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178화
“특수 구조대가 도착했다고?”
“그렇다고 하네요.”
“허, 참.”
신재식도 무전의 내용을 들었는지, 어이없다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치들이 대단한 건 알겠지만…….”
위쪽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은 채, 무작정 꼼짝 말고 자신들에게 기다리라니.
물론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지시를 따르는 것이 맞다.
괜히 섣불리 움직였다가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여기에 있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다.
모두가 훈련받고, 경험도 많은 구조대원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자신들과 연락을 취해 이쪽의 상황을 먼저 파악한 뒤, 서로 방법을 의논해야만 했다.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신재식이 혀를 찼다.
과거에 특수 구조대와 무슨 충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수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번 생에서야 접점이 그리 많지 않았다지만, 이전 생에서는 몇 번이고 부딪혔다.
정확히 말하자면 특수 구조대 자체보다는 전승철과 갈등이 있던 것이었지만 말이다.
“어찌 됐든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없으니 이동하죠.”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일단은 한 층씩 내려갈 생각입니다.”
“밑으로 갈수록 화재가 더 심각할 텐데.”
소화기 한두 개 가지고는 어림도 없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틀림없이 부족할 것이다.
그럼 어느 순간부턴 도저히 밑으로 내려갈 수 없는 상황이 올 테고.
신재식은 수혁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과연 자신과 같은 방법을 생각해 냈을지도 기대도 됐다.
“사다리차가 닿을 수 있는 곳을 찾아야죠.”
수혁의 대답에 신재식이 씨익- 하고 웃었다.
자신과 같았다.
옥상에서는 사다리차를 이용한 구조가 불가능했지만, 아래층은 아니다.
불길이 조금 덜한 곳만 찾는다면, 얼마든지 사다리차를 이용해 빠져나갈 수가 있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네. 그렇게 하는 게 지금 상황에선 최선이겠지.”
그냥 특수 구조대를 기다리는 방법도 있긴 했다.
그들이라면 분명 자신들이 있는 곳까지 도착해서 구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특수 구조대가 아무리 빨라도 이 방법보다 빠를 순 없었다.
불길과 싸우며 계단을 오르는 사람의 속도와 그저 레버만 당기면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사다리차.
둘 중 어느 쪽이 더 빠를지는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명확했다.
‘그게 가능한 장소를 찾는 것이 문제긴 한데.’
수혁은 그리 걱정을 하지 않았다.
‘미니 맵’으로 확인한 결과, 지금 자신들이 있는 8층에는 붕괴와 화재로 인해 마땅한 장소가 없었지만, 한 층만 더 내려가도 괜찮은 곳이 있었다.
그곳에서 소화기를 사용하여 공간을 확보한다면, 곧장 사다리차를 이용해 빠져나갈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일련의 계획을 세운 수혁은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변은 여전히 위험했다.
바닥에 쌓인 잔해들로 인해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었고, 가끔씩 달려드는 불길은 위협적이었다.
가장 위험했던 상황은, 불길 한가운데에 놓여 있던 산소통을 발견했을 때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것을 발견하는 게 늦었다면, 산소통이 폭발하며 엄청난 화재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다행히 수혁이 제때 반응했기에 망정이지,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
수혁은 그 모든 위험이 닥쳐오기 전에 모두 차단했고, 신재식은 지금까지 무사할 수 있었다.
이동하며 계속해서 수색도 이어갔다.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소화기를 더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남은 소화기는 몇 개 되지 않았다.
고작해야 하나를 더 찾았을 뿐.
나머지는 모두 터지거나 제 위치에 없어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아쉽긴 했지만 아예 발견하지 못하는 것보단 나았다.
두 개 정도면 어느 정도의 위협에는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으니까.
여차하면 수혁이 직접 나서면 되었고.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아무래도 여기서 소화기를 하나 사용해야겠군.”
신재식이 눈앞의 계단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계단에 더는 사람이 오르내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붕괴로 인한 잔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불길이었다.
‘그때랑 비슷하다.’
계단이 불과 잔해로 가로막혀 도저히 올라갈 수 없었던.
바로 독일에서의 현장.
당시 수혁은 도끼로 길을 뚫고 진입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소화기가 있으니까.’
수혁이 새삼 신재식에게 감탄했다.
만약 신재식이 소화기를 생각해 내지 못했더라면, 이곳에서 시간을 더 허비할 뻔했다.
지금은 그때처럼 길을 뚫을 수 있는 도끼도 없으니 말이다.
“사용하겠습니다.”
수혁이 소화기의 안전핀을 뽑았다.
소화기 용량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소화전처럼 마음대로 사용할 순 없었다.
그러니 신중하게 적재적소에만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사실 수혁은 방수나 화재 진압에 대해서 그리 잘 알지 못했다.
기본적인 교육은 받았고, 어느 정도 경험도 있긴 했지만…….
‘어디를 꺼야 하지?’
이런 현장에서 구조가 아닌 화재 진압을 해본 적은 없었기에, 수혁은 잠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스킬에도 진화에 대한 것은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여기와 여기, 그리고 저기.”
그때, 신재식이 손을 들어 몇 군데를 가리켰다.
수혁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어떤 상황인지 눈치채고는 개입한 것이다.
“저 세 군데만 진압하면 길이 자연스럽게 열릴 걸세.”
계단 위는 불로 가득 차 있었다.
