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스큐 시스템-134화 (134/425)

레스큐 시스템 134화

5주차.

벌써 연수 기간도 절반 이상이 흘렀다.

사람들은 독일 함부르크라는 이 낯선 땅에 꽤 많은 적응을 했고, 독일 소방관들 역시 한국에서 온 이방인들과 꽤 친해졌다.

“이봐, 양호! 오늘은 영 컨디션이 좋질 않나 봐?”

“시끄러워, 이 배불뚝이야!”

미하일의 놀림을 받은 지양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지양호는 어깨에 더미 인형을 들쳐 메고는 헉헉거리며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11분 21초!”

“역시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이런 훈련에선 힘을 잘 못 쓰는구나.”

“이 나이에 이 정도면 대단한 거지.”

연기가 가득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더미 인형을 찾고,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심지어 풀장비를 착용하고, 70㎏에 육박하는 더미 인형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지양호의 기록은 꽤 빠른 축이었다.

실제로 지양호를 놀리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지양호보다 못한 기록을 냈으니까.

“저 몬스터는 기록이 얼마나 나올까?”

크라우프가 지양호의 뒤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수혁을 가리키며 물었다.

“수혁이라면 10분대 초반 정도는 나오지 않을까?”

“난 9분대로 본다.”

“아무리 수혁이라도 9분대는 좀…….”

한국과 독일 소방관들이 한데 섞여 과연 수혁의 기록이 얼마나 나올 것인지 갑론을박을 펼쳐대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고스란히 듣고 있던 수혁이 민망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9분이고, 10분이고.

사실 수혁이 마음만 먹는다면 5분 안에도 들어올 수 있었다.

‘미니 맵’을 통해 건물 내부 구조를 샅샅이 파악할 수가 있었고, 장비와 더미의 무게 정도는 가볍게 들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그뿐인가?

지금 당장 마라톤을 뛰어도 올림픽 금메달 정도는 우스울 정도의 체력과 지구력도 있다.

아쉽게도 더미가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생명 감지Ⅱ’를 사용할 순 없지만, 그것이 없어도 5분 컷을 하는 것에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물론 그랬다가는 지금과는 비교도 하지 못할 이상한 시선과 의심을 받게 될 테지만 말이다.

‘대충 10분 정도로 할까?’

수혁은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어느 정도의 기록을 낼지 미리 정해두었다.

남들보다 압도적이지만, 그래도 이해는 갈 정도의 수준으로.

“출발!”

출발 신호와 함께 수혁이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곧장 ‘미니 맵’을 활성시켜 구조를 파악한 뒤, 요구조자가 있을 만한 곳을 천천히 뒤지기 시작했다.

‘없고, 없고, ……없고.’

1층에는 없었다.

그것을 확인한 수혁은 망설이지 않고 뒤돌아 2층으로 향했다.

건물 안에는 뿌연 연기가 가득 차 시야를 방해했지만, 수혁은 개의치 않았다.

순식간에 2층에 도착한 수혁을 방금 전처럼 수색을 시작했다.

‘여기도 없네.’

결국은 마지막 3층까지 올라가야만 할 것 같았다.

2층의 수색을 마친 수혁은 느긋하게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실제 현장도 이렇게 느긋하면 얼마나 좋을까?’

요구조자도, 소방관도 생사의 기로에서 필사적으로 움직일 필요 없이 말이다.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긴 했지만, 수혁은 언젠간 그런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 여기 있네.’

3층 구석진 곳의 문을 하나 열자, 그 안에 더미 인형 하나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수혁은 팔을 들어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6분 17초, 18초, 19초…….

‘음.’

너무 일렀다.

서두르지 않고 여유롭게 수색을 했음에도 그랬다.

‘미니 맵도 사용하지 말 걸 그랬나?’

더미를 쳐다보며 잠시 뺨을 긁적인 수혁이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지금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으니, 여기서 시간을 조금 소모한 뒤 나갈 생각이었다.

짙은 연기 속에서 더미와 함께 앉아 있다 보니, 괜히 현장에 출동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지루한 훈련을 반복할 시간에 진짜 사람을 구하고 싶었다.

