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129화
“……뭐라고?”
“362㎝?”
수혁의 기록을 본 모두가 경악했다.
소방관들의 신체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육상 선수가 아니다.
그런데 362㎝라니?
이건 소방관이 아니라 훈련받은 육상 선수나 낼 법한 기록이었다.
‘이거 너무 나왔네.’
자신의 기록을 본 수혁이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나라 소방관들의 체면을 생각해서 조금 좋은 기록을 내려고 하긴 했지만, 이건 좀 과했다.
주변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시선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한국, 독일 할 것 없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수혁과 기록을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수혁은 머쓱한 얼굴로 자신의 자리에 돌아갔다.
지양호가 그런 수혁을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진즉에 알고 있기는 했는데……. 이거 진짜 괴물이었잖아?”
지양호는 괜히 자신이 우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독일 소방관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모습이 조금 통쾌하기도 했고.
“생각보다 기록이 좋게 나와서 놀랐어요. 오늘 컨디션이 조금 좋은가 본데.”
“겸손 떨기는. 누가 봐도 대충 뛰더만.”
지양호는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아무튼 계속 이렇게만 해라 독일 애들이 우리 애들 무시하지 못하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요?”
자신들을 무시하는 기색이나, 인종차별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오히려 혹시나 자신들이 그런 오해를 할까 극도로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지금까진 그렇지.”
지양호도 수혁의 말에 동의했다.
“그런데 저 녀석들도 사람이야. 계속해서 이렇게 기록에 차이가 나면, 자기들도 모르게 우리를 얕보는 마음이 생길 수가 있어.”
소방관이라고 모두가 훌륭한 인격을 가지고, 존경받을 만한 성품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도 당연히 모난 사람은 있게 마련이었고, 지양호는 그런 이들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잘했다.”
지양호가 수혁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 이제 다음 측정을 하러 가시죠.”
크라우프가 수혁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어느새 모든 조의 측정이 끝났기에 이동을 할 때가 된 것이었다.
“가자.”
사람들은 크라우프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 이동을 시작했다.
“이번 측정은 윗몸 일으키기입니다.”
소방관들은 서로 짝을 지어 윗몸 일으키기를 준비했다.
윗몸 일으키기는 타고난 신체 스펙보다는, 그동안 얼마나 단련을 했는지가 중요했기에, 한국과 독일의 차이가 나지 않았다.
평균적으로 60개 정도.
수혁 역시 조절을 하며 63개로 마무리를 했다.
수혁의 기록을 본 사람들의 표정에 왠지 안도감이 서렸다.
좋은 기록이긴 했지만, 제자리멀리뛰기에 비하자면 평범한 축에 끼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육상이라도 했었나 보군.’
크라우프를 비롯한 독일 소방관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362㎝라는 기록의 충격에서 벗어나자, 조금씩 냉정함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다음 측정인 20m 왕복달리기에서 그들은 다시 한 번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저거 소방관 맞아? 육상 선수 아니고?”
“아니, 그전에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20m 코스의 양쪽 끝선을 표시하고, 출발 신호가 울릴 때마다 반대쪽을 향해 달리며 왕복하는 종목.
왕복하는 동안 정해진 주기에 따라 신호는 가속되고, 신호음이 들릴 때까지 라인에 도달하지 못하면 측정이 종료된다.
우리나라는 78개 이상이 만점이었다.
독일에선 만점의 기준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그들의 평균 기록은 83개 내외였다.
그런데 수혁은?
(99.)
측정기에 표시되어 있는 수혁의 기록은 상식을 벗어난 수준이었다.
이건 잘한다, 못한다를 논할 수준이 아니었다.
과연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그런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 정도의 기록이었다.
심지어 이런 미친 기록을 낸 수혁의 얼굴에 땀 한 방울 흐르지 않고 있다는 게 더 무서웠다.
“너 사람 아니지?”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82개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둔 지양호가 허탈한 눈빛으로 수혁을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하세요? 듣는 사람 섭섭하게.”
“아니, 99개가 말이 되냐? 저게 사람이 낼 수 있는 기록이냐고.”
“제가 했잖아요.”
“그러니까 너 사람 맞냐고 물어보는 거지.”
제자리멀리뛰기에서 냈던 기록도 대단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사람이 낼 수 있는 기록이었기에, 애써 납득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아무리 체력과 순발력이 좋다고 한들…….
“대단하군요.”
크라우프가 수혁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는 85개를 해내며, 수혁 이전에는 가장 높은 기록을 달성한 상태였다.
“제가 체력에는 자신이 있어서요.”
“그냥 자신이 있다는 말로 넘어갈 수준이 아닌 듯싶습니다만…….”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수혁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율리안이 왜 그렇게 당신을 신경 쓰고 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율리안의 이름이 나오자 수혁이 귀를 쫑긋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율리안이 자신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자신을 직접 독일로 초대하는 것만 봐도 그랬으니까.
그런데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대회에서 그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해서?
그것도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있겠지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쓸 일인가? 싶기도 했다.
“지난번 한국에 다녀온 이후로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더군요. 한국에서 대단한 소방관을 봤다면서.”
대단한 소방관이라니.
괜히 민망함이 찾아와 뺨을 긁적였다.
“세계 신기록을 달성한 그를 이기고, 우승을 차지한 사람이니 대단한 사람이겠구나 하고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오늘 수혁이 보여준 모습을 직접 보니, 당시 율리안의 심정이 이해가 가긴 했다.
