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스큐 시스템-126화 (126/425)

레스큐 시스템 126화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이 속속 모이기 시작했다.

수혁과 지양호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통성명을 했다.

수혁의 이름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지양호처럼 호감을 표시하던가, 아니면 지양호에게 혼이 난 남자처럼 불편해하던가.

다행히 전자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수혁 덕분에 소방관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좋아진 데다, 관심도 높아졌으니 호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수혁을 불편해하는 쪽이 비정상이었다.

수혁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많은 질문을 받았다.

푸켓에서의 일부터 시작해, 예능에 출연했을 때 어땠냐는 것까지.

사람들이 입에 침이 마를 때까지 대답을 해주던 수혁을 놔준 것은 집합 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이쪽으로 모이세요!”

경기도 소방청에서 나온 관계자가 소방관들을 한데 불러모았다.

관계자는 앞으로의 일정과 주의사항 등을 이야기해 주고는 기념 촬영을 하자며 줄을 세웠다.

“쯧, 귀찮게.”

지양호가 혀를 차며 자리를 이동했다.

수혁 역시 고소를 지으며 지양호와 나란히 서는데, 관계자가 수혁을 불렀다.

“아, 수혁 씨는 가운데 쪽으로 좀 와주세요.”

“예?”

“맨 앞줄 가운데요. 거기서 플래카드 좀 들어주세요.”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수혁이 홍보용으로 쓰기엔 제격이라는 말이었다.

수혁은 어쩔 수 없이 관계자의 말대로 맨 앞에 섰다.

“그럼 찍습니다!”

똑같은 포즈로 세 번 정도 사진을 찍은 후에야 촬영이 끝났다.

“이제 저를 따라오세요.”

관계자는 35명의 소방관을 인솔해 이동했다.

“이제야 출발이네요.”

수혁은 벌써 지친 표정이었다.

“이놈의 공무원들은 하여간 쓸데없는 일에 시간 낭비한다니까.”

지양호는 본인도 공무원인 것은 마찬가지였음에도 싸잡아 욕을 했다.

“대체 기념 촬영 같은 건 왜 하는 건지. 그딴 걸 누가 본다고.”

인터넷 기사 몇 개.

그것도 일부러 검색하지 않으면, 절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꼭꼭 숨겨 있는 것들에 올리기 위한 사진이었다.

“그래도 기록을 남기려면 찍긴 해야 하잖아요.”

“쯧.”

수혁이 변호를 하고 나서자 지양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그 시간에 애들 쉬는 시간을 주는 게 훨씬 생산적이지.”

앞으로 열한 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을 해야 한다.

그리 넓지 않은 이코노미 석에 앉아서 그 긴 시간 동안 비행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곤욕이다.

이 연수의 책임을 맡고 있는 지양호로선, 괜한 곳에 체력을 낭비하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들어.”

지양호는 이런 경험을 몇 번 해봤는지, 아주 학을 떼는 모습이었다.

수혁은 지양호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출국 심사를 끝마쳤다.

“지금부터 출발 시간까진 자유. 쇼핑하든, 휴식을 취하든, 다 좋은데. 늦지만 말고. 자, 해산.”

지양호는 소방관들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벤치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수혁은 잠시 어찌할까 하다, 일단은 최은송에게 줄 선물부터 사기로 결정했다.

“뭘 사야 하나?”

최은송과 푸켓 여행을 갔을 때 한 번 와보긴 했지만, 공항 내 면세점은 수혁에겐 아직 별세계였다.

난생처음 보는 브랜드가 대부분이었고, 사실 뭐라고 읽어야 할지조차 모르겠는 간판들도 많았다.

수혁은 대충 눈치를 살피다, 그나마 자신이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매장을 발견하곤 그곳으로 들어갔다.

“음…….”

사람이 꽤 많았다.

의외인 건 자기처럼 혼자 들어와 쭈뼛거리는 남자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들 여자친구 선물 사러 온 건가?’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졌다.

“찾는 게 있으신가요?”

수혁이 어찌할 바를 몰라 어색한 모습으로 겉돌자, 눈치 빠른 직원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아, 여자친구한테 선물을 하나 해주려고 하는데…….”

수혁의 말에 직원이 눈웃음을 지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는 경우였다.

“이쪽으로 와보시겠어요?”

직원은 수혁의 나이대를 고려해 젊은 여성들에게도 잘 어울리고, 가격도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제품들을 소개해 주었다.

“이 제품이 고객님 나이 정도의 여성분들이 가장 선호하는 제품이에요.”

직원이 추천한 것은 검은색 가죽에 금빛 로고가 박혀 있는 작은 가방이었다.

수혁은 짐짓 익숙한 것처럼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뭐가 이렇게 비싸?’

수혁의 머릿속에는 ‘면세점=싸다’라는 공식이 자리 잡혀 있었다.

그런데 짐이 그리 많이 들어가지도 않을 것 같은 작은 가방 하나가 수십만 원 단위였으니, 놀랄 만도 했다.

‘아니지, 원래 여자 가방은 비싸다고 했어.’

평생 동안 이런 걸 구경해 보지 못했을 뿐, 이야기는 들어봤다.

수혁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할게요.”

생각보다 가격이 비싸긴 했지만, 혼자 집에서 지낼 최은송을 생각하면 이 정도 출혈은 감수할 만했다.

최은송에게 줄 선물을 고른 수혁은 면세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시들해졌다.

최은송과 함께했을 때는 그저 즐거웠는데, 지금은 괜히 심심했다.

