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128화
수혁은 일단 테러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꽤 큰 피해가 일어나는 사건이긴 했지만, 지금도 아니고, 몇 년 후에나 일어날 일을 지금 누군가에게 경고해 줄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나중에는 방법을 한번 찾아봐야겠어.’
몇 년 후에는 ISIS의 폭력적인 테러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주 일어난다.
유럽은 물론이고,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발생했을 정도였으니까.
다행히 한국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지만, 그 덕분에 많은 구조대원이 해외로 지원을 나가기도 했다.
수혁은 그때 희생된 수많은 사람을 떠올리며, 뭔가 방도를 강구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입니다. 그럼 다음 장소로 가시죠.”
수혁이 잠깐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테러 대응 전술 훈련장의 설명이 끝이나 버렸다.
수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오전에는 시설에 대한 소개와 간단한 설명을 듣는 것으로 끝마쳤다.
“한국이랑 별다를 건 없네.”
지양호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수혁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한국 쪽 시설이 더 우수했다.
서울에 있는 소방 학교의 시설은 세계 어느 곳에 내놔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지어진 지도 얼마 되지 않아, 훨씬 깔끔하기도 했고.
그에 반해 이곳은 지어진 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독일답게 유지보수는 잘하고 있는 듯했지만, 그래도 오래된 느낌은 지우지 못했다.
지금 이들이 향하고 있는 식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게 식당이야?”
무슨 오래된 예술 건축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모르고 봤다면 식당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학교가 세워진 지 백 년 정도 됐다고 하더라고요.”
수혁의 말을 들은 지양호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나라의 소방, 구조 기술은 세계에서도 탑급이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하지만 그 역사는 독일에 비하자면 너무도 짧았다.
이런 식당 건물 하나만 봐도 독일이 우리나라보다 얼마나 앞서 소방관을 육성했는지 알 수가 있었다.
“생각보단 배울 게 많을 수도 있겠다.”
지양호는 오전 내내 심드렁하던 표정을 바꾸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선 일행은 그곳에서 점심 식사를 마쳤다.
전날 율리안과 함께 갔던 식당에서 먹었던 것과는 조금 다르긴 했지만, 독일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식사였다.
점심을 다 먹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진 뒤, 오후 일정이 시작됐다.
“앞으로 8주간, 여러분과 함께 교육 훈련을 하게 될 분들입니다.”
오후 일정이 시작되자 향한 곳에는 이십여 명의 소방관이 도열한 채, 일행을 쳐다보고 있었다.
‘시보인가?’
수혁은 그들이 아직 소방관 임용되지 않은 소방사 시보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을 살펴보던 수혁은, 그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었다.
도열해 있는 소방관 중에는 율리안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사람은…….’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예전에 대회 때 율리안의 옆에 있던 사람인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독일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율리안이 앞으로 나서며 일행을 반겨주었다.
그러면서 도열해 있는 소방관들을 한 명, 한 명 소개해 주기 시작했다.
수혁의 일행까지 합하면 총 58이 넘는 인원이었는지라, 통성명하는 것 만해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늘은 첫날이니 가볍게 체력 측정부터 실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측정이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기초 체력 훈련이었다.
한국에서도 서 내에서 자주 실시하는 훈련 중 하나.
세세한 방법은 달랐지만, 독일에서도 한국과 거의 비슷한 방식의 훈련을 하고 있었다.
“일단 조부터 나누죠.”
율리안은 한국의 책임자인 지양호와 의논한 뒤, 56명의 인원을 네 명씩 14개 조로 나누었다.
한국과 독일의 소방관들을 적절하게 섞어 조를 나누어, 서로 교류하기도 쉽게 만들었다.
놀랍게도 수혁을 제외한 다른 대원들은 어느 정도 영어가 가능했다.
심지어 지양호마저도 말이다.
일부러 영어가 가능한 인원만을 선발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수혁은 괜한 배신감에 지양호를 노려보았다.
