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145화
검은 양복의 외국인은 한 명이 아니었다.
‘더 늘었네?’
처음 수혁이 봤던 경호원은 네 명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일곱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런 경호원들 사이에는 짐 머레이가 한껏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수혁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이도 지긋하신 분이 참 해맑으시네.’
짐 머레이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푸켓에서 처음 봤을 때와는 정말 다른 분위기였다.
“수혁!”
짐 머레이는 노령에 맞지 않은 몸놀림으로 수혁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그러곤 말릴 새도 없이 포옹하며 크게 웃었다.
“이거 오랜만에 만나니 반갑군!”
“반갑다고 하시네요.”
경호원이 통역을 해주었다.
수혁도 그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고맙다는 듯 고개를 숙여 보였다.
“대체 어떻게 여길 찾아온 겁니까? 그것도 이렇게 빨리?”
“나도 이제 나름대로 한국에 적응했으니까.”
대체 적응한 것과 여길 어떻게 찾았는지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혁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사고를 치겠다고 했다면서?”
“……죄송합니다. 제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무리한 부탁을 드렸네요.”
“그렇게 생각하지 말게.”
수혁이 무슨 사고를 쳤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사실 상관없었다.
짐 머레이는 수혁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것을 덮을 수 있을 만큼의 돈과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정말로 수혁이 사람을 죽였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긴 하겠지만 말이다.
수혁은 지금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불을 끄기 위해 억지로 소방차를 이동시켰다는 것과 그 과정에서 불법 주차되어 있던 차량 다수를 훼손시켰다는 것을 말이다.
수혁의 말을 듣던 짐 머레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사고란 말인가?”
짐 머레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워낙 돈이 많은 사람이니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수혁은 단순히 짐 머레이가 가진 돈이 많아 차 몇 대 부순 것은 사고 취급도 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짐 머레이의 말뜻은 그것이 아니었다.
“설마 한국은 이게 소방관의 책임이란 말인가?”
애초에 수혁과 짐 머레이는 개념 자체가 달랐다.
긴급 출동한 소방차의 진로를 막는다?
미국에선 이런 경우 얼마든지 차를 박살 내고 지나가도 된다.
차에 스크래치가 나든, 창문이 깨지든, 두 쪽으로 갈라지든.
잘못은 불법 주차한 차주였다.
그런데 한국은 그와 정반대였다.
차가 골목길을 막고 있어 불을 끄지 못하다니?
짐 머레이의 입장에선 이건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수혁은 부끄러워져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그리고 그것은 뒤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구조팀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는 그들의 잘못은 단 하나도 없었음에도, 괜히 낯이 뜨거웠다.
“코리아. 좋은 나라지. 하지만 가끔씩 보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많아.”
짐 머레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알겠네. 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해 주지.”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짐 머레이가 껄껄 웃었다.
“나는 또 사고를 친다기에 무슨 큰일이 벌어졌나 싶었는데. 이 정도는 사고 축에도 못 끼지.”
짐 머레이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영어로 대화하는 탓에 수혁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구조팀장은 어느 정도 알아들었는지 눈이 커졌다.
짧은 통화를 끝낸 짐 머레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제 자네에게 불이익이 돌아갈 일은 없을 걸세.”
대체 누구와 어떤 통화를 했기에 이렇게 호언장담을 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짐 머레이는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배상에 관한 문제도 맡겨두고. 이것 참. 보아하니 별로 대단한 차도 아닌데 저 난리들을 치고 있군.”
짐 머레이의 입장에서 파손된 차량들은, 그야말로 껌값이나 다름없는 것들뿐이었다.
직접 전화할 필요도 없이 비서나 경호원들에게 말만 해도 지금 당장 배상이 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실제로 짐 머레이는 경호원 중 한 명에게 알아서 처리하라는 듯한 눈짓을 줬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자, 이제 다 해결됐네.”
짐 머레이가 도착한 지 10분도 되지 않았다.
그중 대부분을 인사와 대화로 보냈고, 문제해결을 위해 움직인 것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것으로 해결되었다니…….
그에게 직접 부탁을 한 수혁이었지만,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저녁이라도 같이 먹었으면 좋겠는데, 아쉽게도 오늘은 선약이 있군.”
“아, 그럼 어쩔 수 없죠. 식사는 다음에 해요.”
답례로 저녁을 사려고 했던 수혁은 짐 머레이의 말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땐 자네 여자친구도 함께하지.”
“그렇게 하시죠.”
짐 머레이는 뭐가 그리 바쁜지 수혁과 잠시 잡담을 더 나눈 뒤, 그대로 떠나버렸다.
“바쁜 양반이네.”
단순히 수혁의 얼굴을 보고 돌아갈 줄 알았던 그가, 몇 달이나 한국에 눌러 앉아 있는 것도 신기했다.
“저분은 누구십니까?”
뒤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대화를 듣고만 있던 구조팀장이 수혁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어……. 글쎄요?”
사실 수혁은 짐 머레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몰랐다.
대충 분위기로 봐선 미국에서 커다란 사업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회사 이름이 무엇인지, 무슨 회사인지조차도 알지 못했다.
짐 머레이에게 은근슬쩍 물어보았지만, 대답해 주지도 않았고.
구조팀장은 수혁의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누군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저런 부탁을 했단 말 아닌가?