단순히 몇 곳의 불을 끈다고 사그라질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신재식의 표정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마치 수혁이 구조를 나갈 때 보이는 모습처럼 말이다.
그런 신재식의 표정을 본 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능력들은 수혁이 앞서 있을지 몰라도, 경험과 통찰력은 신재식이 월등하게 앞섰다.
그런 신재식이 허튼소리를 할 리가 없었다.
수혁은 신재식의 말을 믿고, 그가 가리킨 곳을 향해 소화기의 호스를 내밀었다.
그러곤 손잡이를 눌렀다.
푸화아악-!
호스에서 새하얀 분말이 뿜어져 나갔다.
분말은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길에 닿으며, 질식 작용으로 인해 불길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다음 곳!”
어느 정도 불길이 줄어들자, 뒤에서 그것을 보고 있던 신재식이 소리쳤다.
수혁은 곧장 다음 지점을 향해 호스를 돌렸다.
그렇게 나머지 두 곳을 향해 소화기를 사용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길이 열렸다.
고작 세 군데.
그 한정된 지점의 불길을 잡은 것만으로도 불길이 확연하게 줄어들며 충분히 사람들이 오갈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수혁은 자신의 손에 있는 소화기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말이 되나?’
만약 신재식의 조언 없이 수혁 홀로 불을 끄려고 했다면, 절대 소화기 하나로는 불가능했을 정도로 커다란 규모의 화재였다.
소화기의 효과가 아무리 좋다고는 하지만, 이런 식의 진화는 해본 적도, 본 적도 없었기에 수혁은 더욱 큰 충격을 받았다.
“잘했네.”
신재식은 멍하니 서 있는 수혁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저는 그냥 시키신 대로 한 것밖엔…….”
신재식의 칭찬이 민망할 정도였다.
“뭐, 어쨌든 길을 열지 않았나?”
신재식이 웃으며 수혁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아직 가르칠 게 있긴 하군.’
이제 고작 1년밖에 되지 않은 햇병아리가 이런 방법까지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신재식이 이렇게 할 수 있던 것은 수십 년간 다져온 경험 덕분이었으니까.
신재식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것만 같았던 수혁이 아직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괜히 기꺼웠다.
자신이 이 세상에 얼마나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동안만이라도 자신의 경험을 조금이나마 전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가지.”
신재식의 말에 수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자신이 불을 끈 계단을 내려갔다.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신기한가?”
감탄하며 계단을 내려가던 수혁이 갑작스런 신재식의 물음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네. 신기합니다. 소화기 하나로 이렇게까지 진화가 가능하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신재식이 알기에도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전국을 통틀어 몇 명 되지 않았다.
“이곳에서 빠져나가면 가끔 한 번씩 들르게.”
“……네?”
수혁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보자, 신재식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내 가기 전에 자네에게 몇 가지 가르쳐 줄 게 있으니.”
수혁은 신재식이 자신에게 무엇을 가르쳐 준다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33년간 쌓아왔던 경험과 지식.
그것은 그냥 말로 가르쳐 준다고 해서 알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신재식도 그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금이나마 수혁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것일 테고.
신재식의 마음을 느낀 수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종종 들르겠습니다.”
이렇게까지 신경써 주는 신재식의 마음을 거부할 순 없었다.
수혁도 신재식의 경험과 지식들을 배우고 싶었다.
그것을 배운다면 지금보다도 더 빠르고 안전한 구조가 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조금 전 생각한 것처럼, 그건 말로 배울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그냥 말 상대를 해드린다고 생각하자.’
비록 배우지는 못할지언정, 신재식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얻는 것도 조금은 있을 테고.
“좋아. 그러려면 일단은 여기서 얼른 벗어나야겠군.”
아직 자신이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서일까?
신재식의 얼굴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럼 조금 더 빨리 움직이겠습니다. 힘들면 말씀해 주세요.”
“나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게.”
신재식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다.
수혁이나 김강식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고, 또한 자신은 아직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그냥 주저앉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아 수혁의 뒤를 따랐다.
만약 김강식이 옆에서 팔을 붙잡아주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냥 쓰러져 버렸을지도 몰랐다.
수혁과 일행은 그렇게 계단을 내려와 7층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여긴…….”
수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불길로 가득한 계단을 봤을 때 예상했어야 했다.
7층은 말 그대로 발을 디딜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여기에서 화재가 시작된 것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겠는데.”
단순히 옮겨붙은 수준이 아니었다.
“음…….”
수혁이 생각해 둔 곳으로 가려면 이 불의 장막을 뚫어야만 했다.
신재식을 돌아봤지만, 그는 이번엔 소화기 하나로는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스킬을 써야 하나?’
하지만 ‘실드’를 사용한다고 해도 신재식의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는 ‘실드’는 수혁만을 보호하는 스킬이었으니까.
전통시장 화재 때, 마지막 요구조자를 구한 것처럼 신재식에게 방화복을 입힌 뒤 자신은 스킬을 사용한다면 뚫을 수는 있겠지만…….
그 방법은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에나 가서 사용해야만 했다.
‘어떻게 한다……?’
이 정도 화재라면 특수 구조대도 쉽게 뚫고 올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봄베의 산소가 모두 바닥이 날 테고.
수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뭔가를 떠올리고는 멈칫- 했다.
‘산소통!’
8층에서 발견하고 한쪽으로 치워두었던 산소통이 떠올랐다.
‘그거라면…….’
방법이 생길지도 몰랐다.
조금 거칠긴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