“이번 연수는 명목상 한국에서 독일의 소방 기술을 배운다는 것이지만, 율리안은 그 반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군요.”
수혁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율리안은 우리가 당신에게 뭔가를 배우길 바라는 겁니다.”
오후 내내 진행되었던 체력검정이 끝났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남은 종목에서도 수혁은 압도적인 기록을 세우며 다른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그나마 수혁에게 비벼볼 만한 사람은 율리안 정도뿐이었다.
“오늘 예정된 일정은 여기까지고,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갈 겁니다.”
오늘 체력검정에서 세운 기록들을 기반으로 앞으로의 교육을 진행한다고 했던가?
솔직히 수혁은 그 교육이라는 것에 별로 흥미를 가지지 못했다.
독일의 소방, 구조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스킬보다 뛰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수혁은 그것보다 크라우프가 한 이야기가 더 신경 쓰였다.
‘나한테 뭘 배울 게 있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건지…….’
평범한 소방관이 수혁에게 배울 수 있는 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들은 수혁과 같은 능력이 없었으니까.
이건 가르쳐 줄 수도 없을뿐더러, 가르쳐 준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이전 생에서 10년 동안 겪어왔던 경험을 이야기해 주는 정도뿐인데…….
사실 그런 건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에이, 모르겠다.’
수혁은 고민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처음부터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진행된 일이었으니, 굳이 그것에 대해 신경쓸 필요는 없었다.
뭔가를 배우고 싶다?
그럼 알아서 배우라고 하라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낸 수혁은 일행과 함께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어이구, 피곤하다.”
옆자리에 앉은 지양호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게 왜 그렇게 무리를 하셨어요? 나이도 있으신 분이.”
“누가 들으면 오해한다. 나 아직 팔팔해.”
지양호가 인상을 쓰며 수혁을 노려보았다.
“그래도 내가 책임자인데 설렁설렁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않겠냐.”
평소에는 털털하고 거칠기만 한 모습이었지만, 지양호는 나름대로 책임자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굳이 훈련에 참가하지 않고 감독만 해도 되는 위치였음에도, 누구보다 앞장서 솔선수범을 보이는 것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내일은 뭐 한답니까?”
“실화재 훈련.”
“아, 그럼 파트 나눠서 해요?”
“그럴 거다.”
35명의 연수 인원이 모두 구조대원인 것은 아니었다.
구급대를 제외한 화재 진압대와 구조대가 섞여 있는 인원이었던 것이다.
실화재 훈련이라면 소방 진압과 구조, 두 파트로 나뉘어 훈련할 가능성이 높았다.
“독일이라고 해서 한국이랑 딱히 다른 건 없네요.”
“세세한 건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충 비슷할 거다. 독일이라고 해서 획기적으로 불을 끄고 사람을 구하는 방법이 있을 리는 없으니까.”
맞는 말이었다.
‘그럼 대체 뭐 하러 이런 연수를 하는 건질 모르겠네.’
수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오늘 저녁 먹고 애들이랑 같이 주변 좀 돌아다닐까 하는데, 같이 갈 거냐?”
이왕 독일까지 왔는데, 소방 학교와 숙소만 돌아다니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네, 그렇게 할게요.”
최은송과 함께 오지 못했으니, 사진이라도 잔뜩 찍어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호텔 방에서 잠시 쉬다 저녁을 먹은 일행이 밖으로 나왔다.
“역시 독일은 뭔가 중후한 느낌이 많이 나네.”
베테랑 소방관인 신의성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유럽 특유의 건축 양식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역시 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김성태가 그런 신의성의 옆으로 다가가 웃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자 신의성은 기분이 좋은 듯 김성태를 돌아봤다.
“너 오늘 기록 좋더라. 운동 많이 했나 봐?”
“소방관이라면 그 정도는 기본 아닙니까? 물론 조금 노력한 건 맞지만, 그렇게 칭찬해 주실 정도는 아닙니다.”
‘얼씨구?’
겸양을 떠는 김성태의 모습을 본 수혁이 혀를 찼다.
계속해서 적개심 어린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이었다.
수혁이 미친듯한 기록을 세우기 시작하자, 그는 언제 도발을 했냐는 듯 시선조차 주지 못했었다.
그런 사람이 겸손을 떠는 모습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어느 쪽으로 갈까?”
지양호가 묻자, 신의성이 냉큼 대답했다.
“제가 좀 알아봤는데, 함부르크에는 시청이 유명하다고 하답니다. 거기부터 구경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래, 그럼 일단 거기부터 가보지.”
지양호의 결정에 목적지가 정해졌다.
“이런 덴 마누라랑 왔어야 하는데. 이런 시꺼먼 놈들이랑 돌아다니려니 눈물이 다 난다.”
수혁은 지양호의 말에 픽- 하고 웃었다.
“그건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여자친구랑 왔어야 했는데…….”
“그때 공항 앞에서 본 분이 여자친구지?”
“네.”
“뭐 하는 친구야?”
“그냥 한식 요리사요.”
수혁의 대답에 지양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결혼할 생각이고?”
“아직 만난 기간이 그렇게 길진 않지만, 그럴 생각이긴 해요.”
“그럼 잘해줘라. 소방관 마누라로 사는 거, 절대 쉬운 일 아니니까.”
수혁도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