“예전에 제가 구조한 분이거든요. 그래서 저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주곤 하시죠.”
“아…….”
구조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혹시 조금 전에 짐이 통화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수혁이 혹시나 하며 물었다.
그러자 구조팀장은 자신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듣긴 들었는데, 제대로 들은 건지는 확신하지 못하겠군요.”
“누구였습니까?”
“행정안전부 장관이라던데.”
“행안부 장관이요?”
수혁은 뭔가를 퍼뜩- 떠올릴 수 있었다.
‘특구!’
잠깐 잊고 있었는데, 분명 박정우의 이야기 속에 등장한 적이 있었다.
행안부 장관과 재경부 장관, 그리고 짐 머레이.
셋이 모종의 관계를 맺고 특구 설립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말이다.
‘행안부 장관하고 통화한 게 사실이라면, 정우 선배의 말이 정말일 수도 있다는 얘긴데…….’
이전 생과는 다른 상황.
자신이 짐 머레이를 구함으로써, 일이 바뀐 듯싶었다.
‘특구라…….’
수혁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자, 구조팀장이 수혁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이제 저희도 철수해야겠습니다.”
“아, 네!”
수혁이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해주신 일,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구조팀장의 말에 수혁이 미소 지었다.
“별말씀을요. 큰일이 생기지 않아 다행이네요.”
“그럼 조만간 신일서로 연락 한번 드리겠습니다.”
구조팀장은 수혁과 악수한 뒤, 대원들과 함께 구조차에 올라탔다.
수혁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크게 숨을 내뱉었다.
‘살렸다.’
뭔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래도 살렸다.
동료 아홉 명의 목숨을 말이다.
괜히 가슴이 벅차올랐다.
여태껏 수많은 생명을 구하긴 했지만,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보람찼다.
멀어져 가는 구조차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있던 수혁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오늘이 가기 전에 신일서에 자신의 소식이 들어갈 것이다.
내일 출근하자마자 온갖 질문이 쏟아질 게 뻔했다.
그때를 대비해 변명거리를 생각해 두어야만 했다.
머리를 긁적이던 수혁이 혀를 찼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집으로 돌아가는 수혁의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워 보였다.
“설명해 봐.”
“……뭘요?”
수혁이 박상태의 시선을 피했다.
“뭘요? 뭘요? 지금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
박상태가 얼굴을 찌푸리자 수혁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 우연이에요, 우연. 볼일이 있어서 잠깐 그 근처에 갔는데 불이 난 걸 발견해서…….”
수혁이 어설프게 둘러댔지만, 그런 말이 먹힐 리가 없었다.
“어제 계속 분위기가 이상하더라니.”
박상태가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찼다.
“그 부분에 대해선 더는 안 물으마.”
박상태는 그냥 마음 편하게 수혁이 정말 신기가 있는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말이다.
“대체 어제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대충 이야기는 듣기는 했다.
수혁의 말을 들은 옆 동네 소방서에서 펌프차로 차들을 그냥 밀어버렸다고.
박상태는 그 말을 듣고는 기겁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국민 정서상 분명 여론은 수혁의 편을 들어주겠지만, 법적으로는 수혁이 잘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런 이야기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배상이며, 소송이며.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었던 박상태가 허무해질 정도로, 그 어떤 말도 없었던 것이다.
그 흔한 인터넷 뉴스 기사조차도 없었다.
그러니 박상태가 궁금해할 만도 했다.
대체 어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말이다.
“음…….”
잠시 고민을 하던 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 사람이 많았으니 시간이 좀 흐르면 어떻게든 알게 될 일이었으니까.
“짐이 좀 도와줬어요.”
“짐?”
갑작스런 외국인의 이름에 박상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기억이 났는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 양반이?”
수혁은 어제 있었던 일을 대충 간추려 설명해 주었다.
현장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그리고 왜 펌프차로 다른 차량들을 밀어버렸는지, 그리고 짐 머레이가 나타나 모두 해결해 버린 일까지.
설명을 들은 박상태가 헛웃음을 지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박상태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 수혁의 어깨를 짚었다.
“너 진짜 미친놈이구나.”
한국의 그 어떤 소방관이 자신이 책임질 테니 차들을 몽땅 밀어버리라고 말을 한단 말인가?
그것도 임용된 지 1년도 되지 않은 새파란 병아리가!
미친놈도 이런 미친놈이 없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수혁이 웃으며 대꾸했다.
사실 그때는 소방관들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무작정 저지르고 본 일이었으니까.
만약 짐 머레이가 나서서 해결하지 못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래도 뭐, 통쾌하긴 했겠네.”
박상태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라고 그동안 불법 주차 때문에 속앓이를 안 했을까?
솔직한 심정으론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 조금 억울할 지경이었다.
“잘했다.”
박상태는 수혁의 어깨 위에 올려 있던 손으로 몇 번 두들겨 주고는 몸을 돌렸다.
“대충 사정은 알았으니까, 이제 들어가자. 근무 준비해야지.”
“넵.”
수혁이 웃으며 박상태의 뒤를 따랐다.
그러고 보니 박상태 역시 이전 생에서는 지금 없었을 사람이었다.
그는 신일역 붕괴 사고 때 순직했으니까.
수혁은 괜히 애틋한 눈으로 박상태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오래오래 삽시다, 상태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