡으시려고?”
수혁 역시 그런 전승철에게 다가갔다.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간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너 미쳤냐? 내가 존댓말 써주고, 살갑게 대하니까 우스워 보여? 이 새끼야, 나는 특구 팀장이야!”
전승철이 수혁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 저 새끼 하지 마시죠. 저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신일서 구조 3팀밖에 없으니까.”
반면 수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딱딱한 음성으로 나지막이 대꾸했다.
그러곤 전승철을 향해 경고했다.
“아, 그리고 앞으로 저를 찍어 누를 계획이시라면, 조금 더 잘 생각해 보셔야 할 겁니다. 제가 이래 봬도 능력이 좀 있어서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