‘먹을 거나 사서 좀 쉬자.’

수혁은 아이스크림 두 개를 사 지양호가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어, 구경 잘했냐?”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을 하고 있던 지양호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수혁을 발견했다.

“이거 하나 드세요.”

수혁은 사온 아이스크림 중 하나를 그에게 건네곤 옆에 앉았다.

“아직 시간 여유 있는데 좀 더 돌아다니지 않고?”

“뭐, 딱히 볼만한 게 없더라고요.”

수혁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아이스크림을 베어 먹었다.

“잘 먹으마.”

지양호 역시 아이스크림을 한입 물고는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독일은 가본 적 있으세요?”

“예전에 한 번.”

“여행으로요?”

“아니, 일. 독일까지 여행 다닐 여유가 어디 있겠냐.”

지양호는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는 가봤냐?”

“저는 해외에 나가는 것도 이번이 두 번째인데요.”

“처음은 어디 갔는데?”

“태국이요. 여자친구랑.”

“아…….”

지양호는 그제야 수혁이 푸켓에서 영웅이라 불렸다는 것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가 처음이었어?”

“운이 없었죠.”

“네가 구한 사람들은 운이 좋았던 거고.”

만약 수혁이 그 시간에 그곳에 없었더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 죽었을까?

전체 희생자 숫자에 비하자면 수혁이 구한 것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혁이 한 일이 별 볼일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수혁 한 명으로 인해 구조된 사람 백여 명과 그들의 가족 수백 명이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무슨 생각 하면서 사람을 구하냐?”

“음…….”

지양호의 질문에 수혁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구하냐고?

사람을 구조할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생각은 없었다.

“그냥 구하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없는 것 같은데요?”

“괜한 잡생각을 하는 것보다 그게 낫긴 하지.”

생사를 다투는 현장이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구해야 할 사람의 목숨까지 위험해지는.

그런 현장에서는 정신을 오직 ‘구조’ 하나에만 집중시켜도 모자랐다.

“그런데 나는 현장에 출동하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들더라.”

지양호가 씁쓸하게 웃었다.

“어떤 생각이요?”

“요구조자는 아직 무사할까? 이렇게 하는 것이 맞을까? 실수하면 어떡하지? 다른 방법을 택하는 것이 더 좋았을까?”

불안감.

지양호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너는 지금까지 눈앞에서 요구조자의 생명을 놓친 기억이 별로 없을 거야. 그렇지?”

많았다.

이전 생에서는 자신이 구하지 못한 이들에 대한 생각으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정도로 괴로웠던 때도 있었으니까.

“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아니었다.

산불이나 쓰나미 같은 대형 재난 현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희생자가 나오긴 했지만, 수혁이 직접 구조에 나서 실패한 적은 없었다.

“나는 너무 많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지양호의 손이 살짝 떨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렇겠지.’

지양호는 수혁이 이전 생과 이번 생의 경험을 합친 것보다도 오랫동안 소방관 생활을 했다.

수혁과 같은 능력이 없는 이상, 당연히 적지 않은 구조 실패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래서 온갖 생각이 다 들더라고.”

“이해합니다.”

수혁도 그랬으니까.

“아직 1년도 안 된 놈이 이해하긴 뭘.”

수혁의 위로에 지양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민망해하는 수혁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소방관은 말이다, 절대로 실수하면 안 돼.”

“그게 가능합니까? 사람인데.”

“그래, 사람은 실수하지. 그래도 소방관은 실수하면 안 돼. 네가 실수하면 한 사람이 생명을 잃는다. 우리의 실수는 웃으며 반성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 호탕한 사람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일까?

수혁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소방관이라면 모두가 하나씩은 가슴에 품고 있는 상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을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그 비율이 적어도 우리나라 소방관의 20~30% 이상이라고 하니, 얼마나 많은 소방관이 정신적으로 힘든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정도였다.

지양호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너는 실수하지 마라.”

지양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부탁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말이 안 되는 것인지.

하지만 그는 진심으로 수혁이 현장에서 실수해, 자신과 같은 경험을 겪지 않길 바랐다.

“노력하겠습니다.”

수혁도 사람이다.

아무리 남들과 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사람인 이상 실수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도 많은 실수를 범했다.

다행히 그것이 희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지양호의 말대로 자신이 실수하면, 언젠간 그로 인해 하나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수혁은 지양호에게 노력하겠노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양호는 그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자신의 말이 얼마나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지 알고 있었기에 그냥 넘어갔다.

“근데 이 아이스크림 어디서 샀냐? 맛있네.”

어느새 아이스크림을 다 먹어버린 지양호가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저쪽이요.”

“머냐?”

“아뇨, 그리 멀진 않아요. 걸어서 5분도 안 걸리는…….”

“그럼 가자. 우울한 얘기를 하니까 단 게 먹고 싶어졌어. 내가 살 테니까 너도 하나 더 먹어라.”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걸어가는 지양호의 뒷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누군가와 닮은 것 같았다.

키도, 덩치도 달랐지만…….

‘상태 형 같네.’

수혁이 피식- 웃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사실 그도 아이스크림이 맛있었다.

함부르크 공항.

수혁을 포함한 35명의 소방관이 입국 심사를 통과하고 밖으로 나왔다.

“여기가 독일이구나.”

외국인들이 득실대는 공항의 전경을 보자, 여기가 한국이 아닌, 독일임이 실감 되었다.

“반갑습니다.”

수혁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어색한 한국말을 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수혁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율리안이라고 했던가?’

수혁을 쳐다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는 바로 율리안 드락슬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