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큐 시스템 118화.
“와우.”
짐 머레이는 예향정에 들어가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그것은 수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금 고급스러운 식당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었는데, 이건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한눈에 봐도 고풍스러워 보이는 한옥으로 이뤄진 예향정은, 총 아홉 채의 일반실과 세 채의 별실, 한 채의 특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식당이 아니라 진짜 고택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은송 씨가 일하는 곳이 이렇게 좋은 곳인 줄은 몰랐네요.”
수혁이 정신없이 주변을 구경하며 말했다.
“지어진 지 꽤 오래된 걸로 알고 있어요. 적어도 백 년은 되었을 걸요?”
“그렇게 오래됐어요?”
현대적인 감각이 섞여 있는 인테리어가 중간중간 보여서 그리 오래된 느낌은 받지 못했다.
“엄마가 처음 이곳을 시작할 때, 리모델링을 꽤 했어요. 고풍스러운 느낌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낡아 보이지 않게.”
그녀의 말대로였다.
짐 머레이와 그의 경호원들은 예향정의 정취에 꽤나 감명을 받은 느낌이었다.
그가 지금껏 다녔던 고급 레스토랑과는 전혀 다른, 한국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든 듯했다.
“짐이 마음에 든다고 합니다.”
경호원이 짐 머레이의 말을 통역해 주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수혁은 괜히 자신이 칭찬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우쭐해졌다.
“이쪽으로 오세요.”
최은송의 뒤를 따라가자, 작은 개별실이 나타났다.
“조금 더 좋은 곳을 드리고 싶었는데, 예약이 꽉 차 있어서…….”
최은송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사과했다.
“이렇게 갑자기 부탁한 건데, 더 좋은걸 바라면 도둑놈이죠.”
수혁이 손을 내저었지만, 그럼에도 최은송은 미안한 표정이었다.
그녀로선 처음 이곳을 오는 남자친구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곳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식사는 제가 알아서 준비해 드릴게요.”
“같이 안 먹고요?”
방을 나가려던 최은송을 향해 수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일할 시간이라서. 아무리 엄마가 이곳 주인이라고는 해도 지킬 건 지켜야죠.”
솔직히 최은송이 지금 퇴근한다고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최은송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이 빠진다면, 그만큼 다른 선배들이 힘들어질 것이 뻔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혁의 옆에 자리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진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들어 일을 꽤 많이 쉬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수혁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최은송을 놓아주었다.
“응? 같이 식사를 하는 게 아니었나?”
최은송이 나가자, 짐 머레이가 물었다.
“아직 근무 시간이라고 하네요.”
“이런……. 약속 시간을 조금 늦출 걸 그랬군.”
짐 머레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나저나, 선물은 고마웠습니다. 사람들을 구하는 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수혁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하자, 짐 머레이가 껄껄- 웃었다.
“자네가 내 목숨을 살려준 것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그렇게 인사하면 오히려 내가 부끄럽다네.”
겸양이 아니었다.
실제로 짐 머레이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신일서에 보낸 것은 그가 준비한 선물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요, 그 정도면 차고도 넘칩니다. 단순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신 거니까요.”
수혁이 진지하게 말을 하자, 짐 머레이는 입을 다물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는 평생 동안 소방관이란 존재를 특별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본 적도 없었고, 설사 도움받을 일이 발생한다 해도 그것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푸켓에서 수혁을 만나고 난 뒤에는 그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소방관들의 일이 더는 당연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사람을 구하는 영웅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수혁에게 주는 가장 첫 번째 선물을 개인 보호 장비로 결정했다.
물론 수혁 한 명에게만 주는 것은 그의 체면이 상하는 일이었기에, 수혁이 근무하는 소방서에 모두 돌렸다.
그런데 이렇게 고마워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미국과는 차원이 다른, 열악한 한국의 현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괜히 민망해진 짐 머레이가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수혁의 모습을 보니, 그것들을 선물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며 뿌듯해졌다.
“그런데 한국에는 얼마나 계실 생각입니까?”
“아직은 잘 모르겠네. 생각보다 둘러볼 곳이 많아서 말이야.”
수혁을 보러 한국에 온 것이었지만, 한국은 흥미로운 나라였다.
평소 그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기도 했고.
그래서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머무를 생각이었다.
물론 관광만 할 생각은 없었다.
수혁에게 다른 선물들도 준비해야 하고, 비즈니스 약속도 몇 군데 잡아놓았다.
“아마 이렇게 따로 만날 시간은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네요.”
“그게 무슨 말인가?”
“내일부터 출근이거든요. 그럼 바빠서 따로 시간을 내기가 힘들 겁니다.”
오늘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해서든 한 번은 시간을 빼봤겠지만, 이제는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어 보였다.
“흐음, 그럼 어쩔 수 없지.”
짐 머레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수혁을 만나고자 한다면, 자신이 그의 시간에 맞추면 될 일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며, 미닫이문이 열렸다.
“상 차려 드릴게요.”
본래는 따로 상을 차려주는 종업원이 있었지만, 오늘은 최은송이 직접 음식을 내왔다.
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은송은 그런 수혁을 말렸지만, 수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도와 상을 차렸다.
“와우, 이게 전부 뭔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밑반찬들을 보며 짐 머레이의 눈이 커졌다.
