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177화
안전한 길은 없다.
‘미니 맵’으로 이미 확인한 뒤였다.
안전하기는커녕, ‘위험 감지Ⅲ’로 본 수혁의 시야에는 온 사방에 위험 요소가 가득했다.
자칫 발을 한 번만 잘못 디뎌도 잘못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했다.
“일단은 사다리차는 패스하고.”
박상태에게 말을 했다시피, 사다리차를 이용해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시간이라도 많았다면 방수를 통해 불길을 잡은 뒤 빠져나갈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때까지 기다릴 만한 여유도 없었다.
“그럼 결국 남은 길은 밑으로 내려가는 것밖에 없다는 건데…….”
신재식이 아래를 쳐다봤다.
불구덩이가 보였다.
위험해 보였지만, 이쪽 외에는 다른 길이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려가야겠네요.”
수혁 역시 신재식의 말에 동의했다.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는 상황에 동의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우스웠지만, 셋은 밑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방화복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수혁과 김강식은 방화복을 입고 있었지만, 신재식은 얇은 환자복과 가디건 한 벌이 전부였다.
불길 덕분에 춥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화상과 부상의 위험이 높았다.
“제 것을 입으시죠.”
수혁이 봄베를 벗으며 말하자, 신재식이 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닐세. 그러지 말게.”
“저는 방화복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장비가 없으면 소방관도 민간인과 별 다를 바 없는 존재다.
그저 평범한 사람에 비해 조금 더 훈련을 받았다는 것만 다를 뿐이었다.
앞으로 나서서 요구조자를 구해야 할 구조대원이 방화복을 벗어선 안 된다.
수혁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몰랐기 때문에 한 생각이었지만,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난 그걸 입고 움직일 체력도 없다네.”
사실 신재식은 이렇게 걷는 것도 힘들었다.
몸에 퍼진 암세포가 그의 체력을 쉴 새 없이 갉아먹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 무게만 5㎏에 달하는 방화복을 입고 움직인다?
몇 발자국 움직이지도 못하고 지쳐 버릴 게 뻔했다.
신재식의 말에 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제로 방화복을 입힌 뒤 업고, 안고, 다닐 수도 있었지만, 신재식은 그것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최대한 제 옆에서 떨어지지 말아주세요.”
“그렇게 하겠네.”
업그레이드 된 ‘위험 감지Ⅲ’ 스킬은 이제 수혁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위험도 감지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 옆에 붙어 있기만 한다면, 웬만한 위험에서는 충분히 그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신재식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는 듯, 수혁의 뒤쪽에 바짝 붙었다.
“그럼 먼저 내려갈게요.”
수혁이 김강식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밑으로 뛰어내렸다.
쿵-!
무너져 내린 잔해들로 인해 바닥은 불안정했지만, 수혁은 수월하게 착지를 했다.
그러곤 일단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쌓여 있는 돌을 치워 평평하게 만들고, 불에 타오르고 있는 것들을 발로 걷어차 멀리 날려 버렸다.
옆에서 보기에는 별다른 힘도 들이지 않고 쉽게 하는 행동 같았지만, 사실 수혁이 아니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애초에 저 돌덩이들을 맨손으로 들어서 치우는 것 자체가 엄청난 힘을 요구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김강식과 신재식은 수혁이 너무도 쉽게 옮기기에, 그저 ‘생각보다 무겁진 않은가 보다’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천천히 내려오세요.”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수혁이 위를 쳐다보며 말을 했다.
그러자 김강식이 신재식의 손을 붙잡고는 천천히 밑으로 그를 내리기 시작했다.
“조심, 조심.”
수혁이 밑에서 그런 신재식을 받았다.
“고맙네.”
신재식이 수혁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심각하군.”
대체 불이 언제 이렇게까지 퍼진 것일까?
아무리 폭발로 인해 불길이 거세졌다고는 하지만, 지하에서 시작된 불이 벌써 8층까지 올라왔을 리가 없었다.
“뭔가 원인이 있을 텐데…….”
화재가 시작된 곳이 지하에 있는 기계실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있다던가, 그게 아니라면 폭발로 인해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인화 물질에 불이 옮겨붙었다던가.
단순히 불이 퍼지는 것만으로는 이런 속도로 화재가 빠르게 번질 수 없었다.
“뭐, 그건 후에 경찰에서 알아낼 일이지.”
지금 중요한 건 ‘이곳에서 어떻게 빠져나가는가?’였다.
신재식은 일단 주변을 살펴보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밑으로 내려오는 김강식을 받아준 수혁이 그런 신재식의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뭘 찾고 계십니까?”
길을 찾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뭔가 작은 물체를 찾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뭐긴 뭐겠나? 소화기지.”
“아…….”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이곳은 병원이다.
이런 공공시설물에는 의무적으로 일정 구간마다 소화기를 설치해 놓아야만 한다.
수혁은 그저 빠져나갈 생각만 했지, 소화기를 찾는다는 발상은 해보지도 못했다.
“자네들도 한 번 찾아보게. 이 근처에 하나쯤 있을 것 같으니.”
신재식의 말에 수혁과 김강식이 주변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아무런 대비도 없이 맨몸으로 움직이는 것과 소화기를 휴대한 채 이동하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비치용 소화기의 용량이 그리 크지 않아 오래 사용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유사시에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불길로 인해 앞이 막혔을 때 길을 뚫는 용도로 쓸 수도 있었으니…….
“찾았다!”
주변을 뒤적거리던 수혁의 귓가에 김강식의 외침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김강식이 잔해 사이에서 붉은색의 소화기를 꺼내 드는 것이 보였다.
“상태는 어떤가?”
“괜찮습니다. 스크래치가 조금 있긴 한데, 사용하는 것에는 문제없어 보입니다.”
