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124화.
돌아오지 않는 수혁을 분식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이 조금씩 지쳐 갔다.
“그냥 돌아갈까?”
제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물었다.
“그래도 수혁 오빠가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벌써 한 시간이 지났어.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순 없잖아.”
“다시 한 번 전화해 볼게.”
시애가 스마트폰을 들어 수혁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전원이 꺼져 있다는 음성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아직도 꺼져 있어?”
“응, 그러네.”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아까부터 몇 번이나 전화했지만 계속해서 전원이 꺼져 있었다.
“어떻게 하지?”
“일단 매니저 오빠를 부를까? 여기를 그냥 비워둘 수도 없으니까.”
아이들은 일단 매니저를 부르기로 했다.
시애가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이곳으로 와달라고 부탁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바로 온대. 그때까진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라고…….”
말을 하던 시애가 말끝을 흐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에 효진과 제스가 뒤를 돌아봤다.
“어?”
“오빠?”
수혁이 분식집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상태가 이상했다.
멋들어지던 정복 상의는 어떻게 된 것인지 걸레 조각이 되어 있었고, 셔츠는 불에 탄 것인지 그을음과 구멍이 송송 뚫려 있었다.
“세상에, 오빠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일 있었어요?”
시애가 수혁에게 다급히 달려가며 비명을 질렀다.
“난 괜찮아. 조금 골치 아픈 일이 좀 있긴 했지만.”
실제로 옷과 머리는 엉망이었지만, 다친 곳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믿지 않았다.
옷이 갈가리 찢어지고 불에 탄 자국이 그대로 있는데, 멀쩡하다는 게 말이 안 됐다.
“진짜 괜찮아. 아, 그리고 너무 늦어서 미안해.”
수혁은 대충 지금까지 자신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설명해 주었다.
아이들은 그 말을 들으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수혁이 멀쩡하다는 말을 더욱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교통사고가 나고, 화재 현장에 들어가 사람을 구하면서 옷이 저렇게 탈 정도인데 안 다쳤다고?
하지만 수혁에게 직접 몸 좀 확인하자고는 할 수가 없었으니, 어쩔 수 없이 납득하는 수밖에.
“일단 경찰에 신고부터 하자. 여기도 비워두고 그냥 갈 수는 없으니까.”
“아, 네.”
시애는 수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경찰에 신고부터 했다.
수혁이 옷을 벗고 한쪽에 있는 수도에서 몸을 씻는 사이, 아이들의 매니저가 도착했다.
그는 분식집 안으로 헐레벌떡 들어오다 수혁의 몰골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아, 오빠, 오셨어요?”
“시애야, 저분은 누구……?”
“내가 전에 말씀드렸던 분이요.”
“아, 그 소방관?”
매니저는 조심스럽게 수혁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버블걸스 매니저인 이용진이라고 합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저는 김수혁이라고 합니다. 어, 꼴이 말이 아니라 죄송하네요.”
“아니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용진은 손사래를 쳤다.
사실 그는 처음 수혁을 봤을 때 겁을 먹었다.
그리고 혹시나 저 무서운 몰골의 남자가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진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수혁의 정체를 듣고 나자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그동안 시애가 한 말에 따르면, 수혁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믿음직한 남자였으니까.
이용진은 자신의 지갑을 꺼내 그 안에서 명함을 한 장 뽑아 수혁에게 건넸다.
“그렇지 않아도 저희 대표님께서 뵙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언제든 연락 한번 주십시오.”
버블걸스 소속사의 대표가 왜 자신을 보고 싶다는 건진 알 수 없었지만, 수혁은 일단 명함을 받아 들었다.
“그럼 저는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 네, 그렇게 해주세요.”
수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용진은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오빠, 다음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병원 꼭 가보세요.”
아이들은 수혁에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인사하고는 매니저와 함께 돌아갔다.
“후우…….”
수혁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 같아선 드러누워 쉬고 싶었다.
“아, 죽겠다.”
테이블에 머리를 댄 채 눈을 감고 조금 쉬던 수혁은 누군가 분식집 문을 열고 들어오자 고개를 들었다.
“신고하신 분입니까?”
“아, 네.”
들어온 것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었다.
수혁은 의자에서 일어나 여기서 벌어진 상황을 설명했다.
분식집 할머니가 심정지로 쓰러졌고,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이송을 했으며, 가게를 비워둘 수가 없어 경찰에 신고한 것이라고.
그런데 경찰은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보단 수혁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신분증 좀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경찰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수혁에게 신분증을 요구했다.
수혁은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경찰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자신이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는 그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수혁은 한숨을 내쉬며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김수혁 씨?”
“네, 맞습니다.”
경찰은 신분증을 잠시 살펴보더니, 수첩을 꺼내 메모를 하고는 다시 돌려주었다.
“아까 할머니에게 심폐 소생술을 했다고 하셨는데, 배운 적이 있으십니까?”
“현직 구조대원입니다.”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수혁이 자신을 소개하자 경찰의 눈빛이 바뀌었다.
설마하니 소방관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 저는 이만 가도 될까요? 보시다시피 제가 꼴이 엉망이라…….”
“아, 네. 혹시 모르니 연락처 하나만 주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수혁은 경찰의 수첩에 폰 번호를 적어주었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경찰에게 물었다.
“혹시 폰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그럼요.”
경찰이 스마트폰을 빌려주자 수혁은 최은송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송 씨, 혹시 저 좀 데리러 와줄 수 있어요?”
도저히 이런 몰골로는 지하철을 탈 수가 없었다.