정갈하고 깔끔한 수십 종류의 음식은,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는 것 같았다.
밑반찬 세팅이 끝나자, 메인 요리들이 나왔다.
“너무 급하게 준비하느라…….”
최은송이 죄송하다는 듯 말했지만, 나온 요리는 전혀 초라하지 않았다.
소고기 등심구이와 보리 굴비찜, 통 전복 버터구이 등등.
고급스러운 식기에 담긴 요리들에 짐 머레이가 허허- 웃었다.
“이걸 다 먹을 수는 있을지 모르겠군.”
한 젓가락씩만 먹어도 배가 부를 것 같았다.
“한국은 원래 이렇게 먹나?”
“이 정도는 아니지만, 뭐 여러 가지를 같이 먹기는 하죠.”
사실 수혁도 조금 놀라긴 했다.
그 역시 이런 상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반찬이 가장 많이 나오는 곳이라고 해봐야, 횟집 정도뿐이었으니…….
그런 곳과는 비교 자체가 우스울 정도로 품격이 높아 보였다.
“어떤 걸 먼저 먹어야 될지 모르겠군.”
“그냥 밥이랑 드시고 싶으신 거 골라서 드시면 됩니다. 순서는 따로 없어요.”
수혁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등심구이를 하나 집어 먹었다.
고기가 입에서 녹는 듯 사라져 버렸다.
최은송이 집에서 만들어주는 음식도 좋았지만, 이곳의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짐 머레이 역시 음식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아, 그건 좀 매운 거예요.”
수혁은 간간이 음식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짐 머레이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열심히 설명을 들었고.
그렇게 꽤 길었던 식사가 끝이 났다.
“이렇게 많이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는군.”
짐 머레이는 볼록하게 튀어나온 자신의 배를 두드리며 웃었다.
“맛있으셨다니 다행이네요. 꼭 좋은 음식으로 보답하고 싶었거든요.”
“만족하네. 이런 음식을 경험한 것만으로도 한국에 온 시간이 아깝지 않아.”
지나친 과찬이었지만, 수혁은 기분 좋게 웃었다.
자신의 여자친구가 만든 요리를 칭찬하는데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자네에게 무슨 선물을 해야 할지 많은 고민을 했다네.”
“잘 고르셨네요.”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짐 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로는 부족하지.”
“……전 더 바라는 게 없습니다만?”
“아니지. 바라는 게 없는 게 아니라, 내게 뭔가를 받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일 뿐이야.”
수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선물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다만 수혁은 자신이 구조한 이들에게 뭔가를 받는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장영수나 짐 머레이나.
모두 고마움을 표현하려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혁은 자신이 그것들을 받으면, 왠지 대가를 위해 사람을 구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몇몇 불편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최은송마저도 수혁이 그들에게서 선물을 받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 걸 보면,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긴, 따지고 보면 퀘스트 완료 보상도 그런 것들 중 하나인데…….’
수혁은 자신의 생각을 조금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느꼈다.
짐 머레이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수혁을 배려해 잠시 입을 열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 생각을 마친 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네요.”
“그렇다면 부담을 느끼지 말라고 조언해 주고 싶군.”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머리로는 안다고 해도, 한순간에 생각을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차차 바꾸면 될 일이지.”
짐 머레이는 수혁과의 인연을 짧게 끝낼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길게, 가능하면 자신이 죽을 때까지 이어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동안 수혁에게 많은 것을 주고 싶었다.
‘소방관은 부자이면 안 되는가?’
‘소방관은 좋은 차를 끌고 다니면 안 되는가?’
‘소방관은 좋은 집에서 살면 안 되는가?’
그런 법은 없었다.
소방관이 공무원이라는 점과 희생의 아이콘이라는 점에서, 그런 이미지가 강요되어 왔던 것일 뿐이다.
“사실은 집 선물을 해줄까 싶었는데, 아쉽게도 그건 누가 선수를 쳤더군.”
짐 머레이의 말에 수혁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대체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불쾌했다면 미안하네.”
짐 머레이는 수혁의 표정을 보고는 사과를 했다.
수혁의 뒷조사를 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을 한 것이었으니, 수혁이 불쾌할 만도 했다.
“그래도 너무 안 좋게 보지는 말게나. 나쁜 뜻을 가지고 자네에 대해 알아본 것은 아니었으니.”
“네, 뭐…….”
조금 찝찝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짐 머레이에게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튼 집은 이미 선물을 받았으니, 다른 걸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
대체 뭘 주려고 하기에 저렇게 뜸을 들이는 것인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알아보니 차가 없더군.”
물을 한 잔 따라 마시려던 수혁의 손이 덜컥- 멈췄다.
그러곤 설마 하는 표정으로 짐 머레이를 쳐다봤다.
“차는 좀 필요하지 않겠나?”
짐 머레이가 수혁을 향해 미소 지었다.
“……차 말입니까?”
당황스러웠다.
집에 이어 이번엔 차를 선물받게 생겼다.
“부담스러워할 것 없네. 그리 비싼 건 아니니까.”
아무리 그래도, 자동차 한 대의 가격이 싸면 얼마나 쌀까?
게다가 수천만 원의 소방 장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선물하는 짐 머레이와 수혁의 경제 기준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한번 구경해 보겠나?”