“응? 왜 그렇게 쳐다보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양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수혁은 시선을 피했다.
혼자만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자신이 쭈구리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그 덕분에 수혁도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영어가 가능한 다른 대원들이 대신 말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조별로 나누어서 각 측정 종목을 로테이션으로 돌리겠습니다.”
오늘 준비되어있는 체력측정 종목은 총 여섯 가지.
악력, 배근력, 앉아 앞으로 밀기, 제자리멀리뛰기, 윗몸 일으키기, 20m 왕복달리기가 그것이었다.
“저희 조는 제자리멀리뛰기부터 하면 되겠군요.”
수혁의 조원 중 한 명인 크라우프가 말했다.
“음, 그러네요. 그쪽으로 이동하면 될 것 같습니다.”
크라우프의 말을 받은 것은, 신의성이라는 이름의 구조대원이었다.
지양호를 제외하고, 근무 경력이 가장 오래된 베테랑이기도 한 그는 유창한 영어 실력을 뽐내며 크라우프와 대화를 나누었다.
‘다들 대단하네.’
그 모습에 수혁은, 대체 자신은 그동안 뭘 했는지 자괴감이 들었다.
수혁은 우울해하며 조원들과 함께 제자리멀리뛰기 측정장으로 이동했다.
조는 14개였지만 측정 종목은 여섯 개였기에, 다른 몇 조도 같이 이동했다.
“아까부터 왜 그렇게 죽상이냐?”
지양호가 수혁의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그의 조도 제자리멀리뛰기부터 시작하는 듯했다.
“아, 다 영어를 잘해서요. 나만 못하네.”
수혁의 말에 지양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린놈이 영어 공부도 안 하고 뭐 했냐? 요즘은 영어가 필수야, 필수. 간부시험 치려면 영어 좀 할 줄 알아야 돼.”
나중에 후회하기 싫으면 지금부터라도 영어 공부하라는 지양호의 잔소리에 수혁의 안색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간부까지 할 생각은 없는데.’
만약 간부를 노린다고 해도 그것은 먼 훗날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영어가 필수라는 말은 동의했다.
영어를 하지 못해 난감했던 적이 벌써 몇 번째인가?
불편해서라도 진짜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우리 조부터 실시하겠습니다.”
세 개의 조가 함께 있었기에, 서로 순서를 정했다.
수혁의 조는 마지막 세 번째.
크라우프는 조원들을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천막 쪽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 차례가 될 때까지 여기서 좀 기다리죠.”
수혁의 조와 지양호의 조가 대기하고 있는 사이, 첫 번째 조가 측정을 시작했다.
‘아, 저 사람은?’
인천 공항에서 지양호에게 한바탕 깨졌던 바로 그 남자였다.
‘김성태라고 했던가?’
별로 기억에 담아두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자기소개할 때 흘려들었더니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김성태는 자신의 차례가 오자 슬쩍 수혁을 쳐다보았다.
그러곤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왜 저래?’
그것을 본 수혁은 대체 자신이 뭘 잘못했기에, 김성태가 저런 태도를 보이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지양호의 말로는 질투와 시기 따위 때문이라는데…….
도대체 소방관이 소방관을 질투해서 어따 써먹는단 말인가?
수혁은 고개를 저으며 김성태의 측정을 지켜봤다.
“후웁!”
심호흡하며 타이밍을 재던 그가 펄쩍 뛰었다.
타닷-!
살짝 비틀거리긴 했지만 안정적인 자세로 착지에 성공했다.
삐빅-!
측정기가 그의 기록을 화면에 표시했다.
273㎝.
“오…….”
그 기록을 본 한국 소방관들이 감탄했다.
한국 체력 검정에서 제자리멀리뛰기의 만점은 253㎝.
김성태는 그보다 20㎝나 더 멀리 뛰었으니, 감탄할 만했다.
