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139화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다.
수혁은 이전 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사다리차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를 경험해 보지 못한 탓이었다.
뉴스에서나 가끔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들었을 뿐.
그런데 한국도 아니고, 독일에서 사다리차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수혁의 눈에 사다리 위에 올라타 있는 소방관과 딸의 모습이 들어왔다.
둘은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
수혁을 제외한 그 누구도 아직은 이상 현상을 눈치채지 못했다.
수혁의 얼굴에 다급한 표정이 떠올랐다.
일단은 난간 너머로 넘어가기 직전의 아버지를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며 뒤로 당겼다.
“어, 어?”
갑작스런 수혁의 행동에 당황한 아버지가 눈을 크게 뜨며 자신도 모르게 몸에 힘을 주며 반항했다.
하지만 그가 수혁의 힘을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수혁은 그를 끌어당겨 다시 옥상 위로 돌려보냈다.
“무, 무슨 짓입니까!”
아버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수혁을 쳐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가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수혁은 사다리 쪽으로 다시 한 번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이리 와!”
수혁이 딸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잔뜩 겁에 질린 어린 딸이 수혁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너 지금 뭐 하는……!”
소방관 역시 수혁의 돌발 행동에 당황하며 소리 질렀다.
“젠장.”
설명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도, 그럴 능력도 없었다.
결국 수혁은 난간 위로 올라가 강제로 딸을 붙잡았다.
“받아요!”
그러고는 아버지를 향해 집어던졌다.
“꺄아아악!”
아래쪽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욕설도 들리는 것 같았다.
그들이 보기엔 지금 수혁이 갑자기 미쳐서 발광하는 것으로 보였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다리 위에 있던 소방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무전기를 통해 뭔가를 다급하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끼기기긱-!
다시 한 번 쇠가 일그러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사다리가 휘청거렸다.
그와 동시에 무전을 하고 있던 소방관의 움직임이 덜컥- 멈췄다.
그 역시 뭔가 이상이 생겼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여기서 떨어지면 죽어.’
5층 건물의 옥상.
이런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무사하기 힘들다.
운이 좋다면 뼈가 부러지는 정도에 그칠 수 있겠지만, 자칫 잘못하다간 목숨마저도 잃을 수 있는 높이인 것이다.
심지어 저 소방관은 더욱 그랬다.
그가 매고 있는 장비는 20㎏이 넘었으며, 등에 있는 봄베 같은 경우엔 쇠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니 맨몸으로 떨어졌을 때보다 부상 입거나 사망할 가능성이 몇 배는 높았다.
아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만약 등으로 떨어져 척추라도 다치는 날에는…….
수혁이 손을 뻗었다.
방금 전까지는 수혁을 미친놈 쳐다보듯 했던 소방관이, 이번에는 손을 마주 뻗었다.
그제야 수혁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아……!’
하지만 그것을 깨닫는 것이 조금 늦은 것 같았다.
갑자기 사다리가 출렁거리며 옆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수혁과 그의 손이 조금씩 멀어졌다.
소방관이 앞으로 몸을 숙이며 팔을 더 뻗어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스크 너머로 보이는 소방관의 눈동자에 당혹감과 두려움이 동시에 떠올랐다.
‘안 돼!’
사다리라도 붙잡아보려고 했지만, 이미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멀어졌다.
수혁이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누군가가 다치거나 죽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으로 뭔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을 했다.
수혁이 난간을 박차고 사다리를 향해 뛰어올랐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어디선가 박상태의 음성이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쿵-!
수혁이 사다리에 안착하자, 그 충격에 넘어지는 속도가 더욱 가속화됐다.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사다리차 자체가 쓰러지는 것이 아니었다.
사다리를 올리던 레일 중간이 꺾이고 있었다.
쇠가 일그러지는 소음은 바로 그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못 막는다!’
더는 수혁이 손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추락할 순 없었다.
수혁은 당황하고 있는 소방관을 끌어안으며, 속으로 외쳤다.
‘실드!’
그리고…….
콰과광-!
사다리가 쓰러졌다.
지양호는 건물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구조상황에 한결 편안해진 표정이었다.
수혁이 어떻게 그 계단을 뛰어넘어 옥상에 도착한 것인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요구조자들이 무사히 구조가 되고 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엄마와 아들이 먼저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이제 남은 것은 아버지와 딸, 그리고 수혁뿐.
지양호는 다시 레일을 타고 올라가는 사다리를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화재의 규모에 비해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나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것도 다 저놈 덕분이지.’
만약 수혁이 아니었다면 시간이 지체되고, 그사이 희생자가 발생했을 수도 있었다.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발생하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신속하게 수색하고, 길을 뚫은 수혁의 능력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응?”
수혁이 내려오면 칭찬이라도 한마디 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잘못 봤나?’
잠시 생각을 하느라 정확하게 보지는 못했지만, 방금 사다리가 한번 휘청거리는 것 같았는데.