훈련 기록에서 다른 누구보다 좋은 성적을 내는 것보다, 위험에 빠진 요구조자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백배, 천배 더 보람차고 의미가 있었다.

‘이건 뭐, 일 중독도 아니고.’

이전 생에서는 이런 여유를 얼마나 바랐던가?

그때는 이렇게 몇 주가 아니라, 단 며칠만이라도 좀 사람답게 쉬고 싶었다.

‘그냥 마음을 편하게 먹자.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니까, 그전에 휴식을 취한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이제부터 신일서는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대형 재난들이 연달아 터질 테니까.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길바닥에서 교대로 컵라면을 먹어야 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고 보니 특구 얘기도 지금쯤 나왔던 것 같은데?’

다른 지역과 비교해 너무 많은 사건, 사고가 발생하는 덕분에, 위에선 특구설립을 추진했었다.

‘하지만 무산됐었지.’

예산, 인력, 정치적 이유 등등.

온갖 부정적인 이유를 갖다 붙이며 결국은 언제 그런 말이 나왔냐는 듯 사라졌다.

‘이번에도 그렇겠지?’

특구가 만들어진다면 확실히 앞으로 발생할 재난에 대처하기가 수월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전 생에서도 안 됐는데, 이번 생이라고 달라질 리가 없었다.

수혁은 씁쓸한 표정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나가자.’

시간은 이제 막 9분을 지나고 있었다.

더미 인형을 가볍게 들어 어깨에 걸친 수혁이 걸음을 옮겼다.

개인 보호 장비와 더미의 무게를 합치면 거의 100㎏에 육박하는 무게였지만, 수혁의 발걸음은 처음과 변함이 없었다.

수혁은 숨소리 하나 거칠어지지 않은 채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밖으로 빠져 나갔다.

“10분 12초!”

훈련을 시작하기 전, 수혁이 미리 정해두었던 시간과 비슷한 기록이었다.

“진짜 괴물이 따로 없네.”

“율리안 최고기록이 몇 분이었지?”

“아마 10분 후반대였을걸?”

그들의 입장에서 율리안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과 같은 존재였다.

그 어떤 훈련과 실전에서도 율리안은 항상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수혁이라는 놈은, 그런 율리안을 가볍게 뛰어넘는 미친 괴물이었다.

놀랍다 못해 경악스러울 지경이었다.

소란 속에서 훈련을 끝낸 수혁은 장비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땀 한 방울 안 흘리는군.”

율리안이 그런 수혁에게 다가오며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다.

“원래 땀이 잘 안 나는 체질이거든요.”

수혁이 웃으며 대충 둘러댔다.

변명 같지도 않은 소리였지만, 율리안은 그냥 넘어갔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이 물었지만, 수혁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결국 오늘도 맥주는 내가 사게 생겼군.”

“오늘도 잘 마시겠습니다.”

요즘 둘은 그날 훈련 성적으로 맥주 내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수혁의 전승이었다.

율리안은 계속되는 패배에 기분이 상할 만도 했건만, 항상 웃는 얼굴로 기분 좋게 맥주를 샀다.

“훈련 끝나면 숙소에서 쉬고 있어. 내가 데리러 갈 테니.”

“응? 오늘은 다른 곳으로 가나요?”

둘은 항상 호텔 근처의 작은 바에서 마셨었다.

물론 둘은 대화가 통하질 않으니, 율리안이 항상 통역을 대동해 같이 마셨다.

몇 번이나 가본 곳이었으니 혼자서도 충분히 갈 수 있었는데,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거기도 이제 슬슬 질리기 시작했으니까.”

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수혁은 그 바가 꽤 마음에 들었지만, 술을 사는 사람이 옮긴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몇 시쯤 오시려고요?”

“한 8시 정도?”

“아, 그러면 혹시 오늘은 저 형님들도 같이 가도 될까요?”

수혁이 한쪽에서 쉬고 있는 지양호와 신의성을 가리켰다.

“요즘 계속 저만 외출을 하다보니, 꽤 심심들 하신 것 같아서.”