하지만 독일 쪽에선 그리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기준에선 꽤 잘 뛰긴 했지만, 그렇다고 놀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성태는 자신의 기록에 만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 번 수혁을 쳐다보았다.
마치 ‘어떠냐?’ 하며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초딩인가?’
수혁은 대응할 가치도 느끼지 못해 그냥 시선을 외면해 버렸다.
그러자 김성태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자신이 이겼다는 듯 말이다.
김성태의 다음 주자로 나온 사람은 미하일이라는 이름의 구조대원이었다.
그는 잠시 몸을 풀더니, 별로 긴장한 기색도 없이 가볍게 점프를 했다.
삐빅-!
“300?”
“저렇게 쉽게?”
미하일의 기록은 김성태의 기록을 가뿐하게 넘겨 버렸다.
혼신의 힘을 다한 것 같지도 않았고, 그냥 연습하듯 가볍게 몸을 날렸음에도 그랬다.
그의 기록을 본 김성태의 얼굴이 굳어지는 게 웃기긴 했다.
“오늘 컨디션 별로인 것 아니야, 미하일?”
“그게 아니면 축 처진 뱃살 때문이겠지.”
미하일의 동료들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에겐 미하일의 기록도 그리 특별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이어지는 기록들로 증명이 되었다.
302㎝.
301㎝.
302㎝.
죄다 최소한 300㎝ 이상의 기록을 냈다.
그것을 본 한국 소방관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들의 기록과 비교하자면 최소한 10㎝ 이상의 기록 차이가 났다.
이건 단순히 기록이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존심이 달린 문제였다.
지양호가 301㎝를 기록하며 어느 정도 자존심을 회복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이거 분위기가 어째 쎄하네.”
측정을 끝내고 돌아온 지양호가 수혁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뭐, 어쩔 수 없죠. 기본적인 신체 능력부터 차이가 나는데.”
평균 신장부터가 달랐다.
아무리 우리나라 소방관들의 체격이 좋다고 하지만, 독일 소방관들 역시 일반인보다 체격이 좋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신체 스펙이 부족하니, 기록이 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너는 몇 정도 나오냐?”
“글쎄요?”
이번 생에서는 소방 학교에서 측정해보고는 지금까지 한 적이 없었다.
당시 수혁의 기록은 272㎝.
만점의 기록이긴 했지만, 김성태보다도 못한 기록이었다.
이전 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측정 기록이 가장 높았을 때도 270㎝대.
그런데 지금의 수혁은 예전의 수혁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신체 능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맘만 먹고 뛰면 세계 신기록 정도는 간단하게 갱신하고도 남을 정도로 말이다.
“너라도 잘해서 애들 기 좀 펴줬으면 좋겠는데.”
지양호가 은근슬쩍 부탁을 해보았다.
그가 본 바로는, 수혁은 절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BBC 뉴스에서 방영된 수혁의 모습은 도저히 사람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었다.
게다가 세계 최강 소방관 경기에서 세계 신기록을 갱신하며 우승하지 않았던가?
괴물이라 불리던 율리안을 압도하는 성적으로 말이다.
수혁이라면 뭔가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최선을 다해볼게요.”
독일 소방관들에게 악감정은 없다.
저들은 친절했고, 자신들에게 생각보다 더 깊은 호감을 표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의기소침해하고 있는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조금은 노력을 해볼 생각이었다.
이윽고 수혁의 차례가 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오죽하면 다른 측정을 하고 있는 소방관들도 이쪽을 쳐다볼 정도였다.
한국은 말할 것도 없었고, 독일 소방관들도 율리안 덕분에 수혁이란 사람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혁은 시작선에 서서 팔을 앞뒤로 흔들다 가볍게 땅을 박찼다.
탁-!
수혁이 착지하는 소리가 들리고, 바로 기록이 떠올랐다.
[362㎝.]
세계신기록과 고작 11㎝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기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