지양호는 혹시나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율리안마저도 그랬기에 지양호는 단순히 피곤해서 헛것을 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초 지나지도 않아 그는 자신이 본 것이 헛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었다.
갑자기 수혁이 아버지와 딸을 사다리에서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뭔가 있다!’
밑에서는 난리가 났다.
기껏 구조를 위해 사다리에 태워놨더니, 다시 꺼내는 수혁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과 소방관들은 그런 수혁을 향해 비명과 욕설을 내뱉었다.
구경하던 사람들과 소방관 모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지양호와 율리안, 그리고 수혁과 같이 훈련을 받고 있는 이들뿐이었다.
그들은 수혁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젠장!”
대체 수혁이 왜 저러는 것일까? 하며 쳐다보고 있던 율리안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무전을 들어 다급히 뭔가를 외치기 시작했다.
“아!”지양호도 뒤늦게 발견했다.
사다리가 꺾이고 있었다.
수혁이 아직 사다리 위에 남아 있는 소방관에게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닿지 않았다.
“피해!”
지양호는 사다리가 쓰러지는 지점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하고는 다시 위를 쳐다봤다.
그러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수혁이 옥상에서 사다리를 향해 뛰어내렸다.
미친 짓이었다.
사람을 구하고 싶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저건 그냥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행동 아닌가?
대체 자기가 사다리 위로 올라타서 뭘 할 수 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다리는 순식간에 반으로 접히며 아래로 추락해 버렸다.
콰과광-!
지양호는 차마 그 광경을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 미친놈……!’
저건 최소한 중상이다.
뼈 몇 군데 정도는 작살 나기엔 충분한 사고였다.
아니, 운이 좋지 않다면 아무리 수혁이라 하더라도…….
지양호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차마 사다리가 추락한 현장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저 눈을 감고 다쳐도 좋으니, 제발 살아만 있어주길 기도했다.
“아, 큰일 날 뻔했네.”
그때, 지양호의 귓가에 수혁의 음성이 들려왔다.
갑작스런 사고로 혼란에 빠진 주변의 소음을 뚫고, 또렷한 한국말이 들린 것이다.
지양호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리고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볼 수가 있었다.
“……김수혁?”
수혁이 쓰러진 사다리 사이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한쪽 어깨에는 기절한 소방관을 부축한 채, 너무도 멀쩡한 모습으로.
뼈가 부러지거나 부상 입기는커녕, 가벼운 생채기 하나도 나지 않은 듯했다.
“허, 허허…….”
“수혁!”
지양호와 율리안은 수혁을 향해 달려갔다.
“괜찮나?”
“다친 덴 없냐?”
둘이 동시에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 네, 저는 괜찮은데 이분은…….”
수혁이 기절한 소방관을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실드’로 최대한 보호한다고 하긴 했는데, 추락하며 어딘가에 머리를 부딪친 것 같았다.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기절했을 정도이니 꽤 충격을 받은 듯했다.
“구급대!”
율리안이 뒤쪽을 향해 소리치자,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만 있던 구급대원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달려왔다.
수혁은 소방관을 그들에게 인계해 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괜찮냐? 아니,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바로 병원으로 가자.”
지양호가 수혁의 몸을 살피며 말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수혁은 고개를 저었다.
‘실드’ 덕분에 다친 곳이라곤 전혀 없을뿐더러,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마스크 좀 하나 더 빌릴게요.”
“……뭐?”
“지금 옥상에 요구조자 두 명이 더 있습니다.”
수혁의 말에 지양호와 율리안이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도 당황스러운 상황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양호는 자신이 갖고 있던 마스크를 수혁에게 건네주었다.
“소방 호스도 필요해요.”
사다리차는 없다.
다시 부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기다릴 시간 따윈 없었다.
결국은 수혁이 직접 둘을 데리고 나와야 한다는 뜻.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수혁은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율리안을 재촉했다.
율리안은 의아해하면서도 수혁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마스크를 쓰고 한쪽 어깨에 돌돌 말린 호스를 맨 수혁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수혁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율리안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제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건질 모르겠군요.”
지양호는 그런 율리안의 말에 동의했다.
맥주를 마시기 위해 술집에 들어간 순간부터 지금까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
그리고 그 모든 장면의 중심에는 수혁이 있었다.
무슨 점쟁이처럼 요구조자들의 위치를 척척 찾아내고, 사람 같지도 않은 피지컬을 보여줬으며, 전혀 예상치도 못한 사고까지 일어났다.
그 모든 것을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경험한 것이다.
지양호는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딱히 한 일이 없었음에도, 이 상황 자체가 그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대체 신일서 사람들은 저놈이랑 어떻게 일을 하는 거지?’
단 하루.
그것도 겨우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힘이 들었다.
수혁과 항상 같이 일을 하는 신일서 사람들이 존경스러워질 지경이었다.
“무슨 꿈이라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야.”
지양호가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