“물론이지, 대신 술값은 따로.”

“그건 당연한 말이고요.”

수혁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저녁에 보도록 하지.”

율리안이 멀어지자, 수혁은 지양호와 신의성에게 다가갔다.

“오늘 율리안이 맥주 한잔 하자네요.”

“응? 웬일로?”

“요즘 밤마다 심심해하시는 것 같아서 같이 가도 되냐고 물어봤어요.”

“쯧, 쓸데없는 소릴.”

지양호는 혀를 찼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작은 기대감마저 엿보일 정도였다.

“자기가 데리러 올 테니까 훈련 끝나면 저녁 먹고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네요. 아, 그런데 형님은 내기하지 않았으니까, 술값 들고 오셔야 합니다. 율리안이 술을 사는 건 저뿐이니까.”

“그래, 알았다.”

지양호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수혁은 일부러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지양호를 보며 슬쩍 미소 지었다.

보면 볼수록 그는 박상태와 비슷한 모습이 많은 것 같았다.

괜히 신일서 사람들이 그리워졌다.

신일서 사람들도 같은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미안하군, 내가 조금 늦었다.”

율리안이 헐레벌떡 호텔 로비로 뛰어들어 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수혁에게 사과했다.

“괜찮아요. 별로 안 기다렸어요.”

거의 30분가량 기다리긴 했지만, 수혁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얻어먹으러 가는 주제에 물주가 조금 늦었다고 화를 낼 수는 없는 법 아닌가?

“길이 좀 막히는 바람에.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율리안은 이번엔 지양호와 신의성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신경 쓰지 마. 이 녀석 말대로 그렇게 오래 기다리진 않았으니.”

둘 역시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럼 일단 나가시죠.”

잠시 숨을 고른 율리안이 셋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어디로 간다고요?”

“시청 광장 쪽에 괜찮은 술집이 하나 있다. 골목 사이에 있어서 관광객들은 잘 모르는 곳인데, 이곳 토박이들한텐 꽤 유명한 곳이지.”

율리안의 설명에 수혁과 지양호의 얼굴에 기대감이 서렸다.

거리가 좀 있었는지라, 넷은 율리안의 차를 타고 이동을 했다.

율리안의 말대로 차가 밀리는 바람에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걷는 것보단 편하게 술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

술집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수혁이 걸음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수혁?”

“율리안도 있는데?”

“이봐, 양호! 의성!”

술집 안에는 함께 훈련받는 독일 소방관 몇몇이 모여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율리안이 술을 산다기에 따라왔는데, 여러분이 계실 줄은 몰랐네요.”

“아, 그 내기?”

그들에게 있어 수혁과 율리안의 내기는 꽤나 유명한 안줏거리였다.

특히나 율리안이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그랬다.

“들어와, 들어와.”

앞으로 나와 일행을 맞아준 것은 미하일이었다.

“좀 비켜봐, 자리 좀 만들게.”

“아니, 저희는 그냥 따로 앉아도…….”

“그런 게 어딨어? 이렇게 만났는데 같이 마셔야지. 괜찮지, 율리안?”

미하일이 묻자, 율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산만 정확하다면야.”

“봤지? 그러니까 여기 앉아.”

미하일은 자기가 종업원이라도 되는 양, 능숙하게 테이블을 세팅하고 맥주를 서빙 했다.

그에게서 맥주를 받아 든 수혁과 일행은 그것을 한 모금 들이켜고는, 왜 이곳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알 수가 있었다.

“이거 진짜 맛있네요.”

“그래.”

“끝내주네, 이거.”

한국 호프집에서 마시는 생맥주 같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다.

맥주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수혁이 눈을 크게 뜰 정도로 말이다.

수혁은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떠들며 연신 맥주를 홀짝였다.

‘재밌네.’

맥주도 맛있었고, 사람들도 좋았다.

오늘이 독일에 온 이래로 가장 즐거운 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쿠우우웅-!

묵직한 진동이 느껴지더니, 술집의 창문이 동시에 흔들렸다.

“뭐, 뭐야?”

소방관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콰아아앙-!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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