“넌 또 사고 쳤다며?”
“내가 사고를 치긴 무슨 사고를 쳐요?”
“심정지 환자도 보고, 화재 현장에서 요구조자도 구했다며.”
“그게 무슨 사고를 친 거예요? 사고를 막은 거지.”
“어쨌든, 뭐를 하긴 한 거잖냐.”
박상태가 낄낄- 거리며 수혁에게 어깨동무했다.
“뭐,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멀쩡해요. 옷만 걸레짝 됐고.”
“조금 전에 할머니 실어간 구급대 팀장한테 연락 왔다더라.”
“뭐라고요?”
“할머니는 무사하시다고. 뇌 손상도 거의 없단다.”
“그거 다행이네요.”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걱정되었는데, 쉬지 않고 심폐 소생술을 지속한 보람이 있었다.
“수고 많았다.”
“수고는요, 무슨.”
수혁이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진급 축하한다.”
박상태가 수혁의 바뀐 계급장을 보며 축하해 줬다.
“감사합니다.”
“너처럼 빨리 진급하는 놈은 내 소방관 생활 10년 만에 처음 본다.”
“운이 좋았잖아요.”
“운 같은 소리하네. 그게 운으로 가능한 일이냐?”
직접적인 이유는 세계 소방관 경기 대회 우승이었지만, 사실 현장에서 활약한 정도만으로도 진급이 가능할 정도였다.
운?
이건 실력이었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은 대가였다.
“앞으로도 열심히 해.”
박상태는 수혁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나저나 너 독일 간다며?”
“어디서 들었어요?”
“누구겠냐? 서장님이지.”
“그거 아직 명단 발표 안 나지 않았어요?”
“어제저녁에 발표 났다더라. 너한테는 오늘 가르쳐 줄 예정이었고.”
“사실 별로 가고 싶진 않은데…….”
독일까지 가서 9주나 되는 기간 동안 있어야 한다는 것도 별로였고, 그 시간 동안 최은송을 혼자 집에 두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배부른 소리 하고 앉았네. 인마, 거기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한둘인 줄 아냐? 고작 1년 차 신입을 껴주는 것도 전례가 없는 일인데, 감지덕지하진 못할망정, 뭐? 가고 싶지 않아?”
박상태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10년 동안 열심히 일해 온 자신도 해외 연수는 가볼 기회조차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일을 시작한 지 1년도 되지 않는 놈이 해외 연수라니.
솔직히 말하자면 배가 아플 정도였다.
만약 그 대상이 수혁이 아니었다면, 박상태는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죽어라 갈궜을 것이다.
“뭘 또 그렇게까지 흥분하고 그래요.”
수혁이 민망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박상태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의 태도가 조금 무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확실히 이번 독일 연수는 많은 소방관에게 있어 기회였다.
그리고 자신은 운 좋게 그런 기회를 잡은 것이었고.
실제로는 정말 가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런 말을 입 밖에 꺼내서는 안 됐다.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알면 됐고.”
박상태는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흥분했다는 것에 헛기침했다.
“어쨌든 가서 우리나라 망신시키지 말고, 독일 애들한테 어? 멋진 모습도 보여주고 그러란 말이야.”
“그렇게 할게요.”
대충 시간이나 때우다 올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미안해서라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둘이 사무실로 들어가자 먼저 출근한 구조 3팀 대원들이 반겨주었다.
“야, 김코난! 진급식에 가서도 사고 쳤다며?”
“아니, 사고 친 게 아니라니까요?”
수혁이 분통 터진다는 듯, 가슴을 두들겼다.
“이 정도면 너 때문에 사고가 터지는 거지.”
김강식과 이재한이 웃으며 수혁을 놀렸다.
“2절은 거기까지만 해. 내가 벌써 다 놀려 먹었다.”
박상태가 이재한의 머리를 툭 치고 지나가며 말했다.
“아, 혼자 재미 다 보셨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일이나 해, 인마.”
사무실에 웃음이 터졌다.
“인수인계 준비하고, 전부 밖으로 나와.”
박상태의 명령에 대원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왜 밖으로 나오라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명령은 명령.
2팀과 인수인계를 끝낸 대원들이 밖으로 나왔다.
“어?”
가장 앞서 나갔던 박정우가 눈을 크게 떴다.
밖에는 얼마 전에 짐 머레이가 선물로 주었던 박스가 쌓여 있었다.
“설마?”
김강식이 돌아보자, 박상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사용허가 떨어졌다.
“와, 진짜요?”
“이걸 이제 쓰네.”
대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스로 달려가 뜯기 시작했다.
“우리 팀이 가장 먼저 쓰기 시작하는 거다. 수혁이 덕분이니까 저놈한테도 고맙다고 하고.”
“잘 쓰마.”
“막내 하나 잘 받아서 이런 걸 쓰는 날이 오는구나.”
1인당 수백만 원이 넘어가는 개인 보호 장비 풀세트를 본 대원들은 흥분하며 자신의 것들을 챙겼다.
수혁도 방화복과 장갑, 장화 등의 장비들을 챙겼다.
“수혁 씨!”
그런데 안쪽에서 행정직원 한 명이 수혁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혁이 돌아보자 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독일 연수 명단이 발표됐어요. 수혁 씨도 가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오…….”
그런 얘기를 처음 듣는 대원들이 놀란 얼굴로 수혁을 쳐다보았다.
“하하, 그거 다행이네요.”
쏟아지는 눈빛에 수혁이 민망한 표정으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