“다행이군.”
소화기가 있을 것은 알았다.
하지만 그것이 온전히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가능성이 더 컸다.
붕괴에 휘말린 소화기가 폭발하며 내용물을 다 쏟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멀쩡했다.
“혹시나 하고 찾아본 건데 운이 좋았어.”
탈출의 시작이 좋았다.
그래서일까?
신재식의 표정 역시도 밝아졌다.
“다니면서 괜찮은 소화기가 더 있는지 찾아보는 것도 좋겠군.”
8층이 이 모양이었으니, 아래층의 화재는 더 심할 것이 뻔했다.
그런 상황에 소화기는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수혁은 신재식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속으로 반성을 했다.
사실 수혁은 회귀 후, 레벨과 스킬을 얻고는 모든 일을 자신의 힘으로만 해결하려는 성향이 컸다.
대부분은 그것으로 해결이 가능했으니, 지금까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신재식의 모습을 본 수혁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경험.
그저 힘으로만 해결하는 것이 아닌, 그동안 축적된 경험을 통해 사소한 해결방법을 찾고, 그것을 이용해 구조한다.
소화기를 찾는다는 발상은 정말 별것 아니었지만, 그 작은 발상을 통한 효과는 절대로 무시할 수가 없었다.
수혁 혼자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요구조자가 있을 때라면 더욱 그랬다.
수혁은 지금껏 해왔던 자신의 행동에 반성했다.
‘조금 더 생각하자.’
그저 자신의 능력만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더 쉽고 안전한 구조를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생각해야만 했다.
그것이 수혁 자신이나 요구조자에게 더욱 좋았다.
“뭐 하고 있나? 앞장서지 않고.”
신재식이 멍하니 서 있는 수혁을 불렀다.
그 소리에 수혁이 퍼뜩- 정신 차렸다.
“그럼 가시죠.”
수혁은 김강식에게 소화기를 건네받고는 앞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미니 맵’은 여전히 안전한 길을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안전한 길 따위는 없었으니까.
수혁은 안전한 길 대신 덜 위험한 길을 찾아내는 것에 집중했다.
‘여긴 안 돼, 여기도…….’
주변이 온통 위험 요소 천지였다.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봐도 위험하다고 느낄 만한 것도 많았고, 오직 ‘위험 감지Ⅲ’로만 감지할 수 있는 것들도 많았다.
예를 들어…….
“정지!”
수혁이 손을 들며 소리치자, 뒤를 따르던 두 사람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철제 환풍구가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르릉-!
환풍구는 수혁 일행의 바로 코앞으로 추락했다.
단 한 발자국만 더 앞으로 갔더라면 그 밑에 깔리고 말았을 정도로 가까웠다.
“괜찮은가?”
깜짝 놀란 신재식이 수혁의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네, 다행히 빨리 발견해서 괜찮습니다.”
수혁이 살짝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위험했어.’
다른 쪽을 확인하느라 미처 눈앞의 위험 요소를 발견하지 못했다.
발견이 1초만 늦었더라면 큰일이 날 뻔했다.
수혁이야 그렇다 쳐도 김강식과 신재식은 저 아래 깔리면 절대 무사하지 못했을 테니까.
수혁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집중하자, 집중.’
잠깐의 방심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었다.
수혁은 위험 요소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에 힘을 주고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덕분에 걸음이 느려지고, 이동이 더뎌졌다.
“조금 서두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신중한 것은 좋다.
하지만 수혁의 모습이 신중을 넘어,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자 뒤에서 김강식이 염려가 담긴 음성으로 물었다.
“저도 그러고 싶긴 한데…….”
이게 최선이었다.
방금 전과 같은 상황을 또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최대한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김강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수혁을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
수혁이 이렇게 행동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신재식은 그런 수혁의 등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 참.’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뒤에서 보는 수혁의 모습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방금 전의 일도 그렇지만, 그보다는 정말 사소한 위험 요소까지 하나하나 모두 발견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
신재식도 온 감각을 끌어올려 주변을 살피고 있었지만, 자신조차도 발견하지 못한 것을 수혁은 모조리 찾아냈다.
그러면서 그것에 주의를 주며 인도하는 수혁의 모습은 놀랍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허허…….’
신재식이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수혁의 놀라운 모습을 여러 번 보긴 했지만, 정말이지 볼 때마다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거 늙은이의 잔소리는 필요가 없겠어.’
신재식은 수혁의 뒤를 따르며 조금이라도 경험을 전수해 주고자 했었다.
하지만 수혁에겐 그의 조언이 별로 필요 없어 보였다.
혼자서도 알아서 잘하고 있었으니까.
신재식은 대견함과 씁쓸함을 동시에 느꼈다.
대단한 후배가 생겼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
그리고 이젠 그런 후배와 함께 일을 할 수 없다는 슬픔.
상반된 두 감정을 동시에 느끼며 신재식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김수혁, 아직 살아 있냐?]
그때, 박상태가 무전으로 연락을 해왔다.
“네, 아직은 살아 있네요. 무슨 일 있어요?”
갑자기 온 무전에 수혁은 혹시나 또 다른 변수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급히 물었다.
[일이 생겼다면 생긴 건데…….]
“뭔데요?”
수혁은 제발 여기서 더 나쁜 상황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특수 구조대가 왔다. 지금 올라갈 거야.]
“……특구요?”
[전 팀장은 너보고 그 자리에서 꼼짝 말고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으라는데. 어떻게 할래?]
박상태의 말에 수혁이 픽- 하고 웃었다.
여기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라고?
전승철은 이곳의 상황을 알지 못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 특수 구조대를 기다리다간, 모두 통구이가 될 수도 있었다.
“저희끼리 빠져나갈 수 있으니까 